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8화 - 셈

제18화 「셈」
1. 526미터
이레째 같은 시간이 나왔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520미터에서 523미터, 523미터에서 526미터. 철수까지 마흔닷새, 안 파는 날까지 이틀.
체를 안 내리고 재는 것은 이틀째였다. 첫 토막이 81분, 두 번째가 76분. 어제는 78분과 71분이었다.
마른 무게는 15.00과 14.97. 계산치는 토막당 15.6이니까 부족분이 0.60과 0.63, 오늘 합쳐서 1.23킬로그램이었다.
재혁이 노트를 들고 서진 옆에 섰다.
“어제가 1.21이고 오늘이 1.23이에요.”
“그래.”
“0.02 차이예요. 저울 재현성이 0.05니까, 이건 같은 거죠.”
“같다고 하지 마.”
“그럼 뭐라고 해요.”
“못 가른다고 해.”
재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 한 줄을 더 적으려다가 서진을 봤다.
“그러니까 우리 값이 하루에 0.02쯤 흔들린다는 거잖아요.”
서진이 장갑을 벗다 말고 멈췄다.
“두 번 던져서 둘 다 앞면 나온 거하고 같은 소리야.”
“네?”
“폭이라는 게 뭐야. 여러 번 재서 제일 큰 거하고 제일 작은 거 사이잖아.”
“네.”
“두 번 재면 그 두 개 사이가 폭이야. 세 번 재면? 셋째가 그 사이에 들면 폭은 그대로고, 밖으로 나가면 넓어져.”
재혁이 잠깐 생각했다.
“좁아지지는 않네요.”
“절대 안 좁아져. 열 번 재면 더 넓어. 백 번 재면 또 더 넓고.”
서진이 노트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값이 넓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가 넓은 데를 늦게 보는 거야. 적게 재면 늘 좁게 나와. 늘.”
“그럼 0.02는요.”
“두 번 잰 두 개 사이라는 뜻밖에 없어. 그거 말고 다른 뜻은 아직 없어.”
그날의 규칙이 한 줄 늘었다. 같은 방법으로 열흘을 채우기 전에는 산포를 말하지 않는다. 그 전 값은 값으로만 적고 폭으로 쓰지 않는다.
재혁이 노트 뒤쪽을 넘겼다. 오월부터의 토막 수를 세어 보려던 참이었다.
“반장님, 지금까지 부족분 누계가 얼마나 돼요?”
“못 내.”
“왜요.”
“자가 네 번 바뀌었어.”
젖은 무게로 재던 때가 있었고, 30분 받침으로 재던 때가 있었고, 항량으로 바꾼 날이 있었고, 그저께 체를 안 내리기로 한 날이 있었다. 굵은 가로줄이 네 개였다.
“그럼 오월부터 판 건 어떡해요.”
“그건 그때 방법으로 잰 값이야. 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표야.”
새 누계는 8월 26일부터 시작한다고 적었다. 그 앞은 앞대로 두었다.
“모레가 바닥 훑는 날이죠.”
“그래.”
“그럼 모레면 알아요?”
“뭘.”
“1.2가 어디로 가는지요.”
서진이 웃었다.
“갈 데가 셋이야. 통 밖으로 새는 거, 구멍 벽에 붙는 거, 바닥에 가라앉는 거. 모레는 그중에 가라앉은 것만 잴 수 있어.”
“그럼 답이 안 나오네요.”
“셋 중에 하나를 잴 수 있는 날이야. 그것도 큰 날이야.”
2. 영하 30.1도
329일째. 첫 절단까지 서른엿새. 기록계 1호가 나간 다음 날이었고, 방을 한 대로 재는 첫 평일이었다.
은재가 아침에 2호를 읽고 −30.1을 적었다. 그러고 손이 멈췄다.
서식에는 칸이 셋이었다. 1호, 2호, 차이.
“칸이 셋인데 하나만 차요.”
“비우지 마세요.”
경옥이 곁으로 왔다.
“사선을 그으세요. 두 칸 다.”
“왜요?”
“비워 두면 깜빡한 걸로 보여요. 그으면 없는 걸로 보이고요.”
