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7화 - 닳음

제27화 「닳음」
1. 574미터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이었다. 열엿새째 같은 숫자였다.
568미터에서 571미터, 571미터에서 574미터. 두 토막이었다. 철수까지 서른여섯 날이 남아 있었고, 다음 청소일까지는 사흘이었다.
재혁이 줄자를 폈다. 첫 토막 2.95미터, 둘째 토막 2.97미터.
“엿새 치예요. 케이블로는 36미터.”
야장의 숫자를 위에서부터 내려가며 더했다. 5.94, 5.91, 5.92, 5.89, 5.90, 그리고 오늘의 5.92.
“35.48이요. 차이가 0.52예요.”
“날별로는.”
“0.08이요.”
재혁이 여섯 개를 한 줄로 옮겨 적었다. 0.06, 0.09, 0.08, 0.11, 0.10, 0.08.
“여섯 개가 다 양수예요.”
“그래서.”
“이제 하루에 얼마씩인지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여섯 개면.”
서진이 그 줄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제일 작은 게 0.06이고 제일 큰 게 0.11이야. 폭이 0.05야. 평균이 0.087인데 폭이 그 반보다 커.”
“그러면요.”
“매일 벌어진다는 건 여섯 개로도 말할 수 있어. 그건 어제도 말했어. 하루에 얼마씩인지는 여섯 개로도 못 해.”
“점이 몇 개면 돼요?”
“점 개수로 정해지는 게 아니야. 폭이 좁아지든지, 왜 오르내리는지를 알든지.”
재혁이 야장에 적었다. 「엿새. 여섯 개가 다 양수. 방향은 말함. 크기는 아직 못 함. 폭 0.05.」
부스러기를 말려서 달았다. 15.25킬로그램과 15.25킬로그램. 계산치는 31.2였다.
“0.70이요.”
일곱 번째 점이었다. 0.65, 0.71, 0.70, 0.74, 0.69, 0.72, 0.70.
“9월 9일에 봐요.”
“그래.”
둘째 토막에서 헛돎이 한 번 있었다. 2초쯤이었다. 재혁이 초 단위를 못 적는다는 말과 함께 칸을 채웠다. 다섯째 날이었고, 그것도 9월 11일에 보기로 되어 있었다.
작업대 끝에 다이얼 게이지가 이미 나와 있었다. 재혁이 아침에 꺼내 둔 것이었다.
“오늘이에요.”
“오후에 해.”
“지금 하면 안 돼요?”
“지금 하면 오전 내내 그 생각 해.”
2. 예순넷에 하나
2호기 단독으로 열흘째였다. 아침 계기는 영하 30.0도였다.
은재가 「쌓는 날」 표에 일곱째 줄을 적었다. 9월 4일, 13시간 24분. 바깥 28.1도, 문 두 번, 반출입 없음. 조건은 채워져 있었다.
일곱 줄이 세로로 늘어섰다. 13:26, 13:33, 13:41, 13:38, 13:33, 13:29, 13:24.
“사이가 여섯이에요. 더하기 7, 더하기 8, 빼기 3, 빼기 5, 빼기 4, 빼기 5요.”
“그래서요.”
“여섯이면 예순넷에 하나예요.”
은재가 연필 끝으로 여섯 개를 짚었다. 넷에 하나에서 열여섯에 하나로, 서른둘에 하나로 왔던 셈이었다.
경옥이 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무늬를 언제 정했어요?”
“네?”
“이 무늬가 나올 확률을 셌잖아요. 그 무늬를 언제 정했어요. 보기 전이에요, 보고 나서예요.”
은재가 대답하지 못했다.
“보고 나서 세면요, 무슨 무늬가 나와도 예순넷에 하나예요. 여섯 개 다 오르막이어도 예순넷에 하나고, 오르락내리락 아무렇게나 나와도 예순넷에 하나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센 건요.”
“센 건 맞아요. 값이 아닐 뿐이에요.”
은재가 지우개를 들었다.
“지우지 마세요.”
경옥이 여백 쪽을 가리켰다.
“옆에 적어요. 9월 5일. 지금까지 센 확률은 무늬를 보고 나서 센 것임. 값 아님. 지우지 않음.”
