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31화 - 쏠림

제31화 「쏠림」

1. 592미터

월요일 아침의 시추동은 하루 쉰 티가 났다. 크래들이 비어 있었고 작업대 위에 아무것도 안 놓여 있었다.

재혁이 코어 배럴을 다시 달았다. 어제 떼어 놓은 자리에 그대로 들어갔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스무날째 같은 숫자였다.

586에서 589, 589에서 592. 두 토막이었다.

토막 길이를 쟀다. 2.95미터와 2.96미터. 아홉째 날 값이었다.

케이블 눈금은 54.00미터를 가리켰다. 코어 길이를 다 더한 누계는 53.17미터였다. 차이는 0.83미터.

“오늘 벌어진 건 0.09요.”

재혁이 야장의 새 칸에 적었다. 아홉 점이 한 줄로 늘어섰다. 0.06, 0.09, 0.08, 0.11, 0.10, 0.08, 0.10, 0.12, 0.09.

“가운데는 그대로 0.09예요. 그런데 흩어짐이…….”

재혁이 계산을 두 번 했다. 각 점이 가운데에서 떨어진 거리를 다 더하니 0.12였고, 아홉으로 나누니 0.013이었다.

“줄었어요.”

“폭은?”

“폭은 그대로예요. 제일 작은 게 0.06, 제일 큰 게 0.12. 0.06 그대로요.”

“그럼 됐어.”

서진이 장갑을 벗지 않은 채로 야장을 들여다봤다.

“폭은 안 줄어. 이틀 전에 그래서 자를 바꾼 거야. 좁아질 수 있는 자로.”

“그럼 이제 세 값이니까 선을 그어도 돼요? 0.013, 0.015, 0.013요.”

“그 셋은 다른 물건이야.”

서진이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첫 번째는 일곱 점짜리 흩어짐이고, 두 번째는 여덟 점, 오늘 건 아홉 점짜리야. 점이 적으면 흩어짐은 작게 나오는 버릇이 있어. 자가 매번 조금씩 다른 자야.”

“그럼 이것도 못 맞대요?”

“맞댈 수는 있어. 옆에 점 수를 적어 놓고.”

재혁이 세 값 옆에 각각 7, 8, 9를 적었다.

사진은 오늘부터 규칙대로 찍었다. 자를 끊긴 면에 붙여 같은 높이로 놓고, 카메라 축을 코어 축에 맞추고, 크래들에 표시해 둔 자리에서, 왼쪽 등 하나만 켜고.

찍은 것은 한 짝이었다. 586-589 토막의 아래쪽 끝과 589-592 토막의 위쪽 끝. 두 장이지만 한 자리였다.

위쪽 끝이 4밀리, 아래쪽 끝이 7밀리. 합해서 11밀리.

“어제 것하고 맞댈 수 있어?”

“못 맞대요.”

재혁이 바로 대답했다.

“어제 건 규칙 정하기 전 거니까요. 오늘부터 한 점이에요.”

야장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사진 한 점이 0.3밀리쯤이니, 그보다 작은 차이는 「같음」이 아니라 「못 가름」이라고 적을 것.

 

2. 전실

342일째. 절단까지 23일. 이호기 한 대로만 돌린 지 열나흘째였고, 방은 영하 30.0도였다.

은재가 벽의 열째 장에 열한째 줄을 채웠다. 어제 날짜였다.

쌓은 시간 13시간 30분. 이틀째 올라갔다. 바깥 온도 26.1도. 문 0회. 반출입 없음. 습도 「안 잼」. 옆에 연필로 관측소 84퍼센트.

일곱째 칸에는 「없음」이라고 적었다. 어제 이 방에서 사람이 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여덟째 칸에는 「6시간」. 열한 줄이 전부 「6시간」이었다.

“앞판은 안 열었으니까 판정도 없는 거죠?”

“없어요. 열었을 때 6밀리를 넘으면, 이라고 적어 놨으니까요.”