은재가 자를 대고 두 칸에 사선을 그었다. 그으니까 표가 갑자기 다른 물건처럼 보였다.
“한 대로 재는 게 그렇게 나빠요? 값은 나오잖아요.”
“값이 나오는 게 나쁜 거예요.”
“네?”
“고장 난 계기는 값을 안 줘요. 그러면 사람이 조심해요. 그런데 밀린 계기는 값을 줘요. 태연하게 줘요.”
경옥이 벽의 2호를 올려다봤다.
“저게 오늘부터 하루에 백분의 일 도씩 밀려도, 우리는 한 달 내내 정상인 표를 만들어요. 그 표가 서른 날짜리 거짓말이에요.”
“어제까지는 서로 물었잖아요.”
“어제까지는 어긋나면 뭔가 변했다는 건 알았어요.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요.”
은재가 종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뭘 해요.”
“얼음물 0점은 주에 한 번 보고요. 그거 말고 하나 더 봐요.”
경옥이 기계실 문을 열고 압축기 적산시간계를 가리켰다. 눈금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는 계기였다.
“가동률이요.”
“그게 온도랑 무슨 상관이에요.”
“방이 같은 온도면 압축기가 도는 시간 비율도 대체로 같아요. 계기가 밀리면 설정에 맞춘 진짜 온도가 달라지고, 그러면 도는 시간이 달라져요.”
“그건 온도계가 안 알려 주는 거네요.”
“그게 중요해요.”
경옥이 은재를 봤다.
“온도는 저 계기가 말해 줘요. 가동률은 저 계기가 말 안 해요. 서로 다른 데서 오는 거라야 검산이 돼요. 같은 데서 온 두 개는 백 번 맞아도 확인이 아니에요.”
“그런데 가동률은 바깥 기온에도 움직이잖아요. 문 여닫이에도요.”
“그러니까 옆에 같이 적어요. 바깥 기온, 문 연 횟수, 시료 반출입. 안 적으면 왜 움직였는지를 몰라서 못 써요.”
은재가 어제 치를 읽었다. 24시간 중 13시간 20분이었다.
“오늘 건요?”
“내일 알아요.”
「가동률 첫 값. 8월 26일분 13시간 20분. 비교 대상 없음. 기입자 노은재.」
적고 나서 은재가 종이를 내려다봤다.
“오늘 적은 건 오늘 쓰는 게 아니네요.”
“네.”
“이런 걸 스물세 해 동안 안 적으셨어요?”
경옥이 잠깐 가만히 있었다.
“두 대가 있었으니까요.”
한 가지는 덧붙여 적었다. 가동률로 온도를 고치지는 않는다. 온도가 안 움직였는데 가동률이 움직인 날, 그 날만 본다. 반대로는 쓰지 않는다.
3. 못 본 것
마감까지 나흘이었다.
정한이 보고서 네 번째 칸을 새로 만든 것은 어제였다. 판독한 것, 짐작한 것, 틀린 짐작, 그리고 못 본 것.
앉아서 반 시간 동안 한 글자도 못 적었다.
못 본 것을 적으려면 그게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있다는 걸 알면 그건 이미 못 본 게 아니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이 칸이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점심을 먹고 와서 정한이 종이를 뒤집었다. 그리고 물건이 아니라 방법을 적기 시작했다.
저각도 조명. 여덟 방향, 45도 간격. 조명 방향과 나란히 그은 획은 그림자가 안 생긴다. 여덟 방향으로 찍었어도 획이 그 45도 사이에 딱 들어가면 두 방향에서 다 약하게 나온다. 못 봤을 수 있다.
투과광. 접착 구간은 통째로 안 보인다. 종이가 얇게 다져진 자리, 그러니까 살짝 눌린 획은 통과광에서 차이가 안 난다. 못 봤을 수 있다.
마이크로미터. 0.1밀리미터보다 작은 차이는 못 읽는다. 종이 결과 눌린 자국을 구별 못 한다. 그래서 대조군을 잰다. 그래도 겹치는 데가 있다.
현미경 교차점. 획이 서로 안 겹치는 글자는 선후를 못 가린다. 겹치는 데가 없으면 방법 자체가 안 걸린다.