“지우는 거랑 옆에 적는 거랑 뭐가 달라요.”
“지우면 센 적이 없는 게 돼요. 옆에 적으면 세 봤는데 값이 아니었던 게 되고요.”
은재가 그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세요.”
“먼저 정해요. 지금 정해요.”
경옥이 표 아래에 한 줄을 그었다.
「9월 5일에 정함. 여덟째 줄과 아홉째 줄이 둘 다 내려가면 그때 봄. 넷에 하나. 값 보기 전에 정함.」
“둘 다 안 내려가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봐요. 그리고 그때 또 정해요.”
은재가 표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자꾸 줄어요? 좋은 거 아니에요?”
“바깥이 몇 도예요.”
“28.1도요.”
“여름 표 만들 때는 29도에서 30도 사이였어요.”
경옥이 일곱 줄 옆의 온도 칸을 손으로 짚어 내려갔다. 29.1, 29.4, 30.0, 28.6, 29.0, 28.4, 28.1.
“9월이에요. 날마다 조금씩 시원해져요. 그러면 날마다 조금씩 줄어드는 게 맞아요.”
“기계가 좋아진 게 아니고요.”
“계절이 내려가는 거예요.”
은재가 조건 칸을 다시 보았다.
“조건 안에는 들어 있잖아요.”
“조건을 만들 때는 넓게 잡아야 날이 많이 들어와요. 그런데 넓게 잡으면 그 안에서 또 기울어요.”
“그러면 이 표는요.”
“9월 중순이면 못 써요. 조건 밖으로 나가서가 아니라, 조건 안에서 계속 내려가서요.”
경옥이 새 종이를 한 장 꺼내 위쪽에 「가을 표」라고만 적어 두었다. 아직 아무 줄도 없었다.
3. 직각 둘
둘째 본 이관이 끝났다. 31분짜리였다.
정한이 접합부 열한 군데의 시각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4분 20초, 9분 05초, 12분 50초, 17분 05초, 19분 30초, 21분 15초, 24분 40초, 26분 40초, 28분 10초, 29분 25초, 30분 50초.
그중 둘에는 옆에 「직각」이라고만 썼다. 4분 20초와 26분 40초였다.
대각선으로 자른 접합은 지날 때 소리가 비스듬히 넘어간다. 직각으로 자른 것은 뚝 끊긴다. 급할 때 그렇게 자른다.
정한은 「급했던 것으로 보임」이라고 쓰려다 말고 연필을 놓았다.
직각으로 자른 사람이 급했는지 서툴렀는지 그는 몰랐다. 종이에는 직각이라고만 적었다.
4분 20초 앞뒤를 한 번 더 들었다.
말이 없는 데를 골라 들으니 뒤쪽 바닥이 조금 높았다. 히스가 반 뼘쯤 두껍게 깔려 있었다.
같은 기계로 같은 날 이어서 녹음한 것이라면 그 바닥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그는 종이에 한 줄을 더 붙였다.
「4분 20초 앞뒤로 잡음 바닥 높이가 다름. 같은 날 같은 기계가 아닐 수 있음. 확정 아님.」
한 통에 들어 있다고 한 날 것이 아니었다.
셋째 본을 걸었다. 아세테이트는 아니었고 폴리에스터였다.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앞 3분에서 고역이 죽어 있었다.
정한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았다. 많이 들은 자리였다.
테이프는 헤드를 지날 때마다 산화층이 아주 조금씩 벗겨진다. 한 번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백 번이면 앞부분만 소리가 얇아진다.
제일 아끼던 데가 제일 상해 있었다.
그는 그 3분을 따로 표시하고 옆에 적었다.
「앞 3분 고역 감쇠. 원인은 반복 재생으로 보임. 손대지 않음. 뒷부분과 같은 설정으로 옮김.」
30분 규칙은 닷새째였다. 그는 시계를 보고 케이스 라벨을 갓등 아래로 가져왔다.
첫 글자의 세로획을 다시 찍었다. 8월 12일에 찍은 것과 같은 각도, 같은 자리였다.
석 주 전 사진과 오늘 사진을 나란히 놓으니 오늘 것의 그림자가 조금 짧아 보였다.
눌린 자국이 세월에 아주 느리게 펴지는 일은 있다. 그런데 조명을 1도만 틀어도 그림자는 그만큼 짧아진다.
