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5화 - 남음

제15화 「남음」

1. 508미터

나흘째였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첫 토막에서 505미터, 두 번째 토막에서 508미터. 철수까지 마흔여드레, 안 파는 날까지 닷새. 깊이 장부만 보면 어제와 똑같은 날이었다.

같지 않은 것은 저울 앞이었다.

재혁은 부스러기를 체에 안치고 벽시계를 올려다봤다가, 그대로 손을 내렸다. 어제까지는 시계를 보는 것이 일이었다. 30분. 그 30분이 오늘부터 없어졌다.

“처음은 몇 분에 재요?”

“삼십 분에.”

“그건 남았네요.”

“남은 게 아니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9시 12분에 걸었다. 9시 42분에 첫 계량 15.42킬로그램. 5분 뒤 15.31, 다시 15.24, 또 15.19.

“0.05예요.”

재혁이 저울에서 손을 뗐다. 규칙은 5분 동안 변화가 0.05킬로그램 이내면 그친다는 것이었다.

“이내야, 미만이야?”

서진이 물었다. 재혁이 노트를 넘겼다. 어제 받아 적은 줄에는 ‘0.05kg 이내’라고만 있었다.

”…안 적혀 있는데요.”

“어제 기준을 정하면서 등호를 안 정했어. 두 달 하면 딱 0.05인 날이 스무 번은 나오는데, 어떤 날은 그치고 어떤 날은 계속하면 그 값들이 서로 다른 물건이 돼.”

“어느 쪽으로 해요?”

“같으면 안 그친 걸로. 덜 빼는 건 우리가 모르게 되지만, 더 빼는 건 우리가 아니까.”

「5분간 변화 0.05kg 미만일 때 종료. 0.05 정확히는 계속. 이 줄은 8월 24일에 정함. 이유: 어제 규칙에 등호가 없었음.」

10시 2분 15.14, 10시 7분 15.11, 10시 12분 15.10, 10시 17분 15.09. 거기서 그쳤다. 걸어 놓은 때부터 65분이었다. 두 번째 토막은 47분에 그쳤다.

“삼십 분에 그친 날은 하루도 없었을 거예요.”

재혁이 말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산치를 적었다. 15.6킬로그램. 첫 토막 마른 무게 15.09, 부족 0.51. 두 번째 토막 마른 무게 15.02, 부족 0.58.

“오늘 마이너스 1.09예요. 어제가 마이너스 0.8이었는데.”

“어제하고 잇지 마.”

“안 이어요. 근데 커진 건 커진 거잖아요.”

“안 커졌어. 어제까지는 덜 빼고 재서 얼음이 많아 보였던 거야. 오늘 처음으로 부족한 만큼이 보이는 거고.”

액 비율을 적을 때 재혁의 연필이 멈췄다. 첫 토막 8.0퍼센트. 두 번째 7.6퍼센트.

“어제가 6.7이었어요.”

“그래.”

“인천에 8.5퍼센트 되면 커터 바꾼다고 보냈잖아요. 오늘 벌써 8.0인데요.”

“커터가 하룻밤 사이에 닳았어?”

“아니죠.”

“자를 바꿨지.”

서진이 인천으로 보낼 종이에 줄을 그었다.

「8.5% 교체 기준 철회 건의. 이유: 그 8.5%는 30분 고정으로 잰 값의 8.5%였음. 항량 기준 값과는 다른 자의 눈금임. 새 기준은 항량 값이 열흘쯤 쌓인 뒤에 다시 정할 것.」

「오늘 작업 시간 2시간 늘어남. 줄이는 방법 없음.」

“없다고 굳이 적어요?”

“비워 놓으면 다음 사람이 방법이 있는 줄 알고 찾아.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두면 누가 하루를 버려.”

노트 맨 아래에 처음 보는 두 줄이 생겼다.

「걸어 놓은 사람: 우재혁 09:12 / 내린 사람: 우재혁 10:17 / 실제 65분」

2. 영하 24.2도

강릉에서 07시 40분에 전화가 왔다.

