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1화 - 겹침

제21화 「겹침」

1. 538미터

노트의 다섯 번째 굵은 가로줄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어제 그은 줄이었고, 어제는 아무것도 파지 않은 날이었다.

재혁이 그 빈자리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케이블이 내려갔다. 23분. 열흘째 같은 시간이었다. 올라오는 데 22분.

532미터에서 535미터, 535미터에서 538미터. 두 토막이었다. 철수까지 마흔이틀이 남아 있었다.

새 날로 판 첫날이었다. 어제 오후에 세 매를 갈아 끼우고, 다이얼 게이지로 높이를 0.02밀리 안에 맞추고, 뿌리 쪽 평평한 면에 1과 2와 3을 새겨 둔 그 세 매였다.

“오늘 게 처음이에요. 높이도 재 놓고, 자리도 새겨 놓고, 마모도 잴 거고.”

“세 개가 다 있는 첫 값이지.”

“그럼 오늘부터는 알 수 있는 거죠? 마모가 날 탓인지 높이 탓인지.”

“오늘은 몰라.”

재혁이 장갑 낀 손을 멈췄다. 서진이 이어 말했다.

“높이는 어제 재 놨고 자리는 새겨 놨는데, 마모는 아직 없잖아. 엿새는 갈아야 잴 게 생겨. 지금은 세 개 중에 두 개가 있는 거야.”

“두 개면 반 이상인데요.”

“두 개로는 아무 말도 못 해. 세 개가 다 있어야 말이 돼. 오늘 한 줄은 나중에 쓸 줄이야.”

부스러기를 체에 받쳐 액을 빼고, 항량이 될 때까지 두었다가 쟀다. 마른 무게가 15.26킬로그램, 15.29킬로그램. 토막당 계산치는 15.6킬로그램이었다.

“0.34하고 0.31이요. 합쳐서 마이너스 0.65.”

재혁이 숫자를 적다가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노트를 뒤로 넘겼다. 한참 넘겼다. 여드레 전 페이지에서 멈췄다.

“지난번 새 날 첫날은 마이너스 0.5였는데요. 오늘이 0.65면 늘어난 거잖아요.”

서진이 넘겨진 페이지를 내려다봤다.

“그때는 젖은 걸 재서 액을 빼고 계산한 값이야. 오늘은 체에 안 내리고 항량까지 말린 값이고.”

”…….”

“그 사이에 굵은 줄이 세 개 있어.”

재혁이 페이지를 도로 넘겼다. 넘기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가 두 개네요.”

“그렇지.”

“그럼 오늘 이 값은 뭐하고 견줘요?”

“내일하고.”

재혁이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드레 전에는 같은 말을 듣고 억울해했었다.

체에 안 내리고 액이 그칠 때까지 걸린 시간은 69분과 77분이었다. 그저께가 74분과 83분이었다.

“짧아졌는데요.”

“적어.”

“이유는요.”

“안 적어.”

재혁이 「69분 / 77분. 이유 안 적음.」이라고 쓰고 나서 잠깐 있다가 덧붙였다.

“근데 이것도 줄 아래 아니에요? 날이 바뀌었으면 부스러기가 달라졌을 거고, 액이 빠지는 시간도 달라졌을 거잖아요.”

서진이 연필을 놓았다.

“그러네.”

별지의 「자를 바꾼 날」 목록 옆에, 서진은 세로줄을 하나 더 그어 칸을 둘로 나눴다. 왼쪽에 「끊긴 표」, 오른쪽에 「안 끊긴 표」라고 썼다.

왼쪽에는 세 줄이 들어갔다. 무게. 액 비율. 체 안 내림 시간.

오른쪽은 비어 있었다.

“뭐 넣어요?”

“넣을 게 있으면 넣어.”

재혁이 오른쪽 칸을 한참 봤다. 시추동 안은 언제나 영하 25도였고, 입김이 노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입도요.”

“오후에 해.”

2. 열두 번째 날

332일째였다. 절단까지 33일이 남아 있었다. 방을 한 대로만 재는 나흘째였다.

2호 기록계는 영하 30.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재가 적산시간계를 읽었다. 어제, 8월 29일의 압축기 가동 시간은 13시간 26분이었다.