그는 오늘 사진을 지우지 않았고, 8월 것도 지우지 않았다.
「펴졌는지 못 가름. 재는 방법의 폭 안일 수도 있음. 단, 반년 뒤에 같은 방법으로 한 번 더 찍으면 그때는 가를 수 있음. 오늘 것은 그때 쓰려고 남김. 9월 5일.」
30분이 되어 그는 라벨을 봉투에 넣었다. 세 글자는 오늘도 읽히지 않았다.
4. 열흘
목요일 오전이었다. 스무이레째였다.
주간보호센터에 등록 서류를 냈다. 건강진단서가 한 장 필요하다고 했다. 결핵 검사가 들어간 것이라 결과가 사나흘 걸린다고 했다.
첫 방문일은 9월 15일 월요일로 잡혔다. 두 시간, 월요일과 목요일 주 2회.
하람은 그 날짜를 수첩에 적고, 어머니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미리 말하면 어머니는 그날까지 열흘 동안 물어보실 것이었다. 당일에 말하면 갑자기가 될 것이었다.
「9월 14일 저녁에 한 번, 15일 아침에 한 번. 두 번 말할 것. 종이에 적어 냉장고에 붙일 것.」
그 밑에 한 줄을 더 붙였다.
「왜 두 번인가: 한 번은 잊으시고, 세 번은 채근이 됨. 근거 없음. 해 보고 고칠 것.」
방에서 미싱 소리가 났다. 어제 겉감과 안감 사이에 끼워 넣은 심지를 오늘 박고 있었다.
소리가 몇 번 끊겼다. 하람이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실을 다시 꿰고 있었다.
“자꾸 끊겨.”
“실이 오래됐나 봐요.”
“실 아니야.”
어머니가 미싱 위쪽의 나사를 돌려 바늘을 빼냈다. 새 바늘을 꺼내 끼우고 나사를 조였다. 손이 멈칫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부러졌어요?”
“안 부러졌어.”
“그런데 왜 갈아요.”
“바늘은 안 부러져도 갈아야 해.”
어머니가 발판을 한 번 밟아 보고 말했다.
“부러지면 그날 알잖아. 무뎌지는 건 몰라. 그러니까 몇 벌 하고 나면 그냥 갈아.”
“몇 벌이요?”
“몰라. 손이 알지.”
미싱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번엔 끊기지 않았다.
하람은 수첩에 옮겨 적었다.
「9월 5일. 바늘 갈아 끼우심. 부러져서가 아니라 무뎌져서. 몇 벌마다인지는 모르신다고 하심. 손이 안다고 하심.」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손이 안다는 것은 내 수첩에 적을 수 없는 것임.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적을 수 있음.」
실패는 열한 개였고 자리도 같았다. 부엌 0, 미싱 5, 반짇고리 6. 흰 실은 어제 그대로였다가 오늘 줄었고, 검정 실은 어제도 오늘도 그대로였다. 이레째였다.
바늘은 세어 본 적이 없었다. 반짇고리 안쪽 종이갑을 열어 보니 다섯 개가 들어 있었고 그중 둘은 끝이 무뎌 보였다.
「9월 5일. 오늘부터 바늘도 셈. 다섯 개. 이 줄 앞은 바늘 수가 없음.」
내려가는 길에 최영숙이 종이를 건넸다. 열여덟 번째였다.
「목요일. 6시 없음. 7시 2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비 / 새것 / 슬리퍼 / 없음.」
손잡이는 열흘 연속이었다. 6:40, 7:05, 7:20, 7:40, 7:15, 7:05, 7:30, 7:25, 7:10, 7:20. 시각은 계속 오르내렸다.
하람은 그 자리에 서서 종이를 한참 보았다. 열흘이라는 숫자가 아흐레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뒷장을 펴서 스물한 줄째를 적었다.
「열흘 연속. 열흘이 되었다고 다른 일이 된 것은 아님. 아흐레와 열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음. 자릿수가 하나 늘었을 뿐임. 그래도 오늘 마음이 움직였음. 그것도 적음.」
최영숙에게 손잡이를 몇 번째 칸에서 잡으시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물어보면 최영숙이 손잡이를 보게 된다. 보게 되면 적히는 것이 달라진다.