세 통은 금요일 오후 2시에 인천을 떠나 중간 거점에서 세 시간을 서 있다가 밤새 달려 도착했다. 문에서 문까지 17시간 40분. 은재는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기록계 판독 파일 세 개를 내려받아 놓고 있었다.

“1호 상자 최고 영하 24.2도. 금요일 14시 12분이요.”

“출발하고 12분.”

“2호도 비슷해요. 14시 9분에 영하 24.6.”

“싣는 동안이네요.”

“3호는요.”

은재가 화면을 돌렸다. 경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영하 25.1. 토요일 07시 52분.”

“내리는 동안이에요. 밤새 달린 열네 시간이 아니라, 문 열린 십오 분 두 번이에요.”

경옥은 한참 화면을 보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오래전부터 알던 얘기예요. 위험한 건 옮기는 동안이 아니라 옮겨 싣는 동안이라고. 아는 거하고 종이에 찍혀 나오는 거는 다르네요.”

통 안에 넣어 보낸 더미 기록계는 달랐다. 최고 영하 29.4도, 시각은 토요일 10시 5분. 상자 바깥이 가장 나빴던 때보다 두 시간 넘게 뒤였다.

“바깥이 25.1까지 갔는데 안은 29.4까지밖에 안 갔어요.”

“늦게 들어가서 그래요. 다만 두 시간 늦게 오니까, 문 두 번 여는 사이가 두 시간보다 짧으면 두 번째가 첫 번째 위에 얹혀요.”

강릉이 자기네 저온실에 들여놓고 두 시간 뒤에 같은 시각의 값을 두 개 보내왔다. 강릉 벽 온도계 영하 29.8도. 우리가 보낸 기록계 영하 29.2도.

“0.6이에요.”

은재가 말했다.

“0.6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몰라요.”

“모르죠.”

“근데 이제 저 방하고 우리 방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는 알아요.”

경옥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은재가 말을 이었다.

“우리 기록계가 저쪽 방에 가 있었잖아요. 그럼 그거… 자를 빌려준 거 아니에요?”

“빌려준 게 아니라 보낸 거예요. 시료 지키라고.”

“근데 재고 왔어요.”

경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재가 자기 노트에 적었다.

「보내려고 한 일이 재는 일이 되어 있었음. 8월 24일. 목적 아님. 그래도 값임.」

오후에 강릉에서 질문이 하나 더 왔다. 상자 옆면에 붙여 보낸 서식 사본에 「인지일」이라는 칸이 있는데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다.

“물어봤네요. 저번 남극은 안 물었잖아요.”

“안 물어도 쓰긴 써요. 자기 식으로 고쳐서. 고쳐 쓰는 게 나쁜 건 아닌데, 물어보면 안 고치고 알고 쓰죠.”

경옥이 답장 화면을 열어 놓고 은재를 봤다.

“이번엔 이름을 적어 보내요. 물어본 데는 답이 갈 데가 있어야죠.”

3. 몇 자

정한은 아침에 사진을 열두 장 찍었다.

지난번에는 여덟 장이었다. 카메라 자리는 그대로 두고 조명 방향을 여덟으로 늘렸고, 그중 넉 장은 광원 높이를 한 단 더 낮췄다. 조명이 낮을수록 눌린 자국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다른 사진이 다른 눈이다.’ 지난주에 그가 적어 놓은 줄이었다.

열두 장을 대구로 부치고 나서 그는 오늘의 다른 일을 시작했다.

글자 수를 세는 일이었다.

2번 릴에 붙어 있던 선행 테이프의 라벨에는 같은 사람 손으로 쓴 글씨가 열네 자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은 글씨였다. 정한은 확대 사진을 놓고 그 열네 자에서 두 가지를 쟀다. 한 글자 안에서 획과 획 사이의 틈, 그리고 글자와 글자 사이의 틈.

한글은 획을 옆으로 늘어놓지 않고 한 덩어리로 모아 쓴다. 그래서 덩어리 안쪽과 덩어리 사이가 눈에 띄게 다르다.

