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4화 - 휨

제14화 「휨」
1. 502미터
세 번째 날이었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사흘째 같은 숫자였다. 첫 토막에서 499미터, 두 번째 토막에서 502미터.
“오백 넘었어요.”
재혁이 깊이 장부를 덮으면서 말했다. 서진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안 세요?”
“오백이 눈금이야?”
“눈금이잖아요.”
“얼음이 그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은 거야. 우리가 손가락이 열 개라서 오백에서 한 번 놀라는 거지. 삼백구십칠에서는 아무도 안 놀라잖아.”
재혁이 웃었다. 그러고 나서 저울 앞으로 갔다.
계산치는 15.6킬로그램이었다. 첫 토막은 젖은 무게 16.3, 30분 받쳐 뺀 액 1.1, 마른 무게 15.2. 부족 0.4. 두 번째 토막도 마른 무게 15.2, 부족 0.4.
“오늘 마이너스 0.8이에요.”
재혁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았다.
“어제까지 마이너스 0.5, 마이너스 0.5였는데.”
“그래.”
“휘었어요.”
서진이 장부를 끌어당겨 세 줄을 나란히 놓았다. 8월 21일 −0.5. 8월 22일 −0.5. 8월 23일 −0.8. 그리고 그 아래에 연필로 점 세 개를 찍고, 세 점을 지나는 선을 하나 그렸다. 아래로 처지는 곡선이었다.
“휘었지.”
“그러니까요.”
서진이 같은 세 점 위에 선을 하나 더 그렸다. 이번에는 위로 솟았다가 급하게 내려오는 선이었다. 두 선 다 세 점을 정확히 지나갔다.
“이것도 지나가.”
재혁이 그림을 들여다봤다.
“점 두 개면 뭘 그려도 직선이라고 그랬지. 점 세 개면 뭘 그려도 곡선이야. 네 개면 또 다른 곡선이 있고. 점을 하나씩 더 찍는 걸로는 안 갈려. 그림이 계속 그려지거든.”
“그럼 몇 개를 찍어야 되는데요.”
“몇 개를 찍느냐가 아니야.”
서진이 연필을 놓았다.
“다른 종류를 하나 찍어야지.”
2. 0.3도
병행 셋째 날이었다.
아침 여덟 시에 은재가 종이부터 읽었다. 사흘째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일호기 쪽 −29.9, 이호기 쪽 −30.2. 차이 0.3도.
“어제도 0.3이었어요.”
“그랬죠.”
“그저께는 0.4였고요.”
은재가 세 숫자를 서식 옆에 세로로 적었다. 0.4, 0.3, 0.3.
“둘 다 아니에요.”
“뭐가요.”
“저희가 적어 놓은 두 갈래요. 길들이기면 계속 움직여야 되고, 계통 차이면 처음부터 안 움직여야 되는데, 이건 한 번 움직이고 멈췄어요. 둘 다 아니에요.”
경옥이 서식을 받아 들고 한참 봤다. 그러고는 은재를 봤다.
“갈래를 둘로 적어 놨으니까 둘 다 아닌 거예요.”
“네?”
“둘로 적어 놓으면 셋째 갈래는 안 보여요. 안 적혀 있으니까요. 우리가 적은 데까지만 눈이 가요.”
경옥이 8월 21일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날 문 몇 번 열렸는지 알아요?”
은재가 출입 기록을 폈다. 8월 21일 여섯 번. 냉매 충전, 게이지 확인, 야간 기사 순회, 그리고 은재가 두 번.
“어제는요?”
“두 번요.”
“오늘은 지금까지 한 번이고요.”
은재가 볼펜을 놓았다.
“그날 방이 달랐던 거네요.”
“방은 같았어요. 그날 방에 일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0.4는 다른 방에서 잰 게 아니라 다른 날에 잰 거예요.”
은재가 8월 21일 줄 옆에 별표를 하나 찍고, 서식 아래쪽에 한 줄을 적었다.
「8월 21일 값은 압축기 교체 당일 잔여 작업 중에 잰 것임. 출입 6회. 지우지 않음. 표시만 함.」
“그럼 어제하고 오늘 두 개는요?”
“두 개는 뭐예요?”
“0.3이 두 번 나왔으니까, 안 움직인 거잖아요.”