옆 칸에 그날의 조건을 적었다. 바깥 최고기온 29.1도. 문 여닫이 2회. 반출입 없음.

“들어가요.”

“뭐가요.”

“조건이요. 28도에서 30도 사이, 문 두 번 이하, 반출입 없음. 어제가 다 맞아요.”

경옥이 벽에 붙은 종이를 봤다. 3년 치 기록에서 그 조건에 맞는 날을 골라낸 표였다. 적산시간계를 갈아 끼운 뒤로 한정하면 열한 날이었고, 그 열한 날의 가동 시간은 12시간 55분에서 14시간 10분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13시간 26분은 그 안쪽이었다.

“안 나갔네요.”

“네.”

“그럼 아무 일 없는 거네요.”

경옥이 고개를 저었다.

“폭 안에 있다는 건 아무 일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폭이 못 잡는 크기의 일은, 있어도 안 보여요.”

은재가 연필 끝을 종이에 댄 채로 물었다.

“그럼 어제 값을 이 표에 넣어요? 열두 번째 날로.”

“넣지 마세요.”

“왜요. 조건이 맞잖아요.”

“조건은 맞아요. 근데 우리가 방금 그 값을 이 표로 판정했어요.”

은재가 연필을 뗐다.

“판정에 쓴 값을 그 표에 도로 넣으면, 다음 달에는 자기가 자기 기준이 돼요. 그러면 뭘 넣어도 안 나가요. 표가 자꾸 자기를 닮아 가요.”

“그럼 어제 값은 어디에 적어요.”

“밑에 한 장 더 붙여요.”

은재가 새 종이를 꺼내려다 물었다.

“이렇게 조건을 맞추면 쓸 수 있는 날이 자꾸 줄잖아요. 3년 치가 열한 날이 됐는데, 앞으로도 조건을 더 붙이면 하나도 안 남을 텐데요.”

“남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그럼요.”

“서로 말이 되는 게 목적이에요. 서른 날이 있는데 그 서른 날이 다 다른 날이면, 그건 서른 개짜리 표가 아니라 서른 개짜리 이야기예요.”

은재가 잠깐 있다가 새 종이를 꺼냈다. 위쪽 종이에는 「기준: 열한 날. 적산시간계 교체 이후. 여름 조건.」이라고 이미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은재가 한 줄을 더 적었다.

「닫음. 8월 30일.」

“12월에 강릉이 같은 데서 교정을 받아 오면 그때 다시 열어요. 그 전에는 안 고쳐요.”

“고치면요.”

“기준을 자꾸 고치면 기준이 아니에요.”

새 종이 맨 위에는 「기준 정한 뒤로 쌓는 날」이라고 썼다. 첫 줄이 어제 것이었다.

1월 조건으로 고른 스무 날짜리 표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 만들 자리만 비워 두고, 그 빈자리에 「1월 표 자리. 아직 없음.」이라고 적어 두었다.

“안 합쳐요?”

“합치면 서른한 개짜리 표가 생기는 게 아니에요. 열한 개짜리하고 스무 개짜리가 둘 다 없어져요.”

3. 한 장

이관 마감 하루 전이었다. 파일은 사흘 전에 이미 세 벌이 되었고, 매체는 두 종류였고, 한 벌은 다른 도시에 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넉 장짜리 종이가 봉투에 안 든 채로 놓여 있었다. 잰 것. 못 본 것. 문턱. 그리고 답.

아침에 등기가 왔다. 의뢰인이 보낸 것이었다.

볼펜으로 쓴 가계부 두 장과, 연필로 쓴 종이 한 장이었다. 1994년 날짜가 찍힌 약봉투 뒷면이었고, 글자는 열두 자였다.

정한은 그것을 유리판 위에 놓고 낮은 각도로 조명을 넣었다. 연필로 눌러쓴 자국이 얕게 살아 있었다.

릴 케이스 옆면의 압흔과 나란히 놓았다. 그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겹쳐 볼 수는 있는데요.”

전화기 너머로 의뢰인이 숨을 골랐다.

“같은 글자여야 겹쳐집니다. 저쪽은 무슨 글자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글자 모양은 못 봐요. 획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디서 힘을 주는지, 그 버릇만 봅니다.”

“그럼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는 안 됩니다.”

“비슷하면 된 거 아닙니까.”

