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4화 - 미룸

제24화 「미룸」

1. 556미터

케이블이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이었다. 열사흘째 같은 숫자였다.

550미터에서 553미터, 553미터에서 556미터. 두 토막이었다. 철수까지 서른아홉 날이 남아 있었다.

재혁이 줄자를 폈다. 이제 묻지 않고 폈다.

첫 토막 2.95미터, 둘째 토막 2.97미터.

“어제가 2.97하고 2.94였어요.”

“적어.”

“3미터가 하나도 없네요.”

“3미터인 적이 없었을 거야.”

서진이 야장을 넘겼다. 사흘 치가 여섯 줄이었다.

“케이블로는 사흘에 18미터야. 토막을 다 이으면 17.77이고.”

“차이가 0.23이네요.”

“어제까지가 0.15였지.”

재혁이 잠깐 셈했다.

“그럼 오늘 하루에 0.08이요. 어제까지는 이틀에 0.15니까 하루에 0.075고요. 늘었네요.”

“아니.”

“수는 늘었는데요.”

“이틀 치를 둘로 나눈 건 잰 게 아니야.”

재혁이 연필을 멈췄다.

“나눈 거야. 우리가 이틀을 묶어서 재 놨으니까. 그 안에 첫날이 0.05였는지 0.10이었는지는 아무 데도 없어.”

“그건 이제 못 알아내요?”

“못 알아내. 그건 지나갔어.”

서진이 야장 여백에 한 줄을 적었다.

「8월 31일~9월 1일, 합쳐서 0.15. 날별로 못 가름. 9월 2일 0.08.」

“오늘부터는 날마다 따로 적어. 합쳐 놓은 건 나중에 못 풀어.”

부스러기는 항량까지 받쳐서 15.16킬로그램과 15.30킬로그램이었다. 계산치는 한 토막에 15.6이니까 두 토막에 31.2. 부족분은 0.74킬로그램이었다.

그저께 0.65, 어제 0.70, 오늘 0.74.

“네 점이네요.”

“네 점이야.”

“세 점보다 하나 많고요.”

“많지.”

서진이 저울에서 눈을 뗐다.

“그런데 넷이 다 오르막이면 사이가 셋이야. 셋이 다 같은 방향일 확률은 여덟에 하나고.”

“그거 낮은데요.”

“낮아. 낮은데, 낮다고 맞는 건 아니야. 열흘 채우고 얘기해.”

둘째 토막에서 헛돎이 한 번 있었다. 2초쯤이었다. 재혁이 토크 기록 옆 새 칸에 적었다.

「9월 2일. 둘째 토막. 1회. 2초쯤. 초 단위 못 잼.」

“이걸로 뭘 봐요?”

“오늘은 아무것도 안 봐. 9월 11일에 봐.”

“열흘 뒤에요.”

“열흘 뒤에. 그때까지는 적기만 해.”


2. 넷째 줄

335일째였다. 절단까지 30일이 남았다. 2호기 단독 운용은 이레째였고, 방은 영하 30.0도였다.

은재가 「쌓는 날」 종이에 넷째 줄을 적었다.

「9월 1일. 13시간 38분. 바깥 최고 29.4도. 문 2회. 반출입 없음.」

경옥이 종이를 옆으로 돌려 넉 줄을 한꺼번에 봤다.

13시간 26분, 13시간 33분, 13시간 41분, 13시간 38분.

“내려갔어요.”

“내려갔네요.”

은재가 잠깐 가만히 있다가 웃었다.

“어제 안 말하길 잘했네요.”

“잘한 게 아니에요.”

경옥이 종이를 도로 벽에 붙였다.

“안 한 거예요. 잘한 거랑 안 한 거는 달라요. 잘한 거면 오늘 내가 상을 받아야 하는데, 나는 어제 그게 오르막인지 아닌지 몰랐어요. 지금도 몰라요.”

“그래도 결과적으로는요.”