「안 물음. 왜: 내가 물어보면 그 종이는 그때부터 내 종이가 됨.」
5. 언제부터
오후에 드릴 머리를 눕혔다.
날 세 매를 떼어 다이얼 게이지 아래에 하나씩 걸었다. 0.14밀리, 0.09밀리, 0.11밀리.
“셋 다 달라요.”
“그래서 따로 재는 거야.”
이 벌은 8월 28일에 끼웠고 그때 깊이가 532미터였다. 오늘이 574미터니까 42미터였다.
재혁이 첫 벌 값을 찾아 폈다. 2.4밀리, 1.6밀리, 1.4밀리. 그 벌은 412미터에서 484미터까지, 72미터를 팠다.
“이 벌이 덜 닳았는데요. 42미터에 0.11이면 72미터로 치면 0.19밖에 안 되잖아요.”
“치면?”
재혁이 입을 다물었다.
“닳는 건 닳을수록 빨라져. 무뎌지면 힘을 더 받고, 힘을 더 받으면 더 닳아. 반쯤 닳은 걸 두 배 한다고 다 닳은 게 나오지 않아. 그것보다 덜 나와.”
“그럼 못 견줘요?”
“42미터짜리 값이 하나 있는 거야. 오늘은 그게 다야.”
재혁이 야장을 펴고 세 칸을 그렸다. 높이, 각인 자리, 마모.
“셋 다 있어요. 오늘 처음이에요.”
“그래.”
“그런데 왜 아직 아무 말도 안 해요.”
서진이 세 칸을 차례로 짚었다.
“높이는 오늘 아침에 잰 거야. 오늘 하루짜리야.”
“네.”
“각인 자리는 지난 청소일에 조이고 나서 지금까지야. 이레치야.”
”…마모는요.”
“이 벌 끼운 날부터야. 여드레치야. 그중 하루는 청소일이라 안 팠어.”
재혁이 세 칸을 다시 보았다.
“기간이 다 달라요.”
“이 셋을 한 줄에 나란히 적어 놓으면, 나중에 보는 사람은 셋이 같은 날 걸로 알아.”
“그럼 어떡해요.”
“칸마다 언제부터인지를 옆에 적어.”
재혁이 세 칸 옆에 좁은 칸을 하나씩 더 그었다. 「오늘 아침」, 「8월 29일부터」, 「8월 28일부터, 판 날 이레」.
서진이 그 줄을 보고 말했다.
“값 옆에 언제부터를 안 적으면, 값이 아니라 그림이야.”
재혁이 게이지를 닦다가 물었다.
“0.11밀리면 쇠가 얼마나 나온 거예요?”
“몇 그램.”
“그거 어디 갔어요?”
“부스러기에 섞여 있지.”
“그럼 부족분에 넣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게가 늘었을 거 아니에요.”
“넣지 마. 그건 얼음이 아니야.”
재혁이 잠깐 생각하다가 야장에 적었다.
「커터에서 나온 쇠가 부스러기에 섞여 있음. 몇 그램. 우리 저울로는 안 보임. 안 보이는 것과 없는 것은 다름. 부족분 표에는 넣지 않음.」
입도는 그다음이었다. 커터를 재느라 시간이 밀려서, 두 종과 세 종을 다 하고 나누는 데 31분이 걸렸다. 어제까지는 24분이었다.
두 종 일곱째 날은 22와 24로 폭이 2였다. 폭 이력은 2, 2, 1, 2, 0, 2, 2였다. 세 종 셋째 날은 22, 33, 45였다.
재혁이 별지에 31분을 적었다.
“오늘 좀 오래 걸렸어요.”
“바쁜 날이었어?”
“네.”
“그럼 그렇게 적어.”
재혁이 「했음. 바쁜 날.」이라고 적었다.
“이건 왜 적어요? 했잖아요.”
“못 한 날만 바쁜 날이라고 적으면, 나중에 그 표엔 바쁜 날이 하나도 안 남아. 다 빠져 있으니까.”
“한 날에도 적어야 몇 날이 바빴는지를 알겠네요.”
“그래.”
6. 3월 14일
강릉에서 회신이 왔다.
