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32화 - 멈춤

제32화 「멈춤」
1. 598미터
화요일 아침 여덟 시에 첫 토막이 올라왔다.
592에서 595, 595에서 598. 두 토막이었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스물하루째 같은 숫자였다.
재혁이 토막 길이를 쟀다. 2.96미터와 2.95미터. 열째 날 값이었다.
케이블 눈금은 60.00미터를 가리켰다. 코어 길이를 다 더한 누계는 59.08미터. 차이는 0.92미터였다.
“오늘 벌어진 건 0.09입니다. 어제하고 같아요.”
“가운데는.”
“열 점 다 더하면 0.92니까 0.092. 반올림하면 0.09요. 그대로입니다.”
“흩어짐은.”
재혁이 한 칸씩 손끝으로 짚어 가며 열 개의 거리를 더했다.
“0.012요. 어제가 0.013이었으니까 또 줄었습니다.”
서진이 숫자 옆에 작게 적힌 것을 보았다. 0.013 옆에 7, 0.015 옆에 8, 0.013 옆에 9, 오늘 것 옆에 10.
“점 수를 적어 놓으니까 이게 보이네.”
“어제 하신 말씀이 걸려서요. 점이 적으면 흩어짐이 작게 나오는 버릇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 버릇대로면 점이 늘 때 커져야 하는데, 커지기는커녕 줄었습니다.”
“그러면 뭘 말할 수 있어.”
재혁이 잠깐 생각했다.
“버릇 때문에 줄어든 건 아니라는 것까지요.”
“그것까지야.”
“진짜로 줄었다는 건 아직 못 하고요.”
“응. 그런데 그 두 개는 다른 말이야. 하나는 오늘 적을 수 있고 하나는 오늘 못 적어.”
토막 끝 사진은 규칙대로 찍었다. 자는 끊긴 면과 같은 평면에, 카메라 축은 코어 축에, 거리는 크래들 표시에, 조명은 왼쪽 한 방향.
592-595의 아래끝이 5밀리, 595-598의 위끝이 5밀리였다. 한 자리, 합 10밀리.
“어제는 11이었습니다. 짝 표기 둘째 날이니까 이제 두 점이에요.”
“두 점으로 뭐 할 거야.”
”…아무것도 못 합니다. 작아졌다는 것만 되고, 그건 아직 아무 말도 아니고요.”
서진이 야장을 넘겨 벌어짐 칸을 폈다.
“그것 말고 오늘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어. 두 개를 나란히 놔 봐. 오늘 벌어진 게 0.09미터야. 몇 밀리지.”
“90밀리요.”
“사진에서 잰 손실이 몇 밀리야.”
“10밀리요.”
재혁이 두 숫자를 야장에 위아래로 적었다. 한참을 보았다.
“9분의 1도 안 됩니다.”
“그러면 토막 끝 손실은 벌어짐의 원인이 될 수는 있는데, 원인 전부는 아닌 거야.”
”…남은 게 여든 밀리네요.”
“그리고 그 10밀리도 하한이야. 우리가 잰 건 인양된 두 토막 사이 자리뿐이잖아. 드릴 안에서 부서져 나간 건 사진에 안 찍혀.”
재혁이 옆 칸에 적었다. 「토막 끝 손실은 벌어짐의 일부만 설명함. 잰 값은 눈에 보이는 자리만의 값이라 하한임. 9월 10일.」
2. 열두째 줄
343일째였다. 첫 절단까지 22일.
은재가 가을 표 열두째 줄을 채웠다. 9월 9일 치였다.
쌓은 시간 13시간 20분, 바깥 26.4도, 문 1회, 반출입 없음, 습도는 「안 잼」이고 괄호 안에 관측소 값 81퍼센트와 「우리 값 아님」. 여덟째 칸에는 6시간.
일곱째 칸에서 은재의 손이 멎었다.
“어제 습도계 신청서 냈잖아요. 이거 「우리가 한 것」 칸에 적어요?”