“결과적으로 맞은 걸 잘한 걸로 세기 시작하면, 다음번엔 그냥 찍어요. 찍어서 맞으면 또 잘한 게 되고요.”

경옥이 여백에 짧게 덧붙였다.

「9월 2일. 넷째 줄에서 내림. 어제 적은 줄은 안 지움.」

“그리고요, 오늘 내림이 나왔다고 어제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어제는 오르막이라고 안 하셨잖아요.”

“안 했죠. 그런데 은재 씨는 속으로 했잖아요.”

은재가 대답을 안 했다.

“속으로 한 것도 나중엔 기억이 나요. 그게 제일 안 좋아요. 종이엔 안 적혀 있는데 사람 안에는 적혀 있거든요.”

바깥 기온이 하루 사이에 0.5도 올랐다. 가동 시간은 3분 줄었다.

“기온이 올랐는데 가동이 줄었네요. 반대 아니에요?”

“반대예요.”

“그럼 뭔가 있는 거 아니에요?”

“있을 수도 있고, 3분이 그냥 3분일 수도 있고요.”

경옥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15분마다 하는 일인데, 오늘은 조금 일렀다.

“며칠 전에 우리가 열한 날 폭을 냈잖아요. 그 폭이 몇이었죠.”

“12시간 55분에서 14시간 10분이요. 1시간 15분이요.”

“3분은 그 안이에요.”


3. 여섯 달

정한은 아침에 아무 일정도 없었다. 마감 다음 다음 날이었다.

작업대 위에 아세테이트 릴 세 통이 어제 놓인 그대로 있었다. 제일 볼록한 것이 1번이었다. 번호는 순서가 아니라 상한 정도였다.

1번 통 뚜껑을 열었다. 감긴 층이 다섯 갈래로 벌어져 있었다. 어제 센 것과 같았다.

정한은 릴을 들지 않고, 옆에서 조명을 낮게 비췄다.

테이프 옆면 한 군데에 갈색 띠가 있었다. 폭이 3밀리쯤 되고, 감긴 층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몇 겹 들어가 있었다.

이음매 자국이었다.

옛날에는 테이프가 끊어지면 잘라내고 붙였다. 붙일 때는 접착 테이프를 썼다. 그 접착제가 40년쯤 지나면 물러진다. 물러지면 흐른다. 감겨 있으니까 갈 데가 옆층밖에 없다.

정한은 그것을 노트에 적었다.

「1번. 이음매 1개소 확인. 접착제가 인접층으로 옮겨 붙음. 육안으로 안쪽 5~6겹까지. 그 아래는 안 보임.」

밑에 한 줄 더 적었다.

「푸는 시도 안 함. 사유: 옮겨 붙은 접착제가 두 층을 붙여 놨을 수 있음. 당기면 자성층이 뜯김.」

이 릴은 여섯 달 전에 받았다. 그때는 통을 열고 스포크가 세 갈래인 것을 확인하고 도로 닫았다. 다른 일이 급했다. 이 일은 급하지 않았다.

여섯 달 동안 세 갈래가 다섯 갈래가 됐다.

정한은 그 사실을 처음으로 종이에 적었다.

「3월 확인 시 3갈래. 9월 1일 확인 시 5갈래. 사이 여섯 달은 관측 없음.」

그리고 그 밑에.

「미룬 동안에도 진행됨. 미룬 값은 0이 아님.」

여섯 달 전에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났다. 나중에 하자, 였다. 나중이 언제인지는 안 정했다.

정한은 1번 통을 저온 선반으로 옮겼다. 산 흡착제를 새것으로 갈아 넣고, 뚜껑은 완전히 닫지 않고 통풍이 되게 놓았다. 굽지는 않았다. 아세테이트는 구우면 안 된다.

옮기고 나서, 2번과 3번 통 옆에 종이를 한 장 붙였다.

「2번 재확인: 12월 1일. 3번 재확인: 12월 1일. 갈래 수를 셀 것.」

날짜를 적고 나니 손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제까지는 두 통이 그냥 미뤄져 있었다. 오늘부터는 12월 1일까지 미뤄져 있는 것이 됐다.

