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9화 - 돌림

제29화 「돌림」
1. 586미터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이었다. 열여드레째 같은 숫자였다.
580미터에서 583미터, 583미터에서 586미터. 두 토막이었다. 철수까지 서른네 날이 남아 있었고, 다음 청소일까지는 하루였다.
재혁이 줄자를 폈다. 2.97미터. 둘째 토막은 2.95미터.
여덟째 날이었다.
“케이블 48.00이요. 코어 누계는 47.26이고요.”
“차는.”
“0.74요. 어제까지가 0.62였으니까 오늘 0.12예요.”
서진이 야장 옆줄을 짚었다. 0.06, 0.09, 0.08, 0.11, 0.10, 0.08, 0.10, 0.12.
재혁의 연필이 멈췄다.
“폭이 넓어졌어요.”
“얼마.”
“어제까지 0.05였는데 오늘 0.06이요. 제일 작은 게 0.06이고 제일 큰 게 0.12니까.”
“나빠진 거야?”
”…그렇게 보여요.”
서진이 장갑 낀 손으로 그 줄을 짚었다.
“폭은 제일 큰 거하고 제일 작은 거 사이야. 점을 하나 더 찍으면 어떻게 돼.”
”…더 커지거나 더 작아지거나요.”
“그러면 폭은.”
“넓어져요.”
“그 반대는.”
재혁이 말을 찾다가 멈췄다.
”…없네요. 점이 늘어서 폭이 좁아지는 일은 없어요. 이미 찍은 점이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그래. 폭은 좁아질 수가 없는 자야. 그러니까 폭이 넓어졌다는 건 얼음이 뭘 했다는 말이 아니야. 우리가 오래 봤다는 말이야.”
“그럼 흔들리는 건 뭘로 재요.”
“가운데를 먼저 정해. 여덟 개를 다 더해서 여덟으로 나눠 봐.”
재혁이 야장 귀퉁이에 세로로 숫자를 늘어놓고 더했다. 0.74. 여덟으로 나누니 0.0925가 나왔다.
“0.09요.”
“그다음에 하나하나가 그 0.09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재. 위로 떨어졌든 아래로 떨어졌든 떨어진 만큼만.”
한참 걸렸다. 여덟 개의 거리를 다 더하니 0.12였고, 여덟으로 나누니 0.015였다.
“0.015요.”
“그게 흩어짐이야. 그 자는 점이 늘어도 저절로 안 커져. 커지면 진짜 커진 거야.”
일곱 점으로도 다시 셌다. 가운데는 똑같이 0.09가 나왔고 흩어짐은 0.013이었다.
“커졌어요. 0.013에서 0.015로요.”
“그래서.”
”…나빠진 거예요?”
“두 점이야.”
재혁이 웃었다.
“두 점으로 선을 그으면 그 선은 우리가 만든 거고요.”
“어제 배운 거 오늘 쓰네.”
야장 뒤쪽에 칸을 하나 더 그었다. 가운데 / 흩어짐. 그 아래에 재혁이 한 줄을 적었다.
「9월 7일부터 흩어짐 칸 신설. 여덟 점이 다 남아 있어 첫날 것까지 되돌아가 계산함. 값은 첫날부터의 것이고, 계산한 날은 9월 7일임.」
부스러기 저울은 마른 무게로 15.24와 15.25였다. 계산치 31.2에서 30.49를 빼면 0.71. 아홉 점째였다. 모레인 9월 9일에 열흘 치로 한 번에 보기로 되어 있었다.
헛돎 칸에는 첫 토막에서 한 번, 2초쯤이라고 적었다. 일곱째 날이었고, 9월 11일에 보기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에 재혁이 야장의 다음 줄에 미리 줄을 그었다.
“내일 청소일이니까 토막이 없잖아요. 길이 칸하고 벌어짐 칸이 빌 거예요.”
“그래서.”
“미리 적어 두면 안 돼요? 「9월 8일 청소일. 시추 없음. 그래서 잴 것 없음.」이라고요.”
서진이 야장을 들여다봤다.