정한은 유리판 위의 열두 자를 내려다봤다.

“사람 글씨는 그 사람 안에서도 흔들립니다. 아침에 쓴 거하고 저녁에 쓴 거가 다르고, 앉아서 쓴 거하고 서서 쓴 거가 다릅니다. 그 흔들리는 폭보다 작은 차이는 남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 손입니다.”

”…….”

“그런데 아버님 글씨가 이 댁 어른 안에서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제가 모릅니다. 지금 제 손에 있는 게 한 장이라서요. 한 장이면 그 사람의 폭이 없습니다.”

수화기가 조용했다.

“게다가 이건 1994년이고 저건 1983년입니다. 열한 해 차이가 납니다. 그 사이에 사람 손도 늙습니다.”

“그래도 눈으로 보면 비슷한데요. 제가 봐도 비슷합니다.”

“비슷한 건 저도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이 댁 어른 글씨를 열두 자 봤습니다. 열두 자를 보고 비슷하다고 말하면, 그 말이 먼저 가서 앉습니다. 나중에 진짜 자료가 나와도 그때는 이미 비슷하다는 데서부터 보게 됩니다.”

”…….”

“제가 서른다섯 해 하면서 제일 많이 고친 게 그겁니다. 짐작을 먼저 말하는 버릇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83년 무렵에, 연필로, 여러 장 쓰신 게 있으면 보내 주십시오. 석 장이면 석 장을 서로 대 봐서 이 어른의 폭을 먼저 잽니다. 그다음에 저쪽하고 겹칩니다.”

“없으면요.”

“없으면 못 합니다. 지금 저한테 필요한 건 답이 아니라 표본입니다.”

정한은 넉 장짜리 종이에 다섯째 장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종이 한 장에 필요한 것 세 가지만 적어 봉투에 같이 넣었다. 1983년 무렵. 연필. 여러 장.

오후에 동규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턱을 0.05씩 옮기며 개수를 다 적어 놓은 표에 두 사람 이름을 나란히 넣자고 했다.

“이름을 나란히 넣으면 값도 합칩니까.”

“안 합칩니다. 선생님 문턱은 1.2로, 제 문턱은 1.3으로, 각자 이름 옆에 그대로 적습니다.”

“그러면 표가 지저분해지는데요.”

“합치는 게 아닙니다. 겹쳐 놓는 겁니다.”

정한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겹쳐 놓으면 어디가 어긋났는지가 보입니다. 합쳐 버리면 안 보이고요.”

봉투는 다섯 시에 나갔다. 원본 릴은 통풍 선반에 그대로 있었다.

이관 마감은 내일이었다. 판독에는 마감이 없었다.

4. 시침

금요일 저녁이었다. 어제 온 비가 그쳐 계단이 말라 있었다. 스무하루째였다.

미강은 낮은 상 앞에 앉아 있었다. 천 두 장이 겹쳐 놓여 있었고, 겹친 자리를 따라 흰 실이 성글게 지나가고 있었다. 땀이 크고 듬성듬성했다.

어제는 검정 실로 세 땀이었다.

“뭐 만드세요.”

“몰라. 손이 하는 거지.”

하람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성글게 하세요. 어제는 촘촘했잖아요.”

미강이 바늘을 든 채로 대답했다. 대답이 바로 나왔다.

“이건 시침이야. 시침은 붙이는 게 아니야. 안 밀리게만 두는 거지.”

”…….”

“박고 나면 뽑아 버려.”

하람은 그 말을 수첩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고쳐 적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실패는 열한 개였다. 부엌 서랍에 없고, 미싱 서랍에 다섯, 반짇고리에 여섯. 어제와 같았다.

수도 같고 자리도 같았다. 하람은 「변화 없음」이라고 적으려다가 검정 실패를 집어 들었다.

실이 줄어 있었다. 어제보다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수는 적었고 자리도 적었는데, 양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람은 수첩을 펴고 새 줄을 그었다.

「8월 30일. 오늘부터 실 양도 봄. 이 줄 앞은 실 양이 없음.」

적고 나서 자기가 그은 줄을 잠깐 봤다. 그 줄 앞의 사흘치가 갑자기 다른 종류의 기록처럼 보였다.

여덟 시 반에 최영숙이 종이를 가지고 내려왔다. 새 양식으로 처음 받는 것이었다.