오후 3시 40분에 정한은 하던 일을 놓고 릴 케이스를 폈다. 30분이었다. 어제 정한 규칙의 둘째 날이었다.

지운 자국은 두 글자 자리에만 있었다. 셋째 자리에는 눌린 것이 없었다.

정한은 「두 글자」라고 적고 싶었다. 그러면 서른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개수가 확정되는 것이었다.

적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적었다.

「셋째 자리: 눌린 자국 없음(조명 3방향). 해석 후보 둘. ①글자가 두 자였다 ②세 자였는데 셋째 자만 약하게 눌렸다. 오늘 시점에서 둘을 가를 방법 없음.」

그 밑에.

「가르는 방법이 생기면 다시 볼 것. 방법이 생기는 날짜는 모름. 그래서 이 줄은 날짜를 못 붙임.」

날짜를 못 붙이는 미룸도 있었다. 그런 것은 못 붙인다는 사실까지 적어야 했다.

4시 10분에 정한은 케이스를 덮었다.

저녁에 새 의뢰인의 시디를 걸었다. 릴 2본과 시디 1장. 십몇 년 전에 어느 업체가 옮겨 놓은 것이었다.

정한은 시디를 듣지 않고 먼저 릴을 무보정으로 옮겼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더 오래 걸렸다. 헤드를 맞추고, 속도를 맞추고, 험을 재고, 그다음에 손을 뗐다.

“이거 잡음이 그대로인데요.”

전화기 너머에서 의뢰인이 물었다. 50대 남자였다.

“그대로 둡니다.”

“업체 것은 깨끗하던데요.”

“깨끗한 게 아니라 지운 겁니다. 얼마나 지웠는지가 아무 데도 안 적혀 있고요.”

“그럼 못 쓰는 겁니까.”

“쓰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게 아버님 목소리인지 업체 기계 소리인지를 지금은 아무도 못 가릅니다.”

정한이 잠깐 쉬었다.

“제가 무보정본을 만들어서 그 시디하고 맞대 보면, 무엇이 얼마나 없어졌는지는 나옵니다.”

“없어진 게 돌아옵니까.”

“안 돌아옵니다.”

“그런데 왜 합니까.”

“뭐가 없어졌는지는 돌아옵니다. 그것도 아는 겁니다.”


4. 월요일

스무나흘째였다. 월요일 오전이었다.

미강이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 검정 실로 다시 박은 한 뼘 자리가 상 위에 펴져 있었다.

“이거 뭐 만드시는 거예요.”

“안감.”

“뭐 안감이요.”

“조끼.”

미강이 천을 뒤집었다.

“겨울 거야. 겉은 나중에 대.”

하람이 수첩을 폈다. 앞장이었다.

「9월 2일. 조끼 안감. 겨울 것. 겉은 나중에 댄다고 하심.」

어제 만든 칸이 있었다. 「물어서 아는 것 / 보여 줘서 아는 것」이었다. 하람은 그 칸을 오늘 처음 써 보려고 했다.

쓰려다가 멈췄다.

쓰려면 물어야 했다. 물으면 어제와 같은 일을 다시 하는 것이고, 두 번 하면 시험이 됐다.

하람은 칸에 이렇게 적었다.

「9월 2일. 안 물었음. 왜: 물으려고 물으면 시험이 됨. 이 칸은 어머니가 스스로 무언가를 못 떠올리셨을 때만 채울 것.」

그리고 그 밑에.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모름. 안 오면 이 칸은 비어 있음. 비어 있는 것은 안 물었다는 뜻임.」

실패는 열한 개였다. 자리도 같았다. 부엌 0, 미싱 5, 반짇고리 6.

흰 실은 어제보다 조금 줄었고, 검정 실은 눈에 띄게 줄었다.

「흰 실. 그제 늘고 어제 줄고 오늘 줌. 검정. 어제 줄고 오늘 줌. 넷째 날.」

미강이 노루발을 내렸다.