획 사이는 평균 0.5밀리미터로 넓어야 0.7이었고, 글자 사이는 평균 1.4밀리미터로 좁아야 1.1이었다. 두 무리가 겹치지 않았다. 0.7과 1.1 사이가 비어 있었다. 이 사람 손에서는 0.9밀리미터짜리 틈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케이스 옆면의 지운 자리로 옮겨 갔다. 지운 자국이 이어진 총 폭은 11.2밀리미터. 그 안에서 1.1 이상 벌어진 자리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1.5, 하나는 1.3.

틈이 둘이면 덩어리는 셋이다.

그는 ‘세 글자’라고 적으려다가 연필을 놓고, 먼저 대조군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옆면의 다른 자리를 같은 조명, 같은 배율로 찍어 같은 방법으로 재 봤다. 종이 결에서 헛된 골이 나왔고, 가장 넓은 것이 0.9밀리미터였다. 1.5는 여유가 넉넉했지만 1.3은 0.4밖에 남지 않았다.

「가운데 틈 둘. 그러므로 덩어리 셋. 단 둘째 틈은 약함(종이 결 최대 0.9와의 여유 0.4). 둘째 틈이 결이면 덩어리는 둘이 됨.」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왼쪽 끝: 케이스 모서리 3mm 앞에서 지운 자국이 끊김. 그 앞은 안 보임. 오른쪽 끝: 라벨 접착 자국에 덮임. 안 보임. 그러므로 위 셋은 가운데의 셋임.」

센 것과 다 센 것은 달랐다.

오후에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감이 이레 남았고, 마지막 보고서를 어떻게 쓸지 상의해야 했다.

“글자 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세 글자라고 하셨잖아요.”

정한은 수화기를 든 채로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

“제가 그랬습니까.”

“처음 전화하셨을 때요. 세 글자쯤 된다고. 그래서 저는 아버지 성함인 줄 알았어요. 아버지 성함이 세 자거든요.”

”…죄송합니다.”

“뭐가요.”

“제가 심었습니다.”

의뢰인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정한이 천천히 설명했다.

“그냥 보고 세 자로 보인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세어 본 게 아니고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신 뒤로 선생님은 그 자리에 성함을 얹어서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제 두 자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려도 성함이 잘 안 지워집니다.”

“그거야 제 사정이죠.”

“제 사정입니다. 이 일을 서른다섯 해 했는데, 제가 세어 보지도 않은 걸 세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흘 만에 선생님한테 옮겨 갔고요.”

전화를 끊고 그는 보고서 서식을 고쳤다. 첫 장에 칸을 둘로 갈랐다.

「판독한 것」과 「짐작한 것」.

「짐작한 것」 칸 첫 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 글자. 케이스를 처음 본 날부터 오정한이 그렇게 여겨 왔음. 근거는 첫인상. 세어 본 적 없음. 8월 23일까지 이 줄이 어디에도 안 적혀 있었음.」

그 아래에 한 줄 더 있었다.

「이름이라는 것도 안 적혀 있었음.」

4. 두 번

토요일 오전이었다. 열닷새째였다.

하람이 들어갔을 때 미강은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발판이 아직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책상 모서리에 바지가 개켜져 있었다. 하람이 지난주에 가져다 놓은 검정 바지였다.

단을 들춰 봤다.

두 번 박혀 있었다.

첫 줄과 둘째 줄이 1밀리미터도 안 되게 나란했다. 두 줄 다 되박음질이 두 번씩 있었다. 접힌 폭은 두 번 다 3센티미터였다.

“이거 지난주에 하셨어요.”

“했어?”

“네.”

“그럼 두 번 했네.”

“네.”

미강이 웃었다.

“두 번 했으면 안 뜯어져.”

하람은 실을 뜯지 않았다. 부엌에 가서 물을 끓이고, 돌아와서 수첩을 폈다.

「토요일. 같은 단을 두 번 박으심. 두 번째도 3센티. 되박음질 두 번. 첫 줄과 나란함.」

거기까지 쓰고 한참 있다가 한 줄을 더 붙였다.

「두 번이 같았음. 이것이 좋은 뜻인지는 모름. 왜: 두 번째를 하시는 동안 첫 번째를 기억하고 계셨는지, 아니면 첫 번째가 없는 것처럼 새로 하셨는지 모름. 결과가 같아도 두 가지임.」

같은 결과가 두 가지 이유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하람은 며칠 사이에 세 번쯤 생각했다. 어디서 배운 것은 아니었다.