다 적고 나서 정한이 맨 위에 한 줄을 썼다.
「제가 무엇을 못 봤는지는 모릅니다. 제 방법이 무엇을 못 보는지는 압니다. 아래는 그 목록입니다.」
못 본 것은 물건 목록이 아니었다. 방법 목록이었다.
오후에 뒷면을 다시 봤다. 그저께 뒷면 볼록에서 1.6밀리미터 틈을 하나 더 찾았고, 그걸로 덩어리가 최소 넷이 되는 줄 알았다.
동규의 편지가 어제 그 밑을 파냈다. 남의 대조군은 내 대조군이 아니다. 그러면 뒷면 대조군은 어디 있나. 뒷면에 있었다.
정한이 케이스 뒷면 중에서 아무것도 안 쓴 구간 세 군데를 같은 조명, 같은 배율로 재고 볼록의 헛간격을 뽑았다. 1.2, 1.4, 1.1이었다.
앞면 헛간격은 최대 1.1이었는데 뒷면은 1.4였다. 눌린 것이 반대편으로 나오면서 넓게 퍼진 탓이었다.
1.6은 여유가 0.2뿐이었다.
“어제는 하나 늘었다고 좋아했는데.”
정한이 혼잣말을 하고 지우개를 들었다가 도로 놨다. 지우는 대신 옆에 적었다. 뒷면 1.6, 대조군 1.4, 여유 0.2, 약함.
최종 줄은 이렇게 됐다. 앞면 기준 덩어리 둘 또는 셋. 왼쪽 끝 하나는 미상. 오른쪽 못 본 폭 3.2밀리미터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최대 하나.
그러니까 최소 둘, 최대 다섯이었다.
정한이 그 줄을 오래 봤다. 서른다섯 해 동안 세 글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세 자는 이 범위 안에 있습니다. 맞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맞았다는 것을 제가 모르는 채로 맞는 것입니다.」
동규에게 갈 봉투에는 자기 종이의 대조군 세 값을 적어 넣었다. 0.9, 1.1, 0.8. 그리고 한 줄.
「이건 판정이 아니라 잰 것입니다. 그래서 보냅니다.」
4. 열한 개
화요일 아침, 열여드레째였다.
하람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실패를 셌다. 어제 최영숙의 종이에 손에 뭘 들고 계셨다고, 실패 같은 거였다고 적혀 있었다. 하람은 그 밑에 실패는 이 집에 여러 개 있다고, 같은 것인지는 안 봤다고, 내일 세어 놓겠다고 적었었다.
미싱 서랍에 넷. 반짇고리에 셋. 장롱 위 상자에 둘. 부엌 서랍에 하나. 텔레비전 밑에 하나.
열한 개였다. 그중 검정 굵은 실이 감긴 것이 하나. 어제 어머니가 감은 것이었다.
“그거 왜 세니.”
미강이 상 건너편에 앉으며 물었다.
“많은가 해서요.”
“많지. 하나씩 사다 보면 많아져.”
미강이 실패 하나를 집어 들고 손바닥에 굴렸다.
“근데 쓰는 건 늘 하나야.”
그러고는 그 실패를 하람 쪽으로 밀었다.
“이건 니 거.”
하람은 그게 자기 것이었던 기억이 없었다. 고치지 않았다. 받아서 상 위에 놨다.
셈이 끝나고 수첩에 열한이라고 적으려다가 하람이 멈췄다. 그리고 열한 개마다 어디 있었는지를 옆에 적었다.
수만 적으면 하나가 자리를 옮겨도 여전히 열한 개였다.
적으면서 하람은 자기가 어제 무엇을 못 했는지 알았다. 어제 세어 놨으면 어제 든 것이 이 열한 개 중 하나였는지, 아니면 열두 번째였는지 오늘 알 수 있었다. 오늘 센 것은 오늘 쓰는 게 아니었다.
「어제 것은 영영 모름. 오늘부터는 안다.」
저녁에는 가지 않았다. 전등을 갈고 나서의 첫 저녁이었고, 조건을 또 바꾸고 싶지 않았다.
최영숙의 종이는 밤 아홉 시에 왔다.