경옥이 표를 들여다보았다.
“거기 적으면 안 돼요.”
“왜요? 우리가 한 건데요.”
“이 칸은 다 적는 칸이 아니에요. 이 값을 흔들 수 있는 것만 적는 칸이에요.”
“신청서는 방을 안 건드리니까요.”
“그렇죠. 다 적어 놓으면, 나중에 어느 줄이 왜 튀었는지 찾을 때 못 찾아요. 흔든 게 스무 개면 그중에 뭐가 흔들었는지 모르니까요.”
은재가 그 줄을 비우고 노트 뒤쪽 이력 줄에 따로 적었다. 「9월 9일. 노점계 신청서 제출. 방에 한 일 아님.」
접수 회신은 아침에 와 있었다. 접수번호가 있고, 심의는 12월, 예산이 배정되면 3월 이후 집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3월 인수 때는 없네요.”
“없어요.”
“그럼 그때까지 습도는 계속 「안 잼」이에요?”
경옥이 커피를 든 채 잠깐 서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같은 걸 짐작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재는 거예요.”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제상수요. 제상할 때 코일에서 녹아 나가는 물.”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 물이 다 어디서 온 거예요?”
“방에 들어온 물이에요. 문 열 때 들어오고, 우리가 들고 들어가고, 우리 숨에서 나오고. 그게 코일에 붙어서 성에가 된 거고, 제상하면 녹아서 나가요. 그걸 통에 받아 무게를 재면 여섯 시간 동안 이 방에 들어온 물이 몇 그램인지가 나와요.”
경옥이 종이에 두 줄을 그었다.
“습도계는 지금 이 순간을 알려 줘요. 제상수는 지난 여섯 시간을 다 더한 걸 알려 주고요. 둘은 다른 물건이에요. 나중에 노점계가 와도 이 값하고 한 그래프에 못 그려요.”
“그럼 왜 재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게 착상이잖아요. 착상은 지금 습도가 아니라 여섯 시간 동안 들어온 물이 만들어요. 어쩌면 이게 더 맞는 자예요.”
은재가 서식 아래에 새 칸을 하나 그었다. 「대신 잰 것 — 무엇 대신인지, 왜 대신인지.」 여덟 번째였다.
첫 회차는 오후 제상에 맞춰 하기로 했다.
3. 열흘째
마감으로부터 열흘 뒤였다. 오후 3시 40분, 정한은 저각도 조명을 켜고 릴 케이스 옆면을 폈다.
30분 동안 새로 읽은 것은 없었다. 열흘 연속 「없음」이었다.
정한은 조명을 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적기 전에 잠깐 앉아 있었다.
이틀 전에 적어 둔 문장이 노트에 그대로 있었다. 「열흘째까지 새로 읽은 것이 없으면 매일 30분을 그만두고 열흘에 한 번 30분으로 바꾼다. 9월 8일에 정함.」
오늘 그만두기가 싫었다. 왼쪽에서 60도로만 대던 빛을 오른쪽에서 한 번 대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있었다.
정한은 그 생각이 언제 생겼는지를 따져 보았다. 9월 8일에는 없었다. 오늘 값을 보고 생겼다.
그러면 그건 규칙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트에 적었다. 「9월 10일부터 열흘에 한 번 30분. 안 보는 것 아님. 덜 보는 것임.」
한 줄을 더 붙였다. 「오늘 오른쪽 조명 생각이 났음. 8일에는 없던 생각임. 값을 보고 난 뒤에 난 생각이므로 오늘은 안 함. 다음 열흘째에 함.」
그리고 재개 조건 셋을 그 밑에 적었다.
하나, 2027년 3월의 압흔 재촬영.
둘, 대구의 동규가 다른 조명 장비를 구하면 그때.
셋은 오래 걸렸다.
케이스 오른쪽 끝은 뒷면이 접혀 붙어 있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붙어 있었고, 그 밑에 글자가 몇 자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종이는 습기를 서서히 먹이면 떨어진다. 상자에 물을 함께 넣어 며칠 천천히 부풀리면 굳은 풀이 물러져 열린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정한은 그 방법을 적고 그 밑에 이유를 적었다.