11시에 최영숙이 종이를 들고 내려왔다. 여섯 번째 종이였다.

여태 한 줄이던 것이 네 줄이 되어 있었다.

「금요일. 6시 5분. 문 두 번. 계단 참에 섰음. 3분쯤.

올라가던 중인지 내려가던 중인지: 모름. 나는 서 계신 것만 봤음.

어느 쪽을 보고 서셨는지: 아래쪽. 이건 확실함.

손잡이: 안 잡으셨음.」

하람은 종이를 두 번 읽었다.

“길어졌네요.”

“모른다고 써도 된다고 하셔서요. 지난번엔 모르는 걸 어떻게 쓰나 싶어서 아예 안 썼는데.”

“고맙습니다.”

“근데 이렇게 쓰면 도움이 되나요? 반은 모른다고 써 놨는데.”

“모른다고 적힌 데가 있으니까, 확실하다고 적힌 데가 확실해졌어요.”

최영숙이 돌아간 뒤에 하람은 수첩 뒷장을 폈다. 앞장은 어머니의 것이고 뒷장은 하람 자신의 것이었다. 아홉 줄째를 썼다.

「모름을 적을 칸을 주니까 종이가 길어졌다. 짧았던 것은 다 알아서가 아니라 물을 데가 없어서였다.」

아래쪽을 보고 섰다는 것은 두 가지를 다 허락했다. 내려가려던 참일 수도 있고, 올라오다가 돌아본 것일 수도 있었다. 손잡이를 안 잡았다는 것은 다르게 읽혔다. 오래 다닌 계단은 손이 아니라 발이 안다. 몸이 아는 길에서는 손잡이를 안 찾는다.

하람은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앞장에 적었다.

「어머니께 여쭙지 않음. 왜: 여쭈면 답이 생김.」

5. 뜬 것

오후에 서진이 시추동 한쪽에 전열판을 놓았다.

“녹여 볼 거야.”

“뭘요?”

“부스러기.”

재혁이 저울 쪽을 봤다. 아침에 항량까지 받쳐서 마른 무게를 낸 그 부스러기였다.

“항량까지 갔잖아요. 액 다 뺐는데요.”

“뺐다고 치는 거지.”

“그럼 어떻게 확인해요? 통에 든 게 몇 리터인지 재면 안 돼요? 무게하고 부피가 둘 다 있으면 얼음인지 액인지 갈리잖아요.”

“안 갈려.”

“왜요?”

“저 액 밀도를 우리가 얼음에 맞춰 놨거든.”

재혁이 잠깐 멈췄다.

”…구멍 안 무너지라고요.”

“그래. 액이 가벼우면 얼음이 가라앉고 무거우면 뜨고, 그러면 구멍이 이상해져. 그래서 처음부터 거의 똑같이 맞춰 놨어. 무게랑 부피로는 안 갈리는 게 그래서야.”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네요.”

“우리가 다른 일 하려고 맞춰 놓은 게 지금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녹이면 갈렸다. 물은 1이고 액은 0.92니까, 녹은 물 위로 액이 뜬다.

두 번째 토막의 마른 부스러기에서 정확히 2.00킬로그램을 덜어 냈다. 그것만 녹였다. 나머지는 시료로 남겼다. 녹인 것은 값을 낼 수 없게 되니까 하루에 한 번, 한 토막에서만 하기로 정했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유리병 안에서 얇은 층이 위로 올라와 앉았다.

0.021킬로그램이었다.

“1.05퍼센트예요.”

“그럼 아까 15.02로 적은 게 실제로는 얼마야?”

재혁이 셈했다. 15.02에서 1.05퍼센트면 0.16킬로그램쯤이었다.

“14.86이요. 부족이 0.58이 아니라 0.74인데요.”

“첫 토막에도 같은 비율 대면?”

“14.93. 부족 0.67. …오늘 합이 마이너스 1.41이에요.”

재혁이 노트를 보다가 다시 유리병을 봤다.

“항량까지 갔는데도 남아 있었어요.”

“안 떨어지는 거야.”

“네?”

