[오래된 공기] 제33화 - 추림

제33화 「추림」

1. 604미터

수요일 아침 여덟 시 십 분에 첫 토막이 올라왔다.

598에서 601, 601에서 604. 두 토막이었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스물이틀째 같은 숫자였다.

“이거 진짜로 스물이틀 동안 안 변한 걸까요.”

재혁이 야장의 같은 칸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23이 스물두 번, 22가 스물두 번.

“안 변했으면 좋겠어?”

“아니요. 이상해서요. 그동안 깊이는 백 미터도 더 늘었는데요.”

“분으로 적으면 안 변해. 초로 적었으면 벌써 여러 번 변했을 거야.”

서진이 장갑 낀 손으로 그 칸을 덮었다.

“우리는 안 변한 걸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가 안 변한 걸 보여 주고 있는 거야.”

“그러면 초로 적을까요.”

“초로 적어서 뭐 할 건데.”

재혁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자를 고칠지 말지는 그 값으로 뭘 할 건지가 정해 줘. 쓸 데가 없는 값은 잘게 적어 놔도 잘게 모를 뿐이야.”

토막 길이를 쟀다. 2.96미터와 2.95미터. 열하루째 값이었다.

케이블 눈금은 66.00미터, 코어 길이 누계는 64.99미터. 차이는 1.01미터였다.

“오늘 벌어진 건 0.09입니다. 사흘 연속 0.09예요.”

“가운데는.”

“열한 점 가운데 여섯째가 0.09요. 그대로입니다.”

“흩어짐은.”

재혁이 열한 개의 거리를 더해 열하나로 나눴다.

“0.011요. 어제가 0.012였으니까 또 줄었습니다.”

“몇 점짜리인지 옆에 적고.”

“적었습니다. 7, 8, 9, 10, 11이요.”

서진이 그 다섯 숫자를 한참 보았다.

“재혁아. 케이블 눈금 한 칸이 몇이야.”

“1센티요. 0.01미터.”

“그러면 네가 방금 적은 흩어짐이 눈금 몇 개야.”

재혁이 숫자를 다시 보았다. 0.011미터. 1.1칸.

”…한 칸하고 조금이요.”

“그 조금이 어디서 나왔어.”

”…나눗셈에서요. 잰 데서 나온 게 아니고요.”

“그래. 흩어짐이 눈금만 해지면 그 밑은 얼음이 만든 게 아니라 자가 만든 거야.”

재혁이 야장에 굵은 가로줄을 하나 긋고 그 밑에 적었다.

「흩어짐 0.011(11점). 케이블 눈금 0.01. 이 밑은 안 읽음. 줄어든 것처럼 보여도 눈금 밑에서는 판정 안 함. 9월 11일에 정함.」

토막 끝 사진은 규칙대로 찍었다. 598-601의 아래끝이 4밀리, 601-604의 위끝이 6밀리. 한 자리, 합 10밀리였다.

“짝 표기 셋째 날입니다. 11, 10, 10. 세 점이에요.”

“세 점으로 뭐 할 거야.”

“두 점으로는 선을 못 긋는다고 하셨으니까, 세 점이면 그을 수 있잖아요.”

“그어 봐. 그 선이 뭐라고 하는데.”

재혁이 세 숫자를 노트 귀퉁이에 찍어 놓고 보았다. 11에서 10으로 내려왔다가 10에서 멈춰 있었다.

“내려갔다가 멈춘 것 같기도 하고요.”

“또.”

”…그냥 10 근처에서 오르내리는데 첫날만 하나 높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둘을 오늘 갈라?”

“못 갈라요.”

“그러면 오늘 알게 된 건 뭐야.”

재혁이 사진 파일 번호를 적으면서 답했다.

“물을 수 있게는 됐다는 거요. 물었더니 모른다고 나온 거고요.”

“그것도 적어. 못 물어본 날하고 물었는데 모른 날은 달라.”

2. 210그램

인천은 저온시료동 344일째였다. 첫 절단까지 21일. 한 대 운용 열엿새째. 이호기 단독 −30.0.

가을 표 열셋째 줄에 어제 것을 옮겨 적었다. 쌓은 시간 13시간 10분, 바깥 25.8도, 문 한 번, 반출입 없음, 습도 「안 잼」, 관측소 값 79퍼센트. 일곱째 칸에는 「앞판 열었음. 팬 비움. 12분.」, 여덟째 칸에는 「6시간」.