「하지 않음. 습기를 먹으면 종이 섬유가 부푼다. 부풀면 눌린 자국이 펴진다. 여는 데는 성공하고 읽을 것이 없어질 수 있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음.」
한 줄 더.
「여는 것과 읽는 것이 서로를 없앤다. 지금은 안 열어 두는 쪽이 더 많이 남기는 쪽임.」
마지막에 「안 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안 하기로 한 것임」이라고 적었다.
넷째 본은 오전에 다 옮겼다. 96킬로헤르츠 24비트, 맨 앞에 기준음 30초, 체크섬 두 벌.
의뢰인에게 보낼 봉투도 쌌다. 겉에 적었다. 「이 안은 판독이 아닙니다. 안 열어도 됩니다.」
한 줄을 더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여시면 이 짐작이 나중에 기억이 됩니다.」
저녁에 의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국 몇 자냐고 물었다.
“종이에 있습니다.”
“몇 자인지만 말씀해 주시면 되는데요.”
“말로는 안 합니다. 종이는 세 칸으로 갈라 놨습니다. 판독한 것, 짐작한 것, 못 본 것. 세 칸을 같이 보셔야 합니다.”
”…번거롭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지난번에 말로 했다가 사흘 만에 다른 게 됐습니다. 제 입에서 나가면 저는 못 고칩니다.”
4. 넷 중 하나
화요일 아침이었다. 서른두째였다.
수첩 순서는 다섯째 날이었다. 실패, 바늘, 또렷하셨던 것, 최영숙, 실 양.
제비는 어제 뽑은 「바늘」을 도로 안 넣었으니 넷이었다. 하람은 종이 넷을 접어 섞고 하나를 폈다.
최영숙이었다.
하람은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오늘 길게 적어야 할 줄인데, 그 줄은 하람이 적는 줄이 아니었다. 아래층 최영숙이 적어 건네주는 종이였다.
바꾸고 싶었다. 다시 뽑고 싶었다.
수첩을 폈다가 어제 자기가 적어 놓은 문장을 봤다. 「규칙은 내일부터. 오늘 뽑힌 것은 안 바꿈. 값을 보고 바꾸면 안 되니까.」
하람은 다시 안 뽑았다. 대신 그 줄 밑에 적었다.
「뽑혔음. 그런데 내가 길게 적을 수 있는 줄이 아님. 남이 적는 줄임.」
그리고 한참 뒤에 한 줄이 더 나왔다.
「그 줄에서 내가 길게 적을 수 있는 건 최영숙 씨가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뭘 부탁했는지다. 그건 내가 한 일이니까 내가 적을 수 있다.」
부탁한 것을 순서대로 다 적었다. 시각과 문 두드림, 계단 참, 손잡이, 날씨, 슬리퍼, 손에 든 것. 언제부터 부탁했는지, 왜 그 항목을 넣었는지.
적고 나니 여섯 중 다섯은 하람이 처음부터 부탁한 것이었고, 하나는 최영숙이 스스로 덧붙여서 생긴 칸이었다.
실패는 열한 개였다. 자리도 색도 감긴 양도 어제와 같았다.
바늘은 다섯 개였다. 갑에 셋, 핀쿠션에 하나, 미싱 바늘대에 열넷째가 하나.
어제 정한 대로 네 자리를 세었다. 갑, 핀쿠션, 미싱 바늘대, 박던 천.
하람은 다섯을 적고 옆에 굵은 가로줄을 그었다.
「9월 10일부터 네 자리를 셈. 앞의 값과 잇지 말 것. 어제 다섯과 오늘 다섯은 같은 다섯이 아님.」
또렷하셨던 것은 어머니가 먼저 꺼냈다. 미싱 앞에 앉아 실을 바늘귀에 넣으려다가 두 번 놓치고 나서였다.