“얼음 알갱이에 얇게 붙은 막은 아무리 받쳐도 안 떨어져. 흘러내릴 건 다 흘러내렸고, 그다음부터는 붙어 있는 힘이 이기거든. 무게가 그친 건 그래서야. 다 뺐다고 그친 게 아니라.”

재혁이 천천히 말했다.

“안 떨어지는 거하고 없는 거는 다르네요.”

“다르지.”

“그럼 항량은 뭐예요? 오늘 아침에 한 게 헛거예요?”

“헛거 아니야. 그건 아래쪽 끝이야.”

“아래쪽 끝이요.”

“부족분이 적어도 1.09는 된다는 거. 그보다 적을 수는 없어. 녹여서 본 1.41이 참인지는 아직 몰라. 녹이는 동안 증발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유리에 묻어 남은 게 있을 수도 있고.”

서진이 노트에 줄을 그어 두 칸으로 갈랐다.

「항량 기준 부족 −1.09 / 녹임 보정 부족 −1.41 / 어느 쪽이 참인지 모름 / 아는 것: 참값은 1.09보다 작지 않음.」

“한 줄로 적으면 안 돼요?”

“안 돼. 한 줄로 적으면 둘 중 하나를 우리가 고른 게 되는데, 우린 안 골랐어.”

재혁이 마지막 칸에 적으면서 물었다.

“모르는 걸 이렇게 자세히 적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값을 모를 때도 한쪽 끝은 알 수 있어.”

“그게 아는 거예요?”

“한쪽 끝을 아는 것도 아는 거야. 다음 사람이 이걸 보면, 적어도 이쪽으로는 안 찾아.”

인천으로 보낼 세 줄이 그날 저녁에 나갔다.

「항량 기준 첫날. 소요 65분·47분. 30분에 그친 날은 하루도 없었을 가능성 있음.」

「액 비율 8.0 / 7.6%. 어제까지의 6.7과 이어 읽지 말 것. 다른 자임. 8.5% 교체 기준 철회 건의.」

「부스러기 밀도로는 액과 얼음이 안 갈림. 이유: 시추액 밀도를 얼음에 맞춰 설계했기 때문. 융해 분리로만 갈림. 하루 한 토막 2kg 한정 시행.」

6. 이십 시

저녁 8시 정각에 은재가 문 앞에 섰다.

대차는 이미 통로에 대 놓았다. 더미 통 두 개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꺼내 바꿔 놓는 일인데, 문을 두 번 열면 두 번 여는 것이 되니까 한 번에 끝내야 했다.

1분 40초. 출입 기록에 한 번.

「자리 바꿈 시험. 8/23 20:00 배치. 8/24 20:00 교환 완료(1분 40초, 개폐 1회). 8/25 20:00 판독.」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요?”

경옥이 물었다. 알면서 묻는 물음이었다.

“열이 통 속까지 들어가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리잖아요. 두 시간 걸리는 걸 두 시간 뒤에 읽으면 따라오는 중을 읽는 거예요.”

“그렇죠.”

재운 지 삼백스물엿새째였고, 첫 절단까지 서른아흐레가 남아 있었다. 병행 나흘째 값은 어제와 같았다. 일호기 영하 29.9, 이호기 영하 30.2. 차이 0.3.

네 점이 0.4, 0.3, 0.3, 0.3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은재는 자기가 만든 네 번째 칸에 처음으로 뭔가를 적었다.

「같은 걸 두 번 잰 날」.

방법은 간단했다. 지난주에 기준점을 잡을 때 썼던 얼음물을 다시 만들었다. 잘게 부순 얼음에 증류수를 조금만 붓고 저어서 30분. 은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두 번 만들었더니 영하 0.04도와 영상 0.04도가 나왔다. 0.08도였다. 경옥이 따로 두 번 하니 영상 0.01도와 0.06도, 0.05도였다.

네 값 중 가장 먼 둘의 차이가 0.11도였다.

「우리 손의 산포 0.11도. 그러므로 0.15도 미만의 차이는 변화로 보지 않음. 8월 24일. 근거: 동일 방법 4회 실측.」

“0.3은 0.15보다 크네요.”