“이거 안쪽이라고 했잖아.”

“네.”

“안쪽은 두 번 박아.”

“겉은요.”

“겉도 두 번 박는 데가 있고 한 번 박는 데가 있어.”

미강이 손끝으로 이은 자리를 눌렀다.

“안쪽은 다 두 번이야. 안 보이니까.”

“안 보이면 대충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하람은 알면서 물었다.

“안 보이는 데를 대충 하면 안 보이는 데서 뜯어져.”

“그러면요.”

“그러면 겉이 멀쩡한데 못 입어.”

하람이 그대로 적었다. 고치지도 되묻지도 않았다.

미강이 실을 끊고 천을 뒤집었다.

“정숙이가 이런 걸 잘했는데.”

하람은 시간을 묻지 않았다.

“뭘 잘하셨어요.”

“안쪽. 걔는 안쪽만 했어. 겉은 내가 하고.”

“둘이 나눠서 하셨어요?”

“나눈 게 아니라, 걔가 안쪽을 잘해.”

미강이 잠깐 웃었다.

“안쪽 잘하는 사람이 귀해. 티가 안 나거든.”

하람은 정숙의 유족 이야기를 꺼내려다 그만뒀다. 어머니를 지나가는 확인은 확인이 아니었다. 그건 보름쯤 전에 자기가 정해 놓은 규칙이었다.

수첩 뒷장을 폈다.

「스무나흘째. 정숙 이야기가 또 나왔음. 아직 유족을 안 찾았음. 안 찾은 게 아니라 못 찾은 건지, 미룬 건지를 나는 모르겠음.」

한 줄 더 적었다.

「10월 안에 시장 상인회에 한 번 감. 안 되면 안 됐다고 적음.」

날짜를 적고 나니, 그 일이 처음으로 목록이 됐다.

계단 관찰 종이는 15차였다.

「월요일. 6시 없음. 7시 3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날씨: 흐림 / 전등: 새것 / 신발: 슬리퍼 / 들고 계셨던 것: 없음.」

손잡이는 이레 연속이었다. 시각은 6시 40분, 7시 5분, 7시 20분, 7시 40분, 7시 15분, 7시 5분, 7시 30분.

하람은 이유를 대 보고 싶었다. 전등이 밝아져서라고, 다리가 나빠지셔서라고, 아니면 그냥이라고.

뒷장으로 넘겨서 8월 27일에 자기가 적어 놓은 줄을 다시 읽었다. 「관찰 조건을 바꾼 날 이후의 첫 변화는 증거가 아님.」

18줄째를 적었다.

「이레 연속. 시각은 여전히 오르내림. 아직 아무 말도 안 함. 겨울까지 적음.」

장기요양 결과는 오지 않았다. 방문 조사가 8월 25일이었으니 아흐레째였다.

「아흐레째. 없음.」

하람은 여기서 한 칸을 더 썼다.

「9월 5일까지 안 오면 전화함.」

전화를 안 하기로 한 게 아니라, 9월 5일까지 안 하기로 한 것이었다. 둘은 종이 위에서 아주 다르게 생겼다.


5. 사흘

커터 마모 실측까지 사흘이 남아 있었다. 높이는 값이 있었고 자리도 각인이 있었고, 마모만 아직 없었다.

오후에 재혁이 야장을 들고 왔다.

“저 어제 것 다시 봤는데요. 케이블하고 코어 누계요.”

“봤어.”

“이거 자가 둘이라서 벌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셋째 자를 들이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뭘 들이려고.”

“구멍이 똑바로 안 내려가면요.”

서진이 야장을 내려놨다.

“똑바로 안 내려가.”

“안 내려가요?”

“안 내려가지. 드릴이 자기 무게로 서는 건데, 얼음이 옆에서 미는 힘이 위아래로 같지가 않아. 조금씩 기울어.”

“얼마나요.”

“모르지. 여기는 재는 게 없어.”

재혁이 셈을 해 봤다.

“1도 기울면요, 556미터에서… 8센티쯤이요.”