「금요일. 6시 없음. 7시 4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날씨: 갬. / 전등: 새것. / 신발: 슬리퍼. / 들고 계셨던 것: 없음.」

손잡이는 나흘째였다.

하람은 네 날을 나란히 놓아 봤다. 화요일은 6시 40분에 맑았고, 수요일은 7시 5분에 맑았고, 목요일은 7시 20분에 비가 왔고, 오늘은 7시 40분에 갰다. 전등은 나흘 다 새것이었고, 신발은 오늘 처음 적혔다.

나누고 싶어졌다. 비 온 날과 안 온 날로, 슬리퍼와 아닌 날로.

나누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자기 손으로 적어 놨다. 점이 넷인데 조건이 넷이면 점이 하나씩이다.

「안 나눔. 왜: 지금 나누면 칸마다 하나씩 들어감. 계속 적어 두고 겨울에 나눔.」

장기요양 결과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방문 조사를 받은 지 엿새째였다. 그것도 한 줄로 적었다.

돌아가려고 일어서는데 미강이 상 위를 가리켰다.

“이거 다 하면 뽑아야 되는데.”

“제가 뽑을게요.”

“네가 어떻게 알아. 어디가 시침인지.”

“흰 실이요.”

미강이 잠깐 하람을 봤다.

“그래. 흰 실이야.”

5. 스물셋과 스물하나

오후에 재혁이 쟁반 두 개를 가지고 왔다.

부스러기를 원뿔로 쌓고 십자로 갈라 마주 보는 두 무더기를 합쳤다. 사분법이었다. 그렇게 반으로 줄인 것을 다시 원뿔로 쌓고 또 십자로 갈랐다.

“두 벌로 나눌게요.”

서진이 쳐다봤다.

“왜.”

“우리 방법이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모르면, 나온 차이가 얼음 차이인지 우리 손 차이인지 모르잖아요.”

서진이 아무 말도 안 했다. 재혁은 그 침묵을 못 알아들은 척하고 체를 꺼냈다. 눈 1밀리와 0.25밀리, 두 종이었다. 3분씩 흔들었다. 여드레 전에 하던 그대로였다.

첫 벌에서 고운 쪽이 23퍼센트, 둘째 벌에서 21퍼센트가 나왔다.

“차이 2요.”

“네 손 폭이 2야.”

재혁이 노트를 뒤로 넘겼다. 8월 21일. 새 날로 판 첫날. 그날의 값은 21퍼센트였다.

“오늘이 23이고 그때가 21이면…….”

“차이가 2지.”

“제 폭이 2고요.”

“그러면.”

“못 갈라요.”

재혁이 연필 끝으로 오늘 값 두 개를 짚었다.

“근데 이 2도 두 번 재서 나온 건데요. 두 번 던진 거잖아요.”

“그렇지.”

“그럼 이것도 못 믿는 거 아니에요?”

“못 믿는 게 아니라, 이게 제일 좁게 나온 거야. 더 재면 넓어지지 좁아지진 않아.”

재혁이 그 말을 한 번 되짚었다.

“그러면 실제 폭은 2보다 크거나 같고, 오늘하고 그날 차이는 2고요. 그러면…….”

“더 확실하게 못 갈라.”

재혁이 연필로 그 숫자들을 한 번씩 짚었다. 그러다 그 아래 이틀치에서 멈췄다. 21, 21, 22.

“이거 사흘 동안 거의 안 움직였잖아요. 폭이 1이었어요.”

“그런데 네 손 폭은 2야.”

”……사흘 폭이 제 손 폭보다 좁아요.”

“세 번 던져서 그렇지.”

재혁이 그 세 숫자를 한참 봤다. 그때는 그 세 점이 나란한 게 뿌듯했었다. 커터가 안 무뎌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럼 그때 저 그거 곡선으로 읽었네요.”

“읽었지.”

재혁은 지우지 않았다. 그 대신 세 숫자 옆에 새로 한 줄을 적었다.

「8월 21~23일 21 / 21 / 22에는 폭이 없음. 그날은 한 벌씩만 쟀음. 이 줄은 8월 30일에 적음. 지운 것 없음.」

“오늘부터 입도는 두 벌이야.”

“그럼 잴 수 있는 값이 반으로 줄어요.”