“비 오는 날은 실이 잘 안 들어가.”
“왜요.”
“부어. 실이 물을 먹으면 부어서 귀에 안 들어가. 그런 날은 실을 손으로 한번 훑고 침을 안 발라야 돼. 침 바르면 더 부어.”
하람은 그대로 적었다. 요약하지 않고 말한 그대로.
어제 어머니는 연탄을 석 장이라고 했다. 수첩 첫 장에는 두 장이라고 적혀 있다. 오늘은 그걸 안 물었다. 물으면 또 한 번 꺼내는 것이 되고, 꺼내면 다시 넣어지고, 다시 넣어지면 또 조금 고쳐진다.
우편함에 보건소 봉투가 와 있었다. 건강진단서였다. 결핵 검사 이상 없음. 9월 15일 첫 방문은 그대로였다.
종이를 두 번 읽고 하람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한 장에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가 하나도 안 적혀 있었다. 남한테 옮길 것이 없다는 것만 적혀 있었다.
집에 와서 A4 한 장을 새로 썼다. 봄에 장기요양 조사에 냈던 「오전의 어머니」와 제목은 같은데 안은 달랐다.
그때는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과 도와드리면 되는 것을 적었다. 그건 하람이 아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하람이 없는 자리에서 쓸 종이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라고 맨 위에 적고, 그 밑에 열두 줄을 썼다. 신발을 두세 번 고쳐 신으시면 낯선 자리라는 뜻입니다. 실이나 천을 드리면 손이 먼저 압니다. 이름을 두 번 다르게 대답하셔도 고쳐 드리지 마시고 그냥 적어만 주십시오.
최영숙의 종이는 스물세 번째였다.
「화요일. 6시 2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갬 / 새것 / 슬리퍼 / 손에 든 것: 실패 하나.」
하람은 실패라는 글자에서 멈췄다.
저녁에 다시 세었다. 열한 개였다. 자리도 같았다.
「나갔다가 돌아온 것은 안 나간 것과 다르다. 그런데 세는 것으로는 같게 나온다. 개수만 적으면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이 된다.」
손잡이는 어제 잡으셨고 오늘도 잡으셨다. 「이틀.」이라고만 적었다. 그 앞의 열이틀에는 잇지 않았다.
5. 쏠림 뺀 값
오후에 부스러기를 계량했다. 항량 기준대로 받쳤고, 오늘은 서진이 한 토막, 재혁이 한 토막을 각각 쟀다.
마른 무게 15.24킬로그램과 15.26킬로그램. 합 30.50이었다. 계산치는 31.2.
“부족분 0.70입니다. 열한 점째요.”
재혁이 어제 그은 새 칸을 폈다. 칸 머리에 「쏠림 0.71. 열 점 평균. 9월 9일에 정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0.70 빼기 0.71이니까 쏠림 뺀 값은 플러스 0.01입니다.”
“됐네.”
“그런데요.”
재혁이 연필 끝으로 칸 머리를 짚었다.
“오늘 값까지 넣으면 열한 점이잖아요. 다시 평균 내면 0.707이에요. 반올림하면 그대로 0.71이긴 한데, 이게 계속 쌓이면 언젠가는 0.70이 될 거고요.”
“그러면.”
“쏠림이 바뀌면, 어제 적은 「쏠림 뺀 값」이 오늘하고 뜻이 달라집니다. 지나간 줄을 다 고쳐 써야 되는데요.”
“고치면 안 되지.”
“안 되죠. 그러니까요.”
서진이 야장을 손등으로 짚었다.
“기준을 값으로 만들었으면, 그 기준을 어느 날짜에 붙들어 매야 돼. 안 그러면 자가 매일 조금씩 움직여.”
“매일 움직이는 자로 잰 열 줄은 열 번 잰 게 아니겠네요.”
“그렇지. 열 개의 다른 자로 한 번씩 잰 거야.”
재혁이 칸 머리 밑에 한 줄을 더 넣었다.