“안 한 일을 했다고 적으면 안 되지. 근데 안 할 걸 안다고 적는 건 예정이야. 예정은 미리 적는 거야.”
“적되, 예정이라고 같이 적어. 내일 못 하게 되면 그 줄은 거짓말이 되니까.”
재혁이 그 줄 옆에 작게 두 글자를 더 적었다. 「예정.」
2. 아홉째 줄
340일째였다. 절단까지 스물닷새. 2호기 단독 운용 열이틀째였고 방은 영하 30.0도였다.
경옥이 벽의 종이 앞에 섰다. 「쌓는 날」 표의 아홉째 줄에 은재가 적어 둔 값이 있었다. 9월 6일, 13시간 11분.
위로 여덟 줄이 있었다. 13시간 26분, 33분, 41분, 38분, 33분, 29분, 24분, 19분. 그리고 11분.
“둘 다 내려갔어요.”
은재의 목소리가 조금 떴다. 경옥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드레째 것도 내려갔고 아흐레째 것도 내려갔어요. 어제 정한 조건이 그거였잖아요. 둘 다 내려가면 본다.”
“그러면 오늘은 봐요.”
“근데요.”
“아무 이유 없이 둘 다 내려갈 확률이 넷에 하나잖아요. 하나가 내려갈 확률이 반이고 두 번 연달아면 반의 반이니까요. 넷에 하나면… 흔한 거 아니에요?”
“흔해요.”
“그런데도 봐요?”
“흔하니까 봐요. 이건 알았다는 게 아니에요. 보기로 한 거예요.”
경옥이 종이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어제 은재가 적어 둔 문장이 거기 있었다. 「9월 5일에 둘 다 내려가면 보기로 정했음.」
“이 줄이 있으니까 오늘 넷에 하나가 진짜 넷에 하나예요. 값을 다 보고 나서 정했으면, 우리는 아마 제일 많이 내려간 자리를 골랐을 거예요. 그러면 그건 넷에 하나가 아니에요. 그건 그냥 우리가 고른 자리예요.”
은재가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어제는 반이 맞았다고 했다가 안 봤잖아요.”
“어제는 하나였고 오늘은 둘이에요.”
증발기 앞판을 여는 일은 세 가지를 미리 정해 놓고 했다. 반출입이 없는 날일 것. 2호기만 도는 시간일 것. 여는 시간은 4분을 넘기지 않을 것. 토요일이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하는 날이었다.
앞판을 열기 전에 경옥이 종이 한 장을 먼저 꺼냈다.
“보러 가기 전에 적을 게 있어요.”
“뭘요?”
“우리가 뭘 볼 것 같은지요.”
”…그걸 왜 적어요?”
“안 적고 갔다가 뭘 보고 나오면, 그게 본 건지 보러 간 건지 나중에 못 가려요.”
경옥이 적었다. 「9월 7일. 앞판 열기 전. 우리는 어제 착상의 원인을 습기라고 적어 놓았음. 그래서 습기 때문인 것처럼 생긴 것을 볼 것으로 예상함.」
앞판이 열리자 코일 여섯 열이 드러났다. 첫 열에만 서리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자를 대니 4밀리쯤이었다. 뒤쪽 다섯 열은 표면이 하얗게 흐려 있을 뿐 1밀리도 안 됐다.
은재가 자를 든 채로 말했다.
“다 덮인 게 아니에요.”
“공기가 들어오는 쪽이 첫 열이에요. 문에서 들어온 눅눅한 공기가 코일에 처음 닿는 자리가 거기예요. 거기서 제일 먼저 이슬점 아래로 떨어지니까 거기부터 앉아요.”
“그럼 첫 열만 막혀도…”
“바람이 줄어요. 다 덮여야 나빠지는 게 아니에요. 첫 줄만 막혀도 나빠져요.”
사진을 두 장 찍고 자를 같이 넣었다. 3분 40초 만에 앞판을 닫았다.
기록지에는 두 줄이 들어갔다.