경옥이 서류철을 폈다. 맨 앞에 습도계 신청서가 끼워져 있었고, 그 위에 「9월 9일 월요일 아침에 냄」이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오늘이에요.”

경옥이 설치 장소 칸에서 멈췄다. 칸이 둘이었다. 실내, 실외.

“전실은 어느 쪽이에요?”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뭘 골라요?”

“고르면 안 돼요.”

경옥이 여백으로 펜을 옮겼다.

“칸이 둘뿐이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돼요. 고르면 틀린 게 적히는 게 아니라 다른 게 적혀요. 저기 달아 놓고 방 값이라고 읽으면 아무도 못 알아채요.”

여백에 적었다. 「전실. 실내도 실외도 아님. 서식에 칸이 없어서 여기에 적음.」

기종 칸에서 또 걸렸다. 은재가 습도계라고 쓰려다 손을 멈췄다.

“영하 30도에서는 습도계가 필요 없어요.”

“왜요?”

“찬 공기는 물을 못 들고 있어요. 그래서 이 방 상대습도는 늘 백에 가까워요. 백이라고 나온다고 물이 많은 게 아니에요. 들 수 있는 만큼 다 들고 있다는 뜻이지 몇 그램인지는 안 알려 줘요.”

“그러네요.”

“게다가 정전용량으로 재는 건 여기서 얼어붙어요. 얼면 계속 백이라고 말해요.”

경옥이 기종 칸에 「노점계」라고 썼다. 이슬점을 재는 것.

“이슬점은 온도가 변해도 안 변해요. 공기 안에 물이 몇 그램인지를 온도로 바꿔 말한 값이니까요.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문 열 때 들어온 공기 안에 물이 얼마나 있었나잖아요.”

이유 칸이 남았다. 은재가 「현재 습도를 알 수 없음」이라고 쓰자 경옥이 그었다.

“그렇게 쓰면 안 재고 있다는 말이 돼요. 우리는 안 재고 있는 걸 적고 있었어요. 그건 다른 말이에요.”

경옥이 다시 썼다. 「9월 6일부터 열한 줄에 걸쳐 습도 칸에 「안 잼」이라고 적어 왔음. 관측소 값을 연필로 병기하고 있으나 8킬로 떨어진 실외 값임.」

가을 표 사본을 별지로 붙였다.

“이거 열흘 안 적었으면 못 냈겠네요.”

“냈어요.”

경옥이 서류철을 닫았다.

“근데 다른 종이가 됐을 거예요. 없는 걸 달라고 하면 안 줘요. 없다는 걸 적어 놓은 걸 보여 주면 줘요.”

 

3. 앞에서 팔 분

넷째 릴은 앞으로 감긴 채 통에 들어 있었다. 층 옆면이 톱니처럼 들쭉날쭉했다.

정한은 그 릴을 걸기 전에 종이부터 폈다. 다섯째 장이었다.

「이 릴은 누가 한 번 들었음. 언제, 누가, 무엇을 했는지 모름.」

어제 적어 놓은 줄이었다. 오늘은 그 밑에 무엇을 적을지가 문제였다.

정한은 릴을 한 번 통과시키면서 세 군데의 잡음을 떴다. 앞쪽 3분 자리, 가운데 20분 자리, 끝 38분 자리. 소리가 없는 구간, 테이프가 그냥 지나가는 쉬— 소리만 있는 자리였다.

그 소리 안에 든 높은 쪽을 재니 값이 갈렸다. 가운데가 마이너스 0.5, 끝이 마이너스 0.4, 앞이 마이너스 2.6이었다.

앞에서 8분쯤까지만 높은 쪽이 죽어 있었다.

한 번 재생할 때마다 헤드는 조금씩 자석이 된다. 자석이 된 헤드는 지나가는 테이프의 높은 쪽을 조금씩 지운다. 물러진 테이프는 지나갈 때마다 가루도 조금 흘린다.

그러니까 앞 8분만 더 죽어 있다는 건, 누가 앞 8분만 듣고 껐다는 말이 된다.