은재가 그 줄 왼쪽 여백에 작은 표시를 하나 붙였다.

「우리가 건드린 줄.」

“이 표시가 없으면요.”

“없으면 나중에 보는 사람이 어제 방이 왜 0.3도 올랐는지를 얼음한테서 찾아요.”

아침 여섯 시 제상이 끝나고 20분 뒤에 두 사람은 증발기 앞판을 열었다.

드레인 팬 바닥에 얇은 얼음이 한 겹 앉아 있었다. 어제 통째로 걷어 낸 자리였다.

“물로 못 받네요.”

“배수관에 열선이 없으니까요. 흘러가다가 얼어요. 물로 받을 수 있으면 통 밑에 대 놓으면 되는데, 우리는 긁어서 담아야 해요.”

은재가 주걱으로 얼음을 긁어 통에 담고 뚜껑을 닫았다. 경옥이 통을 저울에 올렸다.

“밖에 들고 나가서 녹여서 재면 안 돼요?”

“나가면 통 겉에 이슬이 붙어요. 그러면 방에 들어온 물이 아니라 바깥 물까지 같이 재요.”

“방 안에서 재면 저울은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그래서 통 무게를 어제 이 방에서 미리 재 뒀어요. 같은 자리, 같은 저울, 같은 온도로요.”

눈금이 흔들리다 멎었다. 통 무게를 뺀 값이 나왔다.

210그램.

은재가 그 숫자를 적으면서 말했다.

“여섯 시간 동안 이 방에 들어온 물이 210그램이네요.”

“아니요. 여섯 시간 동안 들어온 물 중에서 코일에 잡혔다가 오늘 우리가 걷은 게 210그램이에요.”

“다른 게 있어요?”

“셋 있어요. 벽하고 통 겉에 붙은 것, 문 열 때 도로 나간 것, 그리고 팬에 얹혀 있는 동안 날아간 것.”

“얼음이 날아가요?”

“안 녹고도 줄어요. −30도에서는 느리지만 여섯 시간이면 조금은 줄어요. 늦게 잴수록 값이 작게 나와요.”

경옥이 노트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제상 끝나고 20분 뒤에 잰다. 시각을 고정함. 9월 11일에 정함.」

“이걸 왜 못 박아요?”

“안 정해 놓으면 어떤 날은 10분 뒤, 어떤 날은 한 시간 뒤에 재요. 그러면 값이 물의 양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 갔느냐가 돼요.”

은재가 어제 새로 그은 「대신 잰 것」 칸에 첫 기입을 했다.

「대신 잰 것: 제상수 210그램. 무엇 대신: 이 방에 들어온 수분량. 왜 대신: 습도계 없음. 접수번호 있음. 심의 12월.」

“근데 오늘 값은 맞대 볼 데가 없잖아요.”

“없죠. 첫 값은 값이 아니에요.”

“그럼 왜 적어요.”

“내일 것이 값이 되려면 오늘 것이 있어야 하니까요.”

3. 안 보는 날

정한의 작업실은 아침부터 조용했다.

열흘에 한 번으로 바꾼 첫날이었다. 다음 판독은 9월 20일.

여덟 시 반쯤 손이 저절로 선반 셋째 칸으로 갔다. 케이스 모서리에 손끝이 닿고 나서야 오늘이 그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한은 손을 내리고 종이에 적었다.

「9월 11일. 안 봄. 규칙대로임. 손이 먼저 갔음. 그건 생각이 아니라 버릇임.」

오후 네 시에 오른쪽 조명 생각이 다시 났다. 그것도 적었다.

「오늘은 오후 네 시에 났음. 어제는 아침에 났음. 늦게 남.」

빈 30분에는 다섯째 릴을 꺼냈다. 통을 열자마자 식초 냄새가 났다.

아세테이트였다. 정한은 그 릴을 굽지 않았다. 구우면 되는 것은 물러진 풀이지, 줄어든 몸이 아니었다.

테이프 폭이 원래보다 조금 좁아져 있었고,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굽어 있었다. 감긴 몸은 줄어드는데 가운데 릴 허브는 줄지 않으니 안쪽부터 접힌 것이다.

“이건 옮기기 전에 늦춰야 하는 겁니다.”

혼잣말이었지만 정한은 그 말을 그대로 종이에 옮겼다.