「9월 7일. 앞판 3분 40초 엶. 첫 열 4밀리, 뒤 다섯 열 1밀리 이하.」
「이 줄은 우리가 건드린 줄임. 다음에 비교할 때 빼지 말고 표시만 할 것.」
은재가 첫 줄을 다시 보다가 물었다.
“이거 어제 우리가 맞힌 거 아니에요?”
“맞은 것 같으면 그때가 제일 조심할 때예요.”
“우리는 어제 습기라고 적어 놓고 오늘 습기처럼 생긴 걸 봤어요. 보고 싶은 걸 본 건지 아닌지는 지금 우리가 못 가려요. 그러니까 가르지 말고, 미리 뭘 볼 것 같았는지를 옆에 붙여 놔요. 나중 사람이 가르라고요.”
습도계 신청서는 오전에 다 써 놓고 못 냈다. 토요일이라 구매 담당이 없었다.
은재가 신청서 위쪽에 날짜를 적었다. 「9월 9일 월요일 아침에 냄.」
“미룬 건 날짜를 적어야 미룬 게 되니까요.”
경옥이 그 종이를 서류철 맨 앞에 꽂았다.
3. 한 번 편 릴
마감이 지난 지 이레째였다. 하루 30분 규칙도 이레째였다.
정한이 어제 재권취한 릴을 다시 걸었다. 셋째 본의 나머지 구간이 남아 있었다.
동규가 화면을 보다가 물었다.
“어제 뜬 건 지울까요? 접힌 채로 뜬 건데요.”
“그러니까 안 지웁니다.”
정한이 파일 두 개에 이름을 붙였다. 「9월 6일 · 처치 전」과 「9월 7일 · 처치 후」였다.
“어느 게 진짜입니까.”
“둘 다입니다. 다른 날 뜬 겁니다.”
처치 후의 레벨은 처치 전보다 나았다. 죽던 폭이 절반쯤 줄어 있었다. 회복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 게 낫잖아요.”
“낫습니다. 좋아진 쪽이 진짜인 건 아닙니다.”
정한은 의뢰인에게 보낼 종이를 책상에 늘어놓았다. 넉 장이었다. 잰 것, 못 본 것, 문턱, 답.
“이 릴 편 건 어느 장에 넣습니까.”
“거기가 문제입니다.”
정한이 넉 장을 하나씩 짚었다.
“잰 것에 넣으면 잰 값이 됩니다. 못 본 것에 넣으면 우리가 못 본 게 됩니다. 문턱도 아니고 답도 아닙니다.”
“그럼 안 넣습니까.”
“다섯째 장을 만듭니다.”
“저번엔 다섯째 장 안 만드셨잖아요.”
“저번 건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 일이었습니다. 보기만 했으니까요.”
정한이 빈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이번 건 손을 댄 일입니다. 손을 댔으면 손을 댄 종이가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장의 제목은 「우리가 한 것」이었다. 칸이 다섯이었다. 무엇을, 왜, 언제, 몇 번, 되돌릴 수 있는지.
「감아 다시 감음. 1회. 9월 6일. 장력 낮춤. 되돌릴 수 없음. 이 릴은 이제 한 번 편 릴임. 처음 상태가 아님.」
정한이 파일 두 개를 나란히 열어 시각표에 경계를 그었다.
“이걸 자를까 하다가 안 잘랐습니다.”
“왜요.”
“자르면 깨끗해집니다. 깨끗해지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안 보입니다. 나중에 누가 이 두 파일을 받으면 다른 릴에서 뜬 걸로 압니다.”
30분은 오후에 썼다. 사진 열두 장을 다시 걸어 놓고 셋째 글자 자리를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새로 안 나왔다.
동규가 시계를 봤다.
“이레 동안 아무것도 안 늘었네요.”
“그것도 이레치입니다.”
정한이 기록장에 적었다. 「9월 7일. 30분. 새로 읽은 것 없음.」
“없는 날을 안 적으면, 나중에 이 종이를 보고 이레 내내 뭘 읽어 낸 줄 압니다.”