정한은 그 문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반대쪽을 세어 봤다. 릴의 앞부분은 감김 바깥쪽이라 옆 층에 눌리는 힘이 다르다. 1983년에 녹음할 때 그 데크의 헤드가 그날 이미 자화돼 있었을 수도 있다. 앞 8분만 다른 날 녹음했을 수도 있다.

자국은 하나인데 그 자국을 만들 수 있는 손이 넷이었다.

정한이 짐작 칸에 적었다.

「짐작. 앞 8분만 높은 쪽이 낮음. 근거: 재생으로 깎였을 수 있음. 반대 근거: 감김 자리, 녹음 순서, 그날 헤드 상태로도 같게 나올 수 있음. 못 가름.」

오후에 의뢰인이 전화를 했다. 정한이 먼저 물었다.

“아버님 말고 이 릴을 들어 본 분이 있습니까.”

“모릅니다. …형이 한 번 가져갔던 것 같기도 하고요.”

“「같기도 하고」로 적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같기도 함」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로는 못 적습니다. 두 개는 다른 칸입니다.”

수화기 저쪽이 잠깐 조용했다.

”…그렇게 적어 주십시오.”

정한이 「물어본 것」 줄에 옮겼다. 「9월 9일. 다른 사람이 들었는지 물음. 답: 모름. 형이 가져갔던 것 같기도 하다고 함. 「같기도 함」으로 적음.」

저녁에 30분을 켰다. 아흐레째였다. 지워진 세 글자는 오늘도 세 글자였다.

「9월 9일. 30분. 새로 읽은 것 없음.」

내일이 열흘째였다.

 

4. 도로 안 넣음

월요일 저녁, 서른한째 방문이었다.

하람이 종이 다섯 조각을 접어 컵에 넣고 하나를 뽑았다. 「바늘」이었다.

어제도 바늘이었다.

하람은 컵을 내려다보고 한참 있었다. 어제 뽑은 조각을 도로 넣었기 때문이었다. 도로 넣으면 매일 같은 게 나올 수도 있고, 열흘 동안 한 번도 안 나오는 줄이 생길 수도 있었다.

빼 두면 다섯 날에 한 바퀴가 돈다. 대신 마지막 날은 안 뽑아도 정해진다. 그건 뽑은 게 아니었다.

하람은 규칙을 바꾸기로 했다. 다섯을 다 쓸 때까지 도로 안 넣고, 다 쓰면 다섯을 다시 넣는다.

그리고 오늘 뽑힌 것은 안 바꿨다.

「9월 9일. 바늘 또 나옴. 도로 넣고 뽑아서임. 내일부터 다섯을 다 쓸 때까지 도로 안 넣음. 오늘 것은 안 바꿈. 값을 보고 바꾸면 안 되니까.」

밑에 「뽑은 것」 줄을 새로 그었다. 날짜별로 뭐가 뽑혔는지를 적어야 나중에 골고루였는지를 셀 수 있었다.

오늘 순서는 실 양부터였다.

실 양 열하루째. 흰 실 그대로, 검정 그대로.

실패 열한 개. 자리 같음. 색 같음. 감긴 양 같음.

바늘 차례에서 하람이 반짇고리를 열었다. 갑 안쪽 스펀지에 자국 다섯, 꽂힌 것 셋. 핀쿠션에 하나. 넷이었다.

어제와 같았다. 14호는 없었다.

하람이 못 찾음 칸에 이틀째를 적으려는데 미강이 미싱 쪽에서 말했다.

“청바지는 14호로 박아야 돼. 얇은 거로 박으면 바늘 부러져.”

하람이 고개를 들었다. 미싱 바늘대에 굵은 바늘이 하나 끼워져 있었다. 어제까지는 비어 있던 자리였다.

“어머니, 이거 언제 끼우셨어요.”

“오늘 아침에. 네 청바지 단 박으려고.”

하람은 한동안 손이 멈춘 채로 있었다.