아세테이트가 상하면 아세트산이 나오고, 그 아세트산이 다시 분해를 재촉한다. 자기가 낸 것이 자기를 더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 안에 흡착제를 넣고 서늘한 데로 옮겼다. 없애는 것은 못 하고 느리게는 할 수 있었다.

저녁에 의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봉투를 열었습니다.”

정한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

“앞 8분만 아버지가 들으신 걸로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고 해도 그렇게 됩니다.”

“그럴 겁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잘못하신 게 아니잖습니까.”

“제가 겉에 「안 열어도 됩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줄이 문을 하나 만든 겁니다.”

전화를 끊고 정한은 「들은 것」 칸에 오늘 들은 것을 적었다. 의뢰인이 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뒤에 무엇이 생겼다는 것.

그 밑에 다음 것을 위한 줄을 하나 더 그었다.

「다음부터 짐작은 봉투에 넣지 않음. 처리 내역 맨 뒤 장에 붙임. 겉면에는 아무 말도 안 씀. 말로 막으면 오히려 열림. 자리로 막을 것. 9월 11일에 정함. 이번 건은 안 고침. 이미 지나감.」

벽에는 재개 조건 셋을 적은 종이를 붙였다. 2027년 3월 압흔 재촬영, 동규가 다른 조명 장비를 구했을 때, 케이스 오른쪽 끝 접혀 붙은 뒷면.

붙여 놓고 보니 그것은 그만둔 일의 목록이 아니라 아직 안 한 일의 목록이었다.

4. 남은 셋

수요일은 정기 방문일이 아니었다. 하람은 그래도 갔다. 서른세째였다.

순서는 정해 둔 대로였다. 바늘, 또렷하셨던 것, 최영숙, 실 양, 실패.

바늘부터 셌다. 네 자리를 다 봤다. 종이갑에 넷, 핀쿠션에 없음, 미싱 바늘대에 하나, 박던 천에 없음. 다섯 개였다.

어제도 다섯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갑에 셋, 핀쿠션에 하나였다.

「수요일. 다섯 개. 갑 4 / 핀쿠션 0 / 바늘대 1 / 천 0. 수는 어제와 같음. 자리는 다름. 자리가 다른 것은 어제와 다른 일이 있었다는 뜻임.」

제비는 남은 넷에서 뽑았다. 실 양, 실패, 바늘, 또렷하셨던 것.

「또렷하셨던 것」이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셋이었다.

하람은 종이를 접어 넣으면서 어제부터 걸리던 것을 적었다.

다섯 중 하나만 골라 길게 적는다는 것은, 그 하나를 매일 한 번씩 꺼내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같은 묶음 안에서 하나를 자꾸 꺼내면 나머지는 오히려 잘 안 나오게 된다. 밀려나는 것이다.

「내가 고르면 내가 궁금한 것만 어머니한테서 자꾸 나오게 됨. 그러면 나머지가 밀림. 제비를 뽑는 이유가 하나 더 생김. 첫째는 내 궁금증이 길어지지 않게. 둘째는 안 뽑힌 것이 밀리는 걸 내가 정하지 않게.」

어머니는 오늘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하람이 묻지 않았는데 먼저 말했다.

“추석 앞에는 단만 줄여.”

“품은요.”

“품은 안 줄여 줘. 명절 지나고 다시 늘려 달라고 오거든. 두 번 뜯으면 천이 상해.”

하람은 요약하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그리고 그 줄 옆에 작게 표시를 했다.

「물어서 나온 것 아님. 그냥 나옴.」

주간보호는 나흘 뒤였다. 하람은 「오전의 어머니」를 손에 들고 한참 서 있다가, 결국 두 장으로 나눠 다시 썼다.

한 장은 먹는 것, 약, 혼자 두면 안 되는 시간, 넘어진 적. 이건 첫날 아침에 낸다.

한 장은 시장에서 옷을 고쳤다는 것, 단은 3센티라는 것, 손이 아는 것이 아직 많다는 것. 이건 일주일 뒤에 낸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과 먼저 알면 안 되는 것이 다름. 먼저 알면 그 사람들이 어머니를 보기 전에 어머니를 알게 됨.」

최영숙의 종이는 스물네 번째였다.

「수요일. 6시 35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흐림 / 새것 / 슬리퍼 / 손에 든 것: 없음.」

손잡이는 사흘째였다. 하람은 사흘이라고만 적고 앞의 열이틀과 잇지 않았다.