“줄지. 남는 값에는 폭이 붙고.”

재혁이 체를 정리하다가 손을 멈췄다.

“근데요.”

“응.”

“오늘부터 두 벌로 재면, 이것도 끊기는 거 아니에요? 방법이 바뀐 거잖아요. 아침에 안 끊긴 표라고 적어 놨는데.”

서진이 체를 든 채로 서 있었다. 오래 서 있었다.

“안 끊겨. 두 벌 중에 첫 벌은 예전에 하던 거하고 똑같으니까.”

“그럼 옛날 거하고 견줄 때는 평균 안 쓰고요?”

“첫 벌만 써. 둘 다 적고, 견줄 때는 첫 벌.”

“평균이 더 정확하지 않아요?”

“오늘 값을 보고 어느 걸 쓸지 고르기 시작하면, 그건 재는 게 아니라 고르는 거야. 어느 걸 쓸지는 재기 전에 정해 놔야 해.”

「안 끊긴 표」 칸에는 그날 한 줄이 들어갔다. 입도. 그리고 그 옆에 괄호를 치고 「단, 오늘부터 두 벌. 옛날과 견줄 때는 첫 벌만 씀. 재기 전에 정함.」이라고 적혔다.

인천에서 회람이 하나 왔다. 규정 개정안 초안이었고, 첫머리에 재혁이 쓴 문장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재혁은 그 줄을 두 번 읽고 노트를 덮었다.

6. 두 장

저녁에 은재가 벽 앞에 서 있었다.

종이 두 장을 들고 있었다. 위는 기준이 된 열한 날의 표였고, 아래는 어제부터 쌓기 시작한 새 표였다.

경옥이 테이프를 잘라 왔다.

“겹쳐 붙일게요.”

은재가 두 장의 모서리를 맞춰 들었다. 경옥이 아래 장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었다. 모서리가 2센티쯤 어긋났다.

“삐뚤어요.”

“맞춰 붙이면 한 장으로 보여요.”

은재가 손을 뗐다. 어긋난 채로 테이프가 붙었다. 옆에서 보면 두 장인 게 그냥 보였다.

“겹쳐 놓은 두 장은 언제 한 장이 돼요?”

“안 돼요.”

“영영요?”

“돼도 안 돼요. 한 장이 되면 어느 게 기준이었는지가 없어져요.”

옆 연구동 넉 통은 그대로 보류였다. 「8월 30일. 여전히 보류. 사유 같음. 기록계 1호 복귀 9월 28일.」 같은 사유가 날마다 한 줄씩 늘고 있었다.

3월에 올 130통 중 넉 통은 아직 자리가 없었다. 그것도 어제와 같았다.

통은 1,240개였다. 절단까지 33일이 남아 있었다.

은재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15분마다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겹치는 건 종이뿐이네요.”

“네.”

“얼음은요.”

“얼음은 안 겹쳐요.”

경옥이 선반 쪽을 봤다. 아래 칸에는 알루미늄 통이 줄지어 있었고, 위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한 번 녹으면 그 자리에 다시 못 놔요. 그래서 종이를 겹치는 거예요.”


겹친다는 것은 두 개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두 개인 채로 나란히 눌러 두는 일이다. 모서리를 맞춰 붙이면 한 장으로 보이고, 한 장으로 보이면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가 없어진다. 그래서 일부러 어긋나게 붙인다.

표본이 하나면 그 사람의 폭이 없다. 폭이 없으면 남과의 차이를 말할 수 없고, 차이를 말할 수 없으면 비슷하다는 말도 쓸 데가 없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표본이다.

기준으로 쓴 것에는 오늘 값을 넣지 않는다. 넣으면 표가 조금씩 자기를 닮아 가고, 닮아 간 표는 무엇을 대 봐도 안 나간다.

어느 값을 쓸지는 값을 보기 전에 정해 둔다. 보고 나서 정하면 그것은 재는 일이 아니라 고르는 일이다.

시침은 붙이는 것이 아니다. 안 밀리게만 두는 것이다. 다 박고 나면 뽑아 버릴 실이고, 뽑힐 것을 알면서 굳이 성글게 한 땀씩 놓는다.

그날 네 자리에서 사람들은 각자 두 장을 겹쳐 보았다.

한 장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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