「쏠림 0.71은 9월 9일 열 점으로 고정. 새 값이 늘어도 안 고침. 다음 커터로 갈면 그 벌은 따로 냄. 9월 10일에 정함.」
“그럼 스무 점이 돼서 쏠림이 0.68인 게 확실해지면요. 그때도 안 고칩니까.”
“고쳐. 대신 그날 날짜로 새 칸을 그어. 이 칸을 지우고 그 위에 쓰는 게 아니라.”
“칸이 자꾸 늘어나는데요.”
“늘어나야지. 우리가 몇 번 마음을 바꿨는지가 그 칸 수야.”
재혁이 열한 점을 다시 훑어보다가 말했다.
“오늘 게 열한 개 중에 제일 작아요. 0.70이요.”
“그래서.”
”…줄어드나 해서요.”
서진이 잠깐 웃었다.
“그 생각 오늘 처음 했지.”
“네.”
“내가 그 생각이 무서워. 오늘이 좋게 나왔으니까 지금 세어 볼까 싶은 거.”
“그게 왜 무섭습니까. 세면 되잖아요.”
“좋게 나온 날에만 세면, 값이 정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언제 봤느냐가 정해지는 거야. 열흘 중에 제일 예쁜 날에 자를 대고 그날 값을 적으면, 그건 얼음 값이 아니라 우리 기분 값이야.”
재혁이 연필을 놓았다.
“그럼 언제 봅니까.”
“미리 정해 놓고 그때만 봐.”
야장 아래쪽에 한 줄이 늘었다.
「부족분 판정은 커터 한 벌 열 점이 다 찬 뒤에만 한다. 중간에 안 본다. 값이 좋아 보여도 안 본다. 9월 10일에 정함.」
재혁이 그 밑에 자기 글씨로 덧붙였다.
「오늘 0.70을 보고 줄어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음. 판정은 안 함. 생각한 것만 적음.」
입도는 여덟째 날이었다. 세 종을 나눠 재고 24분을 썼다. 값은 표에 넣고 아무 말도 안 붙였다.
6. 접수번호
여섯 시 제상에 맞춰 앞판을 열었다.
경옥이 자를 댔다. 문 쪽 첫 열의 성에가 5밀리였다. 뒤 다섯 열은 1밀리를 안 넘었다.
“6밀리 넘으면 제상 주기를 다섯 시간으로 줄이기로 했잖아요.”
“5밀리예요.”
“그럼 안 바꿔요.”
“안 바꿔요.”
은재가 가을 표 여덟째 칸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이거 오늘 적을 게 없는 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바꿨는데요.”
“적을 게 있어요. 「열었음. 5밀리. 안 바꿈.」이라고요.”
“안 바꾼 걸 왜 적어요.”
“안 바꾼 날도 판정한 날이니까요. 안 적으면 나중 사람이 우리가 그날 안 봤다고 생각해요.”
배수구는 코일 밑 얕은 팬 끝에 있었다. 은재가 통을 받치려다 그대로 멈췄다.
팬 바닥이 온통 얼음이었다.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쯤 됐고, 가장자리가 팬 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물이 안 나갔네요.”
경옥이 손전등을 배수관 입구에 대 보았다. 관 안쪽도 막혀 있었다.
관리동에서 도면을 가져왔다. 배수관 옆으로 열선이 그려져 있었다. 제상수가 관 안에서 다시 얼지 않게 넣는 것이었다.
경옥이 배관을 손으로 훑었다. 열선은 없었다. 배선함을 열어 보니 그 회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도면에는 있어요.”
“벽 안에는 없고요.”
”…열두 해 동안 제상을 했는데요.”
“했죠. 그런데 그 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안 봤어요.”
은재가 팬 안의 얼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이거 열두 해 치예요?”
“몰라요. 얼었다가 조금씩 마르기도 했을 거예요. 얼음도 공기 중으로 날아가긴 하니까요. 아주 느리게.”
“그래도 무게는 잴 수 있잖아요.”