실 양은 흰 실이 조금 줄었고 검정은 그대로였다. 실패는 열한 개, 어제 나갔다가 돌아온 그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5. 열 줄

남극은 점심을 먹고 나서 헛돎 표를 폈다.

9월 11일에 보기로 한 날이었다. 정한 날이 오늘이라서 오늘 봤다.

오늘 것부터 적었다. 첫 토막에서 한 번, 3초쯤. 초 단위는 오늘도 못 적었다.

“9월 1일부터 오늘까지 며칠이야.”

“열하루요.”

“줄은 몇 개야.”

재혁이 위에서 아래로 세었다.

”…열 개입니다.”

“하나 모자라네.”

재혁이 손가락을 멈췄다. 9월 8일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청소일이라 그날은 한 토막도 안 팠다.

“이 줄이 없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안 판 거지. 그런데 표만 보면?”

“헛돌지 않은 날처럼 보입니다.”

재혁이 그 자리에 한 줄을 끼워 넣었다.

「9월 8일. 판 날 아님. 청소일. 9월 11일에 적어 넣음.」

세어 보니 판 날이 열흘, 그중 헛돈 날이 이레, 없던 날이 사흘, 헛돈 횟수가 여덟 번이었다.

“헛돈 날이 이렌데 횟수는 여덟이에요. 9월 1일에 한 토막에서 두 번 헛돌아서요.”

“그 두 번은 며칠이야.”

“하루요.”

“몇 토막이야.”

”…한 토막이요.”

재혁이 표를 다시 보았다. 헛돎은 토막에다 적었는데, 세기는 날로 세고 있었다.

“토막으로 세면 헛돈 토막이 일곱 개, 안 헛돈 토막이 열세 개입니다.”

“그러면 뭐랑 뭘 맞대야 해.”

“날 평균이 아니라 토막이요. 토막 길이도 토막마다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토막 스무 개를 두 무더기로 갈랐다. 헛돈 일곱 개의 평균이 2.951미터, 안 헛돈 열세 개의 평균이 2.957미터였다.

“0.006 차이입니다. 헛돈 쪽이 짧아요.”

“길이는 몇 단위로 적었어.”

재혁이 아침에 자기가 그은 가로줄을 보았다.

“0.01이요.”

“6밀리는 그 밑이야.”

”…또 눈금 밑이네요.”

“오늘 두 번째야.”

그것만이 아니었다. 헛돈 토막 일곱 개 중 다섯이 그날의 둘째 토막이었다.

“둘째 토막에 몰려 있습니다. 부스러기가 쌓인 뒤라서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러면 헛돌아서 짧아진 건지, 둘째 토막이라서 짧아진 건지 어떻게 갈라.”

”…못 갈라요. 둘이 같이 움직이니까요.”

“열흘 봤는데 못 지웠네.”

재혁은 잠깐 말이 없다가 야장을 끌어당겼다.

「열흘 봄. 후보 셋 중 하나도 못 지움. 못 지운 이유 둘: 차이가 눈금 밑임. 헛돎이 토막 순서와 같이 움직임.」

“그래도 오늘 고친 게 하나 있어.”

“뭡니까.”

“보는 법. 지우려고 했는데 못 지웠으면, 다음엔 어떻게 봐야 지울 수 있는지는 알게 된 거잖아.”

넷을 새로 정했다. 헛돎은 날이 아니라 토막마다 적고 토막 번호를 같이 적을 것. 초는 초시계로 재고 못 재면 「못 잼」이라고 적을 것. 다음에 보는 날은 9월 21일이고 그때까지는 좋아 보여도 안 볼 것. 맞대는 것은 길이 하나가 아니라 길이와 부스러기 입도 둘 다일 것.

재혁이 마지막 줄을 적다가 손을 멈췄다.

“아침에는 초로 안 적기로 했는데요.”

“응.”

“헛돎은 초로 적네요.”

“쓸 데가 다르잖아. 왕복 시간은 잘게 알아도 우리가 할 게 없어. 헛돎은 잘게 알면 셋 중에 하나를 지울 수 있고.”

부족분은 열두 점째였다. 마른 무게 15.25와 15.22, 합해서 30.47킬로그램. 계산치와의 차이가 0.73이었다.

쏠림 뺀 값은 플러스 0.02. 재혁은 그 옆에 자기 글씨로 짧게 적었다.

「안 봄. 둘째 날.」

입도는 아홉째 날이었다. 세 종을 24분에 끝냈다.