“그쯤 되겠지.”

“그러면 그게 0.23 중에 들어 있는 거 아니에요?”

“안 들어 있어.”

서진이 종이 한 장을 끌어다 선을 두 개 그었다. 하나는 곧게, 하나는 조금 기울게.

“기울면 케이블이 길어져. 비스듬한 길로 갔으니까. 그런데 코어도 그 비스듬한 길에서 나온 거야.”

“그러네요.”

“둘 다 같이 길어져. 같은 쪽으로 같이 틀리는 건 둘을 맞대도 안 보여.”

재혁이 종이를 한참 봤다.

“그러면 우리가 자를 둘 놓은 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거네요.”

“아니. 소용은 있어. 벌어지는 건 잡아. 대신 벌어지지 않는 틀림은 못 잡아.”

“그런 게 또 있을까요.”

“있겠지. 이름을 아직 모를 뿐이야.”

서진이 야장 여백에 적었다.

「구멍 경사: 안 잼. 사유: 경사계 없음. 캠프에 장비 없음. 이 값이 없으면 깊이 두 값 모두 실제보다 큼(같은 방향). 두 값의 차로는 안 잡힘.」

“「안 잼」이요?”

“인천에서 서식 왔잖아. 「없음」 「안 잼」 「해당 없음」 세 개로 갈라 쓰라고.”

“우리도 씁니까?”

“써야지. 저쪽만 쓰면 두 표가 또 달라져.”

서진이 한 줄 더 적었다.

「경사계 반입 요청: 다음 시즌 물자 목록에 넣을 것. 올해는 못 함.」

“올해는 안 하는 거네요.”

“올해는 못 해. 그런데 안 하는 거랑은 달라.”

“어떻게 달라요.”

“안 하는 건 아무 데도 안 남아. 못 하는 건 목록에 남아. 목록에 남으면 내년에 누가 그걸 봐.”

“선배가 안 계셔도요.”

“내가 없어도.”

입도는 두 벌씩 넷째 날이었다. 체 두 종, 3분, 8월 21일과 같은 방법이었다.

첫 벌 23, 둘째 벌 21이었다. 폭이 2였다.

“어제는 1이었어요.”

“그제는 2였고. 그그제도 2였고.”

“2, 2, 1, 2네요.”

“폭에도 폭이 있어.”

재혁이 사전에 정해 둔 대로 첫 벌 23을 적고, 21은 괄호에 넣었다.

8월 21일 값은 21이었다. 오늘 첫 벌과 2 차이였다.

“이걸로는 아직 아무 말도 못 하죠.”

“못 해. 네 번 적었으니까 이제 이렇게는 적을 수 있어.”

서진이 불러 줬다.

“「이 방법으로는 2를 못 가름. 나흘 확인.」”

“못 가른다는 걸 네 번 적는 거네요.”

“네 번 적으면 그게 값이야. 다섯 번째부터는 안 적어도 돼. 그때는 방법을 바꿔야지.”


6. 9월 28일

저녁에 경옥이 보류 기록지를 폈다.

옆 연구동에서 넉 통이 와 있었다. 받을지 말지를 아직 안 정한 것이 스무 날이 넘었다. 사유는 날마다 같았고, 날마다 같은 사유를 다시 적었다.

「9월 2일. 옆 연구동 4통. 보류. 사유: 인수 서식에 처음 길이 칸 없음. 상대 기관 기록 방식 미확인. 기한: 9월 28일.」

은재가 오늘은 사유를 안 물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9월 28일은 왜 9월 28일이에요?”

“제가 정했어요.”

“근거가 있어요?”

“없어요.”

경옥이 종이를 넘겼다.

“근거가 있어서 정한 게 아니라, 날짜가 없으면 이게 영영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정했어요.”

“그러면 28일에 뭐가 달라져요?”

“아무것도 안 달라져요. 그날 제가 다시 봐야 해요. 그게 다예요.”

은재가 넉 통을 봤다. 통은 아래 칸에 따로 놓여 있었다. 라벨은 옆 연구동 것이었다.