없어진 게 아니었다. 어제 못 찾음 칸에 적은 것이 맞았다. 없어진 칸에 적었으면 오늘 그 줄을 지워야 했다.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9월 9일. 14호 나옴. 미싱 바늘대에 끼워져 있었음. 없어진 게 아니라 쓰고 있었음.」

한 줄을 더 적었다.

「우리가 안 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안 세는 자리에 있었던 것임.」

그동안 하람이 세던 자리는 둘이었다. 갑과 핀쿠션. 미싱에 끼워진 것과 박던 천에 꽂힌 것은 한 번도 세지 않았다.

세는 자리를 종이에 적었다. 갑, 핀쿠션, 미싱 바늘대, 박던 천. 넷.

앞의 나흘치 「다섯 개」에는 별표를 붙였다. 「이 나흘은 미싱을 안 셈. 값은 안 고침.」

미강이 바늘대를 손끝으로 만졌다.

“바늘 부러지면 그날은 손해야. 갈 데가 멀어서.”

“어디까지 가셨는데요.”

“큰길 건너. 재봉 재료 하는 데. 왔다 갔다 하면 한 시간이야. 그 사이에 손님 오면 그냥 가.”

하람이 그대로 적었다. 줄이지 않고, 말한 대로 적었다.

그러다 앞장을 넘겼다. 첫 장에 1984년 제일시장 참기름집 이야기가 있었다. 아저씨 왼쪽 다리, 연탄 두 장.

오늘 미강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연탄을 석 장이라고 했다.

하람은 첫 장을 고치지 않았다. 오늘 것을 밑에 날짜를 적어 나란히 놓았다.

자주 꺼낸 것이 남는다고 했지, 그대로 남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꺼낼 때마다 다시 넣어지고, 다시 넣어질 때마다 조금씩 고쳐진다. 제일 또렷한 것이 제일 많이 고쳐진 것일 수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모름. 둘 다 둠.」

최영숙 종이 22차. 「월요일. 6시 4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갬 / 새것 / 슬리퍼 / 손에 든 것: 없음.」

「손에 든 것」 칸에 처음으로 값이 들어간 날이었다.

「9월 8일은 안 잡으셨음. 우산 드셨음. 9월 9일은 잡으셨음. 열이틀, 하루 빠짐, 하루. 이어서 세지 말 것.」

 

5. 열 점

오후에 부스러기 통을 열었다.

젖은 무게를 재고, 체에 받쳐 항량이 될 때까지 두고, 마른 무게를 읽었다. 15.23과 15.25. 합해서 30.48킬로그램.

두 토막이면 계산치는 31.2였다. 부족분은 0.72.

재혁이 야장에 열 번째 점을 찍었다.

0.65, 0.71, 0.70, 0.74, 0.69, 0.72, 0.70, 0.73, 0.71, 0.72.

“열 점 다 마이너스예요.”

“세어 봐.”

“동전 열 번 던져서 열 번 다 앞면 나오는 거요. 천에 한 번쯤이에요.”

“그럼 뭐야.”

“오차가 아니에요.”

재혁이 펜을 놓았다.

“오차면 위아래로 흩어져야 하잖아요. 이건 열 번 다 한쪽으로만 갔어요. 어지르는 게 아니라 미는 거예요.”

“이름은?”

“쏠림요.”

서진이 열 점의 평균을 냈다. 0.71이었다.

“빼 봐.”

재혁이 각 점에서 0.71을 뺐다. 마이너스 0.06, 0, 마이너스 0.01, 플러스 0.03, 마이너스 0.02, 플러스 0.01, 마이너스 0.01, 플러스 0.02, 0, 플러스 0.01.

“섞여요.”

“그게 오차야. 쏠림을 빼고 나면 그 밑에 오차가 있어.”

재혁이 그 줄을 야장에 옮기려다 멈췄다.

“원래 값을 고칠까요?”

“고치지 마.”

“그럼 어디다 적어요?”

“칸을 만들어. 바꾸기 전에.”

재혁이 계산치 칸 옆에 세로줄을 하나 더 그었다. 「쏠림 뺀 값」. 그리고 그 칸 머리에 「쏠림 0.71. 열 점 평균. 9월 9일에 정함.」이라고 적었다.