6. 벽 안

저녁에 열선 시공 신청 회신이 왔다.

은재가 소리 내어 읽었다.

“해당 회로는 준공 도면에 포함되어 있어 시공 완료로 처리되어 있음. 따라서 신규 시공이 아니라 하자 보수 사항임. 다만 하자 담보 기간 10년이 경과하여…”

“몇 해 됐죠.”

“열두 해요.”

“그러면 신규 공사로 다시 내라는 거고, 신규 공사는 예산 심의고, 예산 심의는요.”

“12월이요. 습도계랑 같은 달이네요.”

은재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도면에 있다고 되어 있으면 없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요.”

“재요.”

“없는 걸 재요?”

“없다는 걸 재는 방법이 있어요. 있는 걸 재는 것보다 조금 더 걸릴 뿐이에요.”

두 사람은 배선함을 열고 회로 번호를 확인한 다음, 그 자리 양 끝에 계측기를 대 봤다. 열선이 들어 있으면 몇 옴이 나오고, 아무것도 없으면 끝없이 나온다.

끝없이 나왔다. 은재가 그 화면과 회로 번호가 같이 나오게 사진을 찍었다.

「9월 11일. 열선 회로 도통 없음. 저항 무한대. 회로 번호와 함께 촬영. 도면에는 있음. 벽 안에는 없음. 둘 다 적음.」

“그런데 12월까지는 어떻게 해요.”

“매일 비워야죠. 사람 손으로요.”

“그러면 「우리가 한 것」 칸에 매일 12분이 들어가는데요. 값이 매일 흔들리잖아요.”

경옥이 가을 표를 손끝으로 짚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방법으로, 같은 만큼 흔들면 그건 어지르는 게 아니에요.”

”…미는 거요?”

“미는 거요. 미는 건 나중에 뺄 수 있어요. 아무 때나 흔들면 못 빼고요.”

강릉 회신도 같이 왔다. 넉 통을 받아 줄 수 있는데 −20도까지만 된다고 했다.

“−20이면 브리틀존은 못 보내요. 거긴 조금만 따뜻해도 안쪽이 달라져요.”

“그럼 얕은 데 것으로 넉 통 고르면 되잖아요.”

“고를 물건이 아직 없어요.”

은재가 잠깐 생각하더니 웃었다.

”…아직 얼음 속에 있죠.”

「강릉 넉 통. 조건: −20도. 브리틀존 제외. 어느 통을 보낼지는 3월에 정함. 지금 못 정함. 왜: 물건이 아직 얼음 속에 있음.」

수송팀은 오늘도 회신이 없었다. 「아직」 칸에 하루가 더 붙었다.

은재가 장갑을 벗으면서 물었다.

“오늘은 뭐 한 날이에요?”

“없는 걸 세 개 적은 날이요.”

“열선하고, 습도계하고, 3월 통이요?”

“아니요. 열선이 없다는 것, 강릉이 −30을 못 준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아직 못 고른다는 것이요.”

“그건 다 못 한 거잖아요.”

“못 한 거랑 없다고 적은 건 달라요.”

경옥이 벽에 붙은 종이들을 올려다봤다. 접수번호가 있는 것, 회신이 온 것, 아직인 것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없는 걸 적어 놓으면 그건 자리예요. 나중에 뭐가 오면 거기 들어가요. 안 적어 놓으면 와도 들어갈 데가 없어서 그냥 지나가요.”

그날 네 군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지우려고 했다.

남극에서는 후보 셋 중 하나를 지우려고 열흘을 모았고, 하나도 못 지웠다. 인천에서는 도면에 있다고 적힌 것을 지우려고 계측기를 댔고, 지우는 대신 옆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작업실에서는 겉면의 한 줄을 지우기로 했는데 이미 열린 봉투는 못 닫았다. 어머니의 집에서는 매일 하나씩 고르는 일이 나머지를 지우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추린다는 것은 결국 지우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 지워진 것은 거의 없었다.

대신 지우는 법이 하나씩 고쳐졌다. 눈금 밑은 안 읽기로 했고, 날이 아니라 토막으로 세기로 했고, 말로 막는 대신 자리로 막기로 했고, 고르는 사람을 나에게서 종이로 옮기기로 했다.

지우지 못한 날에도 남는 것이 있었다.

무엇을 못 지웠는지, 그리고 왜 못 지웠는지.

그 두 줄은 다음번에 지울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하지 않아도 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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