“크죠. 그래서 어제 것도 오늘 것도 판정은 할 수 있어요.”

“이걸 왜 여태 안 했어요?”

은재가 물었다. 나쁜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는 남이 안 재 주잖아요. 그건 우리가 재는 수밖에 없는데, 남이 안 시키니까 안 하게 돼요.”

경옥은 자기 노트를 덮으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스물세 해 동안 같은 걸 두 번 잰 날이 정말 하루도 없었어요?”

은재가 물었다.

경옥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압축기 소리가 두 대 다 나고 있었고, 그 소리 사이에서 문틀이 한 번 작게 울었다.

“한 번 있었어요.”

“언제요?”

“2003년에.”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2003년은 스물세 해 노트에서 유일하게 값이 비어 있는 해였다. 여섯 번의 온도 사건 중 다섯 번은 기록이 있고, 2003년만 없었다.

“그때 방 온도를 두 번 쟀어요. 두 값이 3.5도 달랐어요.”

“어느 쪽이 맞았는데요?”

“몰랐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안 적었어요.”

은재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경옥이 대신 말했다.

“몰라서 안 적은 게 아니에요. 두 개라서 안 적었어요. 하나만 적으면 거짓말이고, 둘 다 적으면… 그때는 그런 걸 적는 데가 아니었어요.”

“둘 다 적으면 되잖아요.”

“그 칸이 없었어요.”

“어떤 칸이요.”

“은재 씨가 만든 칸이요.”

은재는 자기 앞에 놓인 종이를 봤다. 「인지일」이 있고 「모름」이 있고 「왜」가 있고 「바꾼 것」이 있고, 오늘 「같은 걸 두 번 잰 날」이 붙어 있었다.

경옥이 스물세 해 노트를 2003년 자리에서 폈다. 빈 곳이었다. 그 아래 여백에, 지우지 않고, 오늘 날짜로 썼다.

「2003년 8월 값 없음. 사유: 두 값이 있었고 3.5도 달랐으며 어느 쪽을 적을지 정하지 못해 둘 다 적지 않음. 2026년 8월 24일 기입. 기입자 문경옥.」

“그럼 2003년 시료 값은요?”

“여전히 몰라요.”

“근데요?”

“왜 모르는지를 알아요. 그건 적을 수 있어요.”

은재가 노트를 닫는 소리가 났다. 경옥이 자기 장갑을 벗으면서 말했다.

“스물세 해 동안 그게 제일 부끄러웠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적혀 있어요.”


무게가 그쳤다고 다 빠진 것은 아니다. 흘러내릴 것이 다 흘러내리고 나면 붙어 있는 힘이 이기고, 거기서부터는 아무리 기다려도 한 방울도 더 떨어지지 않는다. 안 떨어지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그래도 그 값이 헛되지는 않다. 참값이 어디쯤인지는 몰라도 그보다 작지는 않다는 것은 안다. 값을 모를 때도 한쪽 끝은 알 수 있고, 한쪽 끝을 아는 것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일을 하려고 맞춰 놓은 것이 지금 우리 눈을 가릴 때가 있다. 무너지지 말라고 무게를 똑같이 맞춰 놓았기 때문에 저울로는 갈리지 않는다. 잘못한 일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옳았던 일이다.

가운데는 셋이었지만 양 끝은 보이지 않았다. 센 것과 다 센 것은 다르다. 세어 보지 않고 세 자라고 말한 사람은 자기 짐작을 남의 기억 속에 심어 놓는다. 심은 사람은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두 번 한 것이 같았다는 것은 두 번 했다는 것보다 큰 말이다. 다만 결과가 같아도 이유는 둘일 수 있다. 두 번째를 하는 동안 첫 번째를 붙들고 있었는지, 첫 번째가 없는 것처럼 새로 했는지는 밖에서 안 보인다.

모른다고 적을 칸을 주면 종이가 길어진다. 짧은 종이는 다 알아서 짧은 것이 아니라 물을 데가 없어서 짧다.

값이 두 개여서 적지 못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인 것이다. 스물세 해 동안 그 칸이 없었을 뿐이다.

칸이 생기면, 스물세 해 전 것도 오늘 적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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