“잴 수 있죠. 그런데 그게 몇 해 치인지 모르잖아요. 날짜가 없어요. 구간도 없고요.”
은재가 잠깐 있다 말했다.
“날짜 없는 합계네요.”
“네. 그건 값이 아니에요.”
“그럼 이 얼음은 뭐예요.”
“오늘 우리가 알게 된 거예요. 왜 여태 이걸 못 쟀는지.”
경옥이 팬을 빼내면서 말했다.
“고장이 아니어서 안 고쳤어요. 방은 계속 영하 30도였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요. 그리고 고장이 아니어서 못 쟀어요.”
얼음은 긁어내고 팬은 비웠다. 열선 시공은 신청서로 올렸다. 다음 제상부터는 통을 받쳐 무게를 잰다.
은재가 노트에 적었다. 「9월 10일. 팬 비움. 제상수 계량 이날부터 0으로 놓음. 앞의 열두 해는 이 값에 안 들어감. 그 얼음의 무게는 안 쟀음. 왜: 몇 해 치인지 모르는 값이라 쓸 데가 없음.」
「우리가 한 것」 칸에도 적었다. 앞판을 열었고, 팬을 뺐고, 12분 걸렸고, 방 온도가 0.3도 올랐다고.
“내일 값은요?”
“우리가 건드린 줄로 표시해요.”
3월 부족 넉 통은 오후에 강릉에 물었다. 어제 인력을 물어본 연구동에는 안 물었다. 회신은 아직 없었다.
습도계 회신 종이는 벽에 붙였다. 접수번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3월엔 없는데 왜 붙여요?”
“접수번호가 있으니까요.”
”…없는 물건 번호잖아요.”
“그래도 이게 있으면 다음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안 써도 돼요. 12월에 떨어져도 접수번호는 남고, 떨어졌다는 것도 남아요. 안 낸 거랑 떨어진 거는 달라요.”
은재가 표를 덮으면서 말했다.
“오늘 우리가 안 한 게 많네요.”
“안 한 게 아니에요. 안 바꾸기로 한 거예요. 그 둘은 종이에 다르게 적혀요.”
“어떻게 다르게 적혀요.”
“안 한 건 빈칸이고, 안 바꾼 건 어제하고 같은 값이에요. 빈칸은 나중에 아무 말도 못 해요. 같은 값은 열두 줄이 되면 말을 해요.”
정한 대로 멈추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열흘째에 멈추면 「안 보였다」가 아니라 「열흘 봤는데 안 보였다」가 남는다. 앞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뒤의 것은 값이다.
규칙은 지킬 만할 때가 아니라 어길 만할 때 있는 것이다. 오늘 그만두기 싫은 마음이 드는 것, 그것이 열흘 전에 규칙을 적어 둔 이유였다.
멈춘 자리에는 다시 볼 조건을 같이 적어 둔다. 조건이 없는 중단은 포기고, 조건이 있으면 기다림이다. 그리고 어떤 문은 여는 일과 읽는 일이 서로를 없앤다. 그럴 때는 안 여는 것이 더 많이 남기는 쪽이다.
기준을 값으로 만들었으면 그 기준을 어느 날짜에 붙들어 매야 한다. 매일 조금씩 움직이는 자로 잰 열 줄은 열 번 잰 것이 아니라, 열 개의 다른 자로 한 번씩 잰 것이다. 마음을 바꿀 때는 지우지 않고 그날 날짜로 칸을 하나 더 긋는다. 칸의 수가 우리가 몇 번 마음을 바꿨는지다.
보고 싶을 때 보면, 정해지는 것은 값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 봤느냐다. 그러니 언제 볼지를 먼저 정하고 그때만 본다.
고장이 아니어서 안 고친 것이 있고, 고장이 아니어서 못 잰 것이 있다. 열두 해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자리에서 오늘 얼음 한 덩이가 나왔다. 날짜가 없어서 그것은 값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한 일은 그 얼음을 버리고 영을 놓은 것이다.
앞의 열두 해는 이 값에 들어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