“이제 어디로 갔는지만 찾으면 되겠네요.”

“넷 있어.”

서진이 손가락을 폈다. 통 밖으로 새는 것, 구멍 벽에 붙는 것, 바닥에 가라앉는 것.

“넷째는요?”

“우리가 뺀 수가 틀린 것.”

서진이 야장을 손등으로 짚었다.

“부족분은 잰 값이 아니야. 계산치에서 잰 값을 뺀 거야. 계산치가 크면 부족분은 매일 생겨. 열 번이든 백 번이든.”

“계산치는 구멍이 13.1센티라는 걸로 낸 거잖아요.”

“설계값이야.”

서진이 야장 여백에 숫자를 적었다.

“구멍이 그것보다 0.6밀리만 작으면 열 점의 쏠림이 통째로 없어져. 0.6밀리야.”

“재면 되잖아요.”

“캘리퍼 검층 장비가 없어. 우리는 구멍 지름을 못 재. 8월에도 「모름」이라고 적었어.”

재혁이 열 점을 다시 봤다.

“그럼 점을 더 찍어도 소용없어요?”

“소용은 있어. 쏠림이 0.71인 걸 더 정확히 알게 돼.”

서진이 야장을 덮지 않고 그대로 뒀다.

“우연은 많이 재면 줄어. 쏠림은 많이 재면 또렷해지기만 해. 안 줄어.”

“그럼 어떻게 해요.”

“다른 종류로 재야지. 같은 걸 백 번 재는 게 아니라.”

오늘은 서진이 한 토막, 재혁이 한 토막을 각각 쟀다. 15.23과 15.25. 사람을 바꿔도 값이 안 흔들렸다.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이 아닌 걸 하나 지운 거야. 목록이 짧아진 거지 맞은 건 아니야.”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열 점은 전부 8월 30일에 갈아 끼운 커터로 판 것이었다. 열흘 동안 한 벌이었다.

“그럼 이거 열 번이 아닐 수도 있어요.”

“왜.”

“어제 훑어 올린 게 오늘 통에 섞인다고 하셨잖아요. 어제 못 담은 게 오늘 것에 있으면, 어제하고 오늘은 남남이 아니에요. 남남이 아니면 천에 하나가 아니에요.”

서진이 재혁을 봤다.

“한 번을 열 번 본 걸 수도 있다는 거지.”

“네.”

“그럼 그것도 적어.”

재혁이 열 점 옆에 적었다.

「열 점이 다 같은 쪽임. 우연이면 천에 하나. 다만 열 점이 서로 남남인지는 모름. 남남이 아니면 천에 하나가 아님. 커터도 열흘 동안 한 벌이었음.」

밑에 한 줄을 더 붙였다.

「다음 커터로 바꾼 뒤 열 점을 따로 셈. 두 벌이 다 같은 쪽이면 커터 탓이 아니라고 적는다. 9월 9일에 정함.」

 

6. 예비

저녁에 답장 세 통이 한꺼번에 왔다.

다른 연구동은 안 된다고 했다. 자기네 절단 일정이 겹쳤다. 위탁 인력도 안 된다고 했다. 영하 30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수송팀만 10월 초에 다시 보자고 했다.

은재가 종이를 들여다봤다.

“두 개는 없어졌네요.”

“아니에요. 두 개는 「아직」에서 「안 됨」으로 바뀐 거예요.”

경옥이 기다린 날 칸을 폈다.

「9월 7일부터 셋. 9월 9일에 둘은 「안 됨」. 기다린 날에서 뺌. 남은 한 군데만 「아직」임.」

“안 된다는 게 나쁜 대답 아니에요?”

“제일 빠른 대답이에요. 안 된다고 해 주면 그 자리는 안 세도 돼요. 대답을 안 주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계속 세야 돼요.”