4. 맨 위
토요일이었다. 스무아흐레째였고, 하람의 정기 방문일이었다.
버스에서 하람은 수첩을 펴고 오늘 순서를 먼저 적었다. 어제부터 다섯 줄의 맨 위를 하루에 하나씩 내리기로 했으므로 오늘은 「오늘 또렷하셨던 것」이 맨 위였다. 그 아래로 최영숙, 실 양, 실패, 바늘 순이었다.
한 줄을 더 적었다. 어제 저녁에 생각해 둔 것이었다.
「오늘 길게 적을 줄: 실패. 아침에 정함.」
어머니는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하람이 들어가자 고개를 들고 웃었다.
“왔니.”
「오늘 또렷하셨던 것」 칸부터 채웠다. 어머니는 미싱 바늘 이야기를 했다. 얇은 천에는 열한 호, 청바지 같은 건 열네 호, 실은 육십 번이 보통이고 두꺼운 건 삼십 번을 쓴다고, 숫자를 하나도 안 틀리고 말했다.
“오늘 무슨 요일인지 아세요?”
어머니가 잠깐 창을 봤다.
”…낮이지.”
하람은 고쳐 주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적었다.
「아는 것은 다 있음. 겪은 것이 없음. 아는 걸로는 어제를 알 수 없음.」
최영숙의 종이는 스무 번째 것이었다.
「토요일. 6시 5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아침에 비 잠깐 옴 / 새것 / 슬리퍼 / 없음.」
손잡이는 열이틀째 연속이었다. 시각은 여전히 6시 40분과 7시 40분 사이를 오르내렸다.
종이 아래에 최영숙이 손으로 한 줄을 더 붙여 놓았다.
「어제는 제가 먼저 문을 열었어요. 그래서 두드리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하람이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9월 6일은 최영숙 씨가 먼저 여셨음. 그날은 없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바꾼 날임. 빼지 말고 표시만 할 것.」
실 양은 아흐레째였다. 「흰 실 그대로. 검정 조금 줄었음.」 어제와 반대였다.
실패 줄에서 하람은 처음으로 오래 앉아 있었다. 열한 개, 자리는 그대로였다. 부엌 0, 미싱 5, 반짇고리 6. 여기까지가 여태 적어 온 전부였다.
오늘은 열한 개를 하나씩 손에 들었다. 흰 것 넷, 검정 셋, 감색 둘, 회색 하나, 그리고 실이 거의 다 풀려 심만 남은 것 하나. 감긴 양도 적었다. 가득이 다섯, 반쯤이 셋, 조금 남은 게 셋.
수첩의 그 줄이 한 페이지의 절반을 먹었다.
하람은 그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이 줄이 오늘 길어진 게 아니라, 여태 짧았던 것임.」
바늘은 셋째 값이었다. 다섯 개. 어제와 수가 같았다.
그런데 하나를 집어 보니 굵기가 달랐다. 넷은 열한 호였고 하나가 열네 호였다.
“어머니, 이건 왜 여기 있어요.”
“두꺼운 거 할 때 쓰는 거야.”
하람이 적었다. 「수 같음. 자리 같음. 종류가 다름.」
수 다음에 자리를 셌고, 자리 다음에 종류를 셌다. 처음에는 그냥 몇 개인지만 셌다.
돌아오는 길에 하람은 마지막 줄이 오늘도 짧다는 걸 알았다. 자리는 바뀌었지만 아래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버릇은 안 바뀌었다.
그래서 아침에 정해 둔 규칙이 필요했던 거였다. 다섯 줄 중 오늘 길게 적을 줄을 아침에 하나 정해 놓는 것. 그날 뭘 봤는지 보고 나서 정하면, 마음이 가는 줄만 길어질 것이었다.
계단에서 어머니는 신발을 두 번 고쳐 신었다. 어제는 세 번이었다.
「세 번이 두 번이 됨. 좋아진 건지 오늘만 그런 건지 모름.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님.」
건강진단서 결과는 아직이었다. 화요일이나 수요일이라고 했다.