교정 전 값 0.3, 확장불확도 ±0.2, 포함인자 2.
경옥이 그것을 두 번 읽었다.
“0.3이라고만 왔으면 0.3인 줄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요.”
“0.1일 수도 있고 0.5일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거 차이 나요?”
“0.1하고 0.5는 우리한테 다른 얘기예요.”
경옥이 3년 치 오차의 위쪽을 다시 적었다. 0.3이 아니라 0.5였다.
은재가 계산기를 들었다.
“3년이면 1년에 얼마씩이에요? 0.2를 셋으로 나누면…”
“나누지 마세요.”
“왜요?”
“폭은 그 한 번 잰 값에 붙은 거예요. 기간에 붙은 게 아니에요.”
은재가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자꾸 나누고 싶어져요.”
“나누면 뭐가 생기죠?”
”…자가 하나 더 생겨요.”
경옥이 다음 종이를 폈다. 3월 인수 계획서였다.
배는 3월 12일 도착 예정이었다. 그 다음다음 날이 3월 14일이었다.
작업일 3월 14일, 두 시간, 두 사람. 옆 연구동과 수송팀에 보내는 통보문이었다.
“3월인데 지금 보내요?”
“지금 보내야 3월에 못 한다는 말이 지금 와요.”
”…아.”
“3월에 보내면 3월에 못 한다는 말이 3월에 와요. 그러면 그날은 이미 지나가고 없어요.”
경옥이 통보문을 벽에 붙였다. 여덟째 장이었다. 아래 장 모서리에서 2센티를 어긋나게 밀어 놓았다.
통은 1,240개였고, 3월에 넉 통이 모자랐다. 옆 연구동 넉 통은 9월 28일까지 보류였다. 절단까지 스무이레였다.
불을 끄기 전에 은재가 말했다.
“저 아까 예순넷에 하나 지운 거 아까워요.”
“안 지웠어요.”
“옆에 적었잖아요. 그게 그거 아니에요?”
“둘은 아주 달라요.”
“어떻게요.”
“지운 건 안 센 게 되고, 옆에 적은 건 세 봤는데 값이 아니었던 게 돼요.”
은재가 문 앞에서 물었다.
“오늘은 뭐 한 날이에요?”
“세는 법을 먼저 정하기로 한 날이에요.”
“그것도 값이에요?”
“값은 아니에요. 자예요.”
닳는 것은 부러지는 것과 다르다. 부러지면 그날이 있다. 몇 시 몇 분에 부러졌다고 적을 수 있고, 그 앞과 뒤가 나뉜다. 닳으면 어느 날도 그날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고, 그런 날이 이레쯤 쌓이면 값이 달라져 있다. 그래서 닳는 것은 사건으로 알 수 없고 눈금으로만 안다.
값이 셋 있다고 셋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셋이 각각 언제부터의 것인지가 먼저다. 하루짜리와 이레짜리를 한 줄에 적어 놓으면 나중 사람은 둘을 같은 날 것으로 읽는다. 값 옆에 언제부터를 안 적으면 그것은 값이 아니라 그림이다.
나온 무늬를 보고 나서 그 무늬가 나올 확률을 세면, 무슨 무늬가 나와도 예순넷에 하나다. 어느 무늬를 볼지는 보기 전에 정해야 한다. 정하기 전에 센 것은 지우지 않고 옆에 적는다. 지운 것은 세지 않은 것이 되고, 옆에 적은 것은 세 봤는데 값이 아니었던 것이 된다.
못 한 날만 바쁜 날이라고 적으면 그 표에는 바쁜 날이 하나도 안 남는다. 한 날에도 바빴다고 적어야 몇 날이 바빴는지를 안다. 여러 번 꺼내 본 것이 오래 남는다고 했지만, 여러 번 꺼내 본 자리는 제일 먼저 얇아지기도 한다. 사람 안에서는 꺼낼수록 남고, 물건에서는 꺼낼수록 준다.
열흘이 되었다고 다른 일이 된 것은 아니다. 아흐레와 열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자릿수가 하나 늘었을 뿐이다.
그래도 마음이 움직였다면, 움직였다고 적는다.
부러지면 그날 안다. 무뎌지는 건 모른다.
그러니까 몇 벌 하고 나면 그냥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