「화요일. 6시 없음. 6시 40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손에 든 것 없었음.」
손잡이였다. 열이레 동안 안 잡으셨던 것이었다.
하람은 그 줄을 세 번 읽고, 좋아하려는 자기를 붙들었다. 어제 수첩 뒷장에 미리 적어 둔 줄이 거기 있었다.
「8월 26일 오후 4시. 계단 참 전등을 밝은 것으로 바꿨다. 내가 바꿨다. 앞으로 손잡이를 잡으시면 그건 밝아져서일 수도 있다.」
오늘 줄은 그 밑에 붙였다.
「8월 27일. 손잡이 잡으심. 단 어제 내가 전등을 갈았음. 이 한 줄은 증거가 아님.」
적고 나서 하람이 오래 앉아 있었다.
어제 그걸 안 적어 놨으면, 오늘 이 줄을 좋아했을 것이다. 좋아하고 나서는 다시는 의심 안 했을 것이다.
손에 든 것이 없었다는 줄도 옮겨 적었다. 실패 열한 개는 오늘 저녁까지 다 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안 들고 나가셨다는 것까지가 오늘 아는 전부였다.
어제 든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었다.
수첩 뒷장 열한 줄째가 그렇게 적혔다.
5. 1과 2와 3
오후에 커터 날에 번호를 새겼다.
붙어 있는 채로 새겨야 어느 자리 날인지가 남았다. 떼고 나서 새기면 세 장이 다 똑같이 생겨서 순서가 없어졌다.
재혁이 각인기를 들고 날 끝으로 가져가는데 서진이 손목을 잡았다.
“거기 말고.”
“끝이 잘 보이는데요.”
“거기가 깎는 자리야.”
서진이 날을 뒤집어 뿌리 쪽 평평한 면을 짚었다.
“거기다 새기면 두 가지가 나빠. 마모되면서 표시가 없어지는 게 하나.”
“다른 하나는요.”
“표시가 마모를 바꿔. 새긴 자리는 살짝 파여 있으니까 힘이 거기서 달라져.”
재혁이 각인기를 뿌리 쪽으로 옮겼다.
“재는 자리에는 표시 안 해요.”
“응. 표시가 값을 바꾸면 그건 표시가 아니야.”
융해 분리는 오늘도 규정대로 했다. 설정 2로 녹이고, 완전히 녹고 30분 두고, 걷고, 30분 더 두고 다시 걷었다.
1차 0.61에 2차 0.21, 합쳐 0.82퍼센트였다. 어제는 0.85였다.
그리고 재혁이 세 번째를 또 걷었다. 규정 밖이었다. 0.06이 더 나왔다. 어제 세 번째는 0.05였다.
“두 번 했으니까 이제 두 점이에요.”
“규정 밖 두 점이지.”
“그것도 표예요?”
“규정 밖 표야. 그 표도 표는 표고.”
서진이 다른 종이를 꺼내서 따로 적었다. 규정 외 관측, 3회차, 8월 26일 0.05, 8월 27일 0.06.
“이걸 왜 남겨요? 규정은 안 바꿀 거잖아요.”
“오늘은 안 바꿔. 언젠가 바꿀 때 이 종이가 근거가 돼.”
“지금 바꾸면요.”
“근거 없이 바꾸는 거지. 우리가 그거 하고 있잖아, 이미.”
인천에서 회신이 왔다. 항량 기준의 근거를 물었던 것에 근거가 없다고 답한 건이었다. 인천은 그걸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접수했다. 대신 다른 캠프 두 곳의 기준을 같이 보내 왔다.
한 곳은 10분 간격에 0.1킬로그램이었다. 다른 곳은 그냥 두 시간 고정이었다.
“셋 다 다른데요.”
“셋 다 자기 저울에 맞춰 정한 거야.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 저울마다 근거가 다른 거지.”
재혁이 노트를 폈다.
“근데 우리 0.05는 저울 재현성이랑 같아요. 제가 그저께 쟀잖아요.”
“그래서?”
“그럼 반장님이 맞게 정하신 거네요.”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야. 그때 나는 저울 산포를 몰랐어. 알고 정한 게 아니야.”