경옥이 옆의 다른 서류철을 꺼냈다. 3월에 올 시료 중 아직 자리를 못 정한 넉 통이 거기 있었다. 그 넉 통을 맡아 주기로 얘기가 오가던 곳이 오늘 안 된다고 한 그 연구동이었다.

“한 군데였네요.”

“한 군데였어요.”

경옥이 두 서류철을 나란히 놓았다.

“한 군데에 두 가지를 걸어 놨으면, 한 번 거절당할 때 두 개가 없어져요. 그러면 그건 두 개가 아니었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물어보는 자리를 나눠요. 같은 데 두 개 걸지 말고요.”

10월 10일까지 셋 다 안 되면 작업일을 옮긴다는 줄은 그대로 뒀다. 오늘 정한 게 아니라 이틀 전에 정한 것이었다.

은재가 냉동기 계기를 봤다. 이호기 혼자 열나흘째였고, 값은 흔들리지 않았다.

“잘 돌아가는데요.”

“일호기는요?”

“안 돌린 지 열나흘이요.”

“그럼 일호기가 도는지는 열나흘 동안 아무도 몰라요.”

경옥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고장이 안 났다고 예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예비는 고장 나 봐야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요.”

“그럼 한번 돌려 봐요?”

“돌려 보면 방이 데워져요.”

어제도 그제도 나온 말이었다. 보는 데에는 값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 날에나 하면 안 돼요. 미리 정해요.”

경옥이 종이에 적었다.

「10월 절단 전에 한 번. 반출입 없는 날. 이호기 세우고 일호기 30분. 방 온도가 영하 29.0을 넘으면 즉시 되돌리고 그날 값은 「우리가 한 것」 칸에 적는다. 30분 동안 이상 없으면 예비 있음으로 적는다. 9월 9일에 정함.」

“이상이 있으면요?”

“그때 알게 돼서 다행인 거예요. 열흘 뒤에 이호기가 서고 나서 알면, 그건 아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거예요.”

은재가 종이를 서류철에 끼웠다. 습도계 신청서 뒤였다.

“오늘 두 개나 정했네요.”

“둘 다 안 한 일이에요.”

경옥이 불을 하나 껐다.

“일호기는 안 돌렸고, 노점계는 아직 없어요. 오늘 우리가 한 건 언제 할지를 적어 놓은 것뿐이에요.”

“그것도 한 거예요?”

“그것만 미리 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그날 가서 해야 하고요.”

 

열 번을 재서 열 번 다 같은 쪽으로 어긋났다면, 그것은 열 번 틀린 것이 아니라 한 번 기울어 있는 것이다. 오차는 어지르고 쏠림은 민다. 어지른 것은 여러 번 재면 가운데로 모이고, 미는 것은 여러 번 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래서 더 많이 재는 일이 늘 답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다른 종류로 한 번 재야 한다.

같은 크기의 어긋남을 만들 수 있는 이유가 넷이면, 값을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넷 중 어느 것인지는 안 갈린다. 그때 지울 수 있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이름이다. 「없어진 얼음」을 「모르는 0.6밀리」로 바꿔 적는 일. 그것도 하는 일이다.

열 번이 열 번이 되려면 열 번이 서로 남남이어야 한다. 어제 남긴 것이 오늘 것에 섞여 있으면, 그 열 번은 한 번을 열 번 본 것이다. 같은 자리에 두 가지를 걸어 놓으면 그 둘은 두 개가 아니다.

세는 자리를 정하지 않고 세면, 없는 것과 안 세는 것이 종이 위에서 똑같이 생긴다. 바늘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세는 자리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주 꺼낸 것이 남는다. 다만 그대로 남지는 않는다. 꺼낼 때마다 다시 넣어지고, 다시 넣어질 때마다 조금씩 고쳐진다. 제일 또렷한 것이 제일 많이 고쳐진 것일 수 있다. 그러니 고치지 말고 나란히 둔다.

예비는 고장 나 봐야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 그것을 미리 알아 두는 데에도 값이 든다.

오늘 정한 것은 둘 다 안 한 일이었다. 언제 할지만 적어 두었다.

그것만 미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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