5. 같은 자리
토요일 오후였다. 재혁이 어제 찍은 사진 넉 장을 노트북에 띄워 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안 맞아요.”
“뭐가.”
“어제 두 토막 끝을 두 장씩 찍었는데, 자를 놓은 자리가 매번 달라요. 어떤 건 끝면 옆에, 어떤 건 좀 앞에 놨어요.”
“그러면.”
“앞에 놓은 사진은 자가 커 보여요. 그러니까 같은 5밀리가 사진마다 다른 크기예요. 두 장을 못 맞대요.”
서진이 화면을 흘끗 보고 말했다.
“자하고 재는 것이 같은 높이에 있어야 해.”
“네.”
“그것만이 아니야. 카메라가 정면이 아니면 끝면이 찌그러져 보여. 거리가 달라도 그렇고. 조명 방향이 다르면 이가 나간 자리 그림자가 아예 다른 모양으로 나와.”
재혁이 크래들 위에 청테이프로 표시를 붙였다. 카메라 자리 하나, 조명 자리 하나. 야장에 규칙 넷을 적었다.
「하나. 자는 끊긴 면에 붙여 같은 높이에 둔다. 둘. 카메라 축을 코어 축에 맞춘다. 셋. 거리 고정. 크래들 표시 자리에서만 찍는다. 넷. 조명은 왼쪽 한 방향만. 그림자로 깊이를 본다.」
“이거 어디서 배웠어.”
“작년에 어디서 봤어요. 비석 탁본할 때 조명만 옮겨 가면서 찍는다고요.”
“사진은 찍는 게 아니야. 같게 찍는 거야. 다르게 찍은 열 장은 열 장이 아니라 한 장씩 열 개야.”
“어제 거 버릴까요.”
“네가 정해.”
재혁은 안 버렸다. 봉투에 넣고 겉에 적었다.
「9월 6일. 규칙 정하기 전 것. 서로 못 맞댐. 오늘 것하고도 못 맞댐.」
오늘 두 토막의 끝을 규칙대로 다시 찍었다. 자를 대고 보니 위쪽 끝의 이 나간 자리는 3밀리쯤이었고 아래쪽 끝은 8밀리쯤이었다.
“한 토막에 1센티가 안 되는데요.”
“그래서.”
“6미터에 10센티가 나오려면 이걸로는 한참 모자라요.”
“오늘 두 토막이야. 두 토막으로 여덟 점을 설명하려고 하지 마.”
재혁이 사진 파일 이름을 적다가 멈췄다.
“이거 짝을 적어야겠어요.”
“왜.”
“580에서 583 토막의 아래 끝하고, 583에서 586 토막의 위 끝이 원래 붙어 있던 자리잖아요. 한 자리에서 없어진 건 두 끝에 나눠져 있는 거예요. 두 끝을 다 재서 더해야 그 자리 손실이에요.”
“그런데.”
“처리대에 순서대로 안 놓이면 어느 끝하고 어느 끝이 짝인지 모르게 돼요.”
야장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사진 이름에 짝을 적을 것. 580-583 아래끝 / 583-586 위끝은 한 자리임.」
서진이 그 줄을 보다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재는 건 끝이 어떻게 생겼나야. 없어진 게 어디로 갔는지가 아니야. 그건 아직 몰라.”
“열흘쯤 뒤에 보는 거죠.”
“그때도 모를 수 있어.”
내일 쓸 것들을 미리 꺼내 놓았다. 훑개와 체 두 벌, 저울, 빈 통 넷.
야장에는 어제 그어 둔 줄이 있었다. 「9월 8일 청소일. 시추 없음. 그래서 잴 것 없음. 예정.」
6. 첫 줄
저녁에 경옥이 벽에 아홉째 장을 붙였다. 자리는 어제 손가락으로만 재 뒀던 그 자리였다.
「가을 표」였다. 칸이 여섯이었다. 날짜, 쌓은 시간, 바깥 온도, 습도, 문, 반출입.
첫 줄은 9월 6일 자로 넣었다. 쌓은 시간 13시간 11분, 바깥 온도 27.2도, 문 0회, 반출입 없음.