“그래도 결과가 맞았잖아요.”
“맞아떨어진 거지. 나중에 맞은 건 맞은 거야. 안 건 아니고.”
노트에는 두 줄이 나란히 들어갔다.
「8월 24일. 0.05를 근거 없이 정함. 정한 사람 한서진.」
「8월 27일. 저울 재현성 실측 0.05와 같은 값임이 확인됨. 실측한 사람 우재혁. 이 값에 오늘부터 근거가 있음. 정할 때는 없었음.」
인천에 보낼 답신은 재혁이 썼다. 첫 줄이 이랬다.
「저희 기준은 8월 24일에 근거 없이 정했고, 8월 27일에 근거가 생겼습니다.」
6. 열한 통
저녁에 은재가 「해 본 것」 칸에 다섯 줄째를 적었다.
3월에 올 130통 중 넉 통이 아직 갈 데가 없었다. 오늘 은재는 옆 연구동 저온실에 전화를 걸어 빈 자리를 물었다.
“열한 통 자리가 있대요.”
경옥이 장부에서 눈을 안 뗐다.
“거기는 우리 방이 아니에요.”
“그래도 −30도예요.”
“그 −30도는 저쪽 계기가 읽은 −30도예요.”
은재가 말을 멈췄다. 어제 강릉에서 온 회신이 아직 책상에 있었다.
“넉 통만 저쪽에 두면요.”
“넉 통만 다른 조건에서 잰 게 돼요. 자리를 얻는 대신 줄이 갈라져요.”
“연속 구간을 안 자르면요? 통째로 넉 통이 한 구간이면요.”
경옥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건 돼요.”
“그리고 저쪽에 더미 통을 같이 보내요. 기록계 넣어서요.”
경옥이 은재를 잠깐 봤다.
“저쪽 방을 우리가 재게 되네요.”
“강릉은 실수로 그렇게 됐잖아요. 이번엔 재려고 보내는 거예요.”
경옥이 볼펜을 놨다. 그러고 벽을 봤다. 클립이 두 개였는데 한쪽이 비어 있었다.
“못 해요.”
“왜요.”
“기록계가 한 대예요. 2호를 저쪽에 보내면 우리 방이 비어요.”
은재가 벽을 봤다. 어제 자기가 붙인 종이가 빈 클립 밑에 있었다.
「보류. 사유: 기록계 1호 복귀 전에는 시행 못 함. 넉 통 자리는 저쪽에 구두로 잡아 둠. 기입자 노은재.」
“교정을 왜 하필 지금 보냈을까요.”
“지금 보냈으니까 지금 아프죠.”
경옥이 벽에서 눈을 안 떼고 말했다.
“안 보냈으면 안 아팠을 거예요. 그리고 계속 몰랐을 거고요.”
오후에 교정기관에서 접수 통지가 왔다. 복귀 예정일이 9월 28일이었다.
은재가 빈 클립 밑의 종이를 떼어 오지 않고, 그 앞에 서서 볼펜으로 아랫줄에 적었다. 위에 「복귀 미정」이라고 적힌 줄은 그대로 뒀다.
“왜 안 지워요.”
“어제 몰랐던 건 어제 몰랐던 거니까요.”
경옥이 웃었다. 스물세 해 동안 그 방에서 웃은 횟수를 세어 본 적은 없었다.
세어 놓을걸, 하고 잠깐 생각했다.
세는 일은 아는 일이 아니다. 세어 놓는 일은 나중에 달라진 것을 알아보게 해 두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 센 수는 오늘 쓰이지 않는다.
수만 적으면 자리가 옮겨간 것을 못 본다. 두 번 잰 두 값이 붙어 있다고 그 물건이 얌전한 것도 아니다. 적게 재면 늘 좁게 나오고, 좁게 나온 것을 좁다고 읽으면 그때부터 틀린다.
값이 안 나오면 사람은 조심한다. 값이 나오면 사람은 안심한다. 그래서 밀린 것이 고장 난 것보다 나쁘다.
못 본 것은 셀 수 없다. 다만 내 방법이 무엇을 못 보는지는 셀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세기 전에 지나가 버린다.
어제 것은 영영 모른다. 오늘부터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