“그 안에 든 건 그동안 가만히 있는 거죠.”

“아니요.”

경옥이 통 하나에 손을 얹었다가 뗐다.

“영하 30도에서도 얼음은 조금씩 변해요. 알갱이가 자라요. 작은 알갱이가 큰 알갱이한테 먹혀요. 아주 느리게.”

“저희 방 것도요?”

“저희 방 것도요.”

“그러면 1년을 재우는 동안에요.”

“재우는 값하고 늙는 값이 같은 날에 붙어 있어요.”

은재가 아무 말도 안 했다.

“우리가 1년을 두는 건 브리틀존이 이완돼서 안 튀게 하려고예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변화고요. 알갱이가 자라는 건 우리가 안 원하는 변화예요. 그런데 둘이 같은 시간을 써요.”

“둘 중에 하나만 고를 수는 없고요.”

“없어요. 시간을 반만 쓸 수가 없으니까요.”

경옥이 벽에 붙은 다섯 장을 봤다. 닫은 기준, 쌓는 날, 사선 기록지, 1월 빈 표, 어긋나게 겹친 두 장.

“그래서 보류가 제일 무서워요. 보류하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 같은데, 그동안 물건은 계속 가고 있어요.”

“그래도 보류는 하셔야 하잖아요.”

“해야죠. 안 하면 아무거나 받게 되니까.”

경옥이 종이를 도로 벽에 붙였다.

“그래서 날짜를 적는 거예요. 미룬 거는 날짜가 있어요. 안 한 거는 날짜가 없고요.”

「안 잼」을 130통 분량 전부에 기입한 것은 오늘 오후에 끝났다. 은재가 손목을 주물렀다.

“스물세 해 동안 빈칸이었던 거네요.”

“빈칸이었죠.”

“이제 「안 잼」이 됐고요.”

“「안 잼」이 됐어요. 값은 여전히 없어요.”

“그러면 뭐가 달라졌어요?”

경옥이 잠깐 생각했다.

“다음 사람이 그 자리를 안 지나가요.”

“네?”

“빈칸은 사람이 눈으로 그냥 넘어가요. 「안 잼」은 걸려요. 걸리면 왜 안 쟀는지를 묻고요. 물으면 다음 시즌부터는 재게 돼요.”

절단까지 30일이었다. 3월에 올 130통 중 넉 통은 아직 자리가 없었다.

경옥이 마지막으로 「쌓는 날」 종이 앞에 섰다. 넉 줄이었다.

“열 줄 되면 말씀하신다고 하셨죠.”

“열 줄 되면요.”

“그때 뭐라고 하실 건데요.”

“모르죠. 그때 가서 봐야죠.”

경옥이 불을 껐다.

“지금 뭐라고 할지를 정해 놓으면, 그건 열 줄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을 말하는 거예요.”


미룬 것과 안 한 것은 밖에서 보면 똑같이 생겼다. 둘 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난 자리다.

다른 것은 하나뿐이다. 미룬 것에는 돌아올 날짜가 붙어 있고, 안 한 것에는 아무 날짜도 없다. 날짜가 없는 미룸은 미룸이 아니라 잊기로 한 것이고, 잊기로 한 것은 잊었다는 사실조차 안 남는다.

미루는 동안에 물건이 멈춰 주는 것도 아니다. 여섯 달 동안 세 갈래는 다섯 갈래가 되고, 영하 30도에서도 알갱이는 자란다. 그래서 미룬 값은 0이 아니라 그동안 진행된 만큼이다. 무엇을 먼저 할지는 중한 순서로 정하는 게 아니라 못 기다리는 순서로 정한다.

그리고 자를 둘 놓아도 둘이 같은 쪽으로 틀리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벌어지지 않는 틀림이 있다는 것, 그것을 오늘 알았다는 것만 적어 둔다.

날짜를 못 붙이는 일도 있다. 그런 것은 못 붙인다고 적는다.

그것까지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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