습도 칸에서 은재의 연필이 멈췄다.
“첫 줄부터 빈 칸이에요.”
“빈 칸이 아니에요.”
경옥이 연필을 받아 그 칸에 두 글자를 적었다. 「안 잼.」
“빈 칸하고 「안 잼」은 종이 위에서 똑같이 생겼어요. 근데 하나는 우리가 안 적은 거고 하나는 우리가 안 잰 거예요. 나중 사람은 그 둘을 못 가려요. 우리가 가려 줘야 해요.”
은재가 관측소 자료를 열었다. 인천의 9월 6일 평균 상대습도가 78퍼센트였다.
“이거라도 넣을까요.”
“넣어요. 대신 옆에 다 적어요.”
은재가 연필로 78을 적고 그 아래에 잔글씨로 붙였다. 「우리 값 아님. 관측소. 8킬로 떨어짐. 실외임.」
경옥이 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바깥이 78이라도 여기 들어오면 다른 수예요. 상대습도는 온도를 알아야 뜻이 있는 값이거든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문 열 때 들어온 공기 안에 물이 몇 그램 들어 있었나예요.”
“그럼 왜 적어요.”
“안 적으면 그 자리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이니까요.”
“적어 놓으면 뭐가 달라져요?”
“나중 사람이 여기에 뭐가 들어와야 하는지를 알아요. 빈 칸은 아무것도 안 알려 줘요. 아니라고 써 놓은 칸은 뭐가 맞는지를 알려 줘요.”
옆 연구동은 두 사람 중 하나가 3월 인수 작업일에 어렵다고 회신해 왔다. 경옥은 오늘 세 군데에 물어 놓았다. 다른 연구동 한 곳, 위탁 인력 한 곳, 그리고 수송팀에 작업일을 하루 늦출 수 있는지.
“아직 아무 데도 답이 없어요.”
경옥이 불러 주는 대로 은재가 기록장에 적었다.
「9월 7일. 세 군데 물음. 아직 아무 데도 대답 없음. 없음이 아니라 아직임.」
“그리고 한 줄 더요.”
“네.”
“10월 10일까지 셋 다 안 되면 작업일을 옮긴다. 오늘 정함.”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가서 정하면 안 돼요?”
“그때 가서 정하면, 어느 쪽이 덜 창피한지를 보고 정하게 돼요. 사람이 그래요.”
절단까지 스물닷새였다. 통은 1,240개, 3월에 넉 통이 모자랐고, 옆 연구동 넉 통은 9월 28일까지 보류였다.
문을 잠그기 전에 은재가 물었다.
“오늘은 뭐 한 날이에요?”
경옥이 벽의 아홉 장을 한 번 훑었다.
“미리 정해 놓은 대로 한 번 열어 본 날이에요.”
“열어 봐서 뭘 알았어요?”
“첫 열만 두껍다는 거요. 그리고 우리가 그걸 볼 줄 알고 갔다는 것도요.”
“그건 아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뭘 보고 있었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것부터 알아야 그다음 걸 알아요.”
이날 네 군데에서 같은 일이 있었다. 점을 하나 더 찍었더니 폭이 넓어졌고, 넓어진 것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오래 본 것이었다. 앞판을 열었고 연 줄을 빼지 않고 표시해 두었다. 손을 댄 종이를 한 장 더 만들었고, 늘 맨 아래에 있던 줄이 한 번 위로 올라왔다.
돌린다는 것은 새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늘 아래에 있던 자리를 한 번 위로 올려 보는 일이었고, 올려 보면 그 줄이 여태 얼마나 짧았는지가 보였다.
그리고 본다는 일에는 값이 들었다. 열면 방이 데워졌고, 먼저 문을 열면 그날의 소리가 없어졌고, 감았다 풀면 편 자리가 남았다. 그러니 본 날은 지우는 게 아니라 표시하는 것이었다. 여기를 우리가 건드렸다고.
내일은 아무것도 안 파는 날이었다.
야장에는 벌써 그 줄이 그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