경옥이 고개를 저었다.
“0.3이 두 번 나온 게 아니라, 0.3이라고 두 번 읽은 거예요.”
은재가 그 말을 그대로 적으려다 멈췄다.
“저희, 같은 걸 두 번 재 본 적이 없어요.”
“없죠.”
“스물세 해 동안요?”
“스물세 해 동안요.”
경옥이 벽시계를 봤다.
“오늘 저녁에 해요.”
3. 세 글자
초점이 나갔던 석 장은 그제 다시 찍어 어제 아침에 대구로 부쳤다. 여덟 장이 다 제대로 나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작업실에는 문구점 봉투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연필 여섯 자루와 종이 한 묶음이 들어 있었다.
정한은 아침에 케이스 종이 두께부터 쟀다. 테이프 두께 재는 마이크로미터를 그대로 썼다. 0.18밀리미터. 종이는 쟀지만 연필은 못 쟀다. 그 연필이 여기 없었다.
「종이 두께 0.18mm. 실측. 연필 심 굳기 미상. 왜: 그 연필이 여기 없음.」
‘안 재 봄’과 ‘못 잼’은 다른 말이라서 따로 적었다.
대신 정한은 사 온 연필로 같은 두께 종이에 세 글자씩 눌러 썼다. 굳기별로 여섯 장. 다 쓰고 나서 전부 지우개로 지우고, 어제 릴을 찍던 방식대로 조명을 바닥까지 내려 스치는 빛으로 찍었다.
지워진 자리마다 자국이 남았다. 문제는 자국들이 서로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굳은 심을 세게 눌러 쓴 것과 무른 심을 살살 눌러 쓴 것이 같은 깊이로 남아 있었다. 깊이 하나로는 두 가지가 안 갈렸다.
「압흔 깊이만으로는 심 굳기와 필압이 안 갈림. 값 하나에 모르는 것이 둘임.」
정한은 그 줄을 적어 놓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왔다.
들어와서 사진을 다시 봤다. 이번에는 깊이가 아니라 폭을 봤다.
무른 심은 넓고 얕게 뭉갠 자리를 남겼고, 굳은 심은 좁고 뾰족한 골을 냈다. 같은 깊이여도 폭이 달랐다.
「깊이 + 폭 두 값이면 갈림. 릴 케이스 압흔: 폭 좁음, 깊이 깊음. → 굳은 심을 세게 눌러 씀.」
정한이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지울 생각으로 쓴 글씨가 아님.」
오후 세 시에 대구에서 봉투가 왔다.
정한은 자기 봉투를 먼저 열지 않았다. 규칙대로 했다. 동규가 보낸 종이를 자기 노트에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적고, 그다음에 서랍에서 자기 봉투를 꺼내 열었다.
동규의 첫 글자 후보는 두 개였다. 정한의 후보 세 개 중 하나가 그 안에 있었다. 둘째 글자는 겹치는 것이 없었다. 셋째 글자는 양쪽 다 모름이었다.
정한은 겹친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려다가 손을 멈췄다.
「후보 하나 겹침. 단, 두 사람은 같은 사진 여덟 장을 봄. 사진이 잘못 보여 주면 둘이 같이 잘못 봄. 겹친 것은 맞은 것이 아니라 좁혀진 것임.」
그러고 나서 동규의 종이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옮겨 적을 때는 그냥 지나갔던 줄이었다.
「세 글자로 보시는 것도 짐작으로 보입니다. 지운 자리 폭이면 네 자도 되고 두 자도 됩니다.」
정한은 그 줄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그 자국을 세 글자라고 알고 있었다. 세어 본 적은 없었다. 처음 봤을 때 세 글자로 보였고, 그다음부터는 세 글자를 봤다.
「‘세 글자’는 판독이 아니라 전제였음. 8월 23일까지 안 적혀 있었음. 전제라서.」
정한은 봉투를 다시 봉하지 않았다.
「8월 23일 엶. 사유: 대구 판독 도착. 순서: 그쪽 것을 먼저 옮겨 적고 열었음. 다음 사진은 다른 조명으로 찍어 보낼 것. 다른 사진이 다른 눈임.」
4. 일곱 번째 칸
열나흘째였다.
오전 열 시에 갔더니 어머니가 실을 감고 있었다. 어제 하람이 큰길 건너 수예점에서 사다 놓은 검정 굵은 실이었다. 실패에 감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 몇 번 감았다가 팔을 쭉 뻗어 풀었다가, 다시 감았다.
“뭐 해.”
“끊어야지.”
“왜 끊어.”
“실이 길면 엉켜.”
어머니가 팔을 한 번 더 뻗었다. 손끝에서 어깨까지, 그리고 반대쪽 손끝까지.
“한 발이야. 한 발보다 길면 바늘 한 번 뽑을 때마다 팔이 뒤로 가. 그러다 꼬여.”
“한 발이 몇 센티인데?”
“니 팔로 재면 니 거고, 내 팔로 재면 내 거지.”
하람은 그 말을 수첩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옮겨 적는 동안 왜 손이 조금 떨렸는지는 나중에도 몰랐다.
어머니가 실 뭉치를 들어 보였다.
“이거 어디서 났어?”
“내가 사 왔어.”
“시장에?”
하람은 잠깐 멈췄다.
“가게에서.”
어머니는 그 말로 만족한 것 같았다. 더 묻지 않고 실을 끊었다.
오후에 아래층에 내려갔다. 최영숙이 종이를 접어서 들고 나왔다.
「목요일. 6시 10분. 문 두 번. 계단 참에 섰음. 아래에서 일곱 번째 칸. 3분쯤.」
하람은 종이를 받아 들고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오면서 칸을 셌다.
아래에서 참까지 일곱 칸이었다. 참 위로 다시 일곱 칸. 모두 열네 칸.
계단 참이 곧 아래에서 일곱 번째 칸이었다.
하람은 층계참에 서서 자기가 부탁한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아래에서 몇 번째 칸에 서시는지만 세어 주세요. 어머니가 계단 참에 서 있으면 그 답은 언제나 일곱이었다. 최영숙이 무엇을 보았든 답은 일곱이었을 것이다.
내가 물은 것에 답이 이미 들어 있었다.
하람은 수첩을 꺼내 뒷장에 적었다.
「내가 물은 것에 답이 들어 있으면 그 대답은 확인이 아니다. 계단이 대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앞장으로 돌아가 부탁할 것을 새로 적었다. 계단이 대신 대답할 수 없는 것만 골랐다.
「올라가던 중인지 내려가던 중인지. 어느 쪽을 보고 서 계셨는지. 손잡이를 잡으셨는지.」
내려가서 최영숙에게 종이를 건네다가, 하람이 물었다.
“저, 화요일에요.”
“화요일에 뭐요.”
“화요일은 없다고 적어 주셨잖아요.”
“아, 화요일엔 내가 없었어요. 딸네 갔다가 여덟 시에 왔어요.”
하람은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계단 참에 선 것은 월요일에 있었고 화요일에 없었고 수요일에 있었고 목요일에 있었다. 하람은 나흘 중 하루가 다른 이유를 사흘 동안 궁리했다. 그 하루는 안 일어난 날이 아니라 아무도 안 본 날이었다.
“저, 부탁 하나만 더요.”
“네.”
“안 계셨던 날은 안 계셨다고 적어 주세요. 없었다고 적지 마시고요.”
“그게 달라요?”
“많이 달라요.”
집에 올라와서 하람은 종이 서식을 고쳐서 다시 내려다 놨다. 「없음」 칸을 두 칸으로 갈랐다. 「안 일어났음(그 시간에 집에 있었음)」과 「모름(내가 없었음)」.
수첩 뒷장 여덟째 줄.
「없음이라고 적힌 칸이 셋이었는데, 그중 몇이 안 본 것인지 나는 열나흘 동안 몰랐다.」
그날 저녁에 하람은 옛집 계단도 열네 칸이었다는 것을 적었다가, 그 줄에 가로줄을 그었다. 그 시절 집 계단은 대개 열서넛에서 열예닐곱 칸이었다. 열네 칸이 같다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안 갈렸다.
무엇보다, 옛집 계단이 열네 칸이라는 것은 하람 자신의 기억이었다.
하람은 그 계단을 매일 오르내렸다. 자기 기억과 어머니 기억은 같은 골목에서 나왔다. 같은 데서 나온 두 개를 맞대는 것은 맞대는 것이 아니었다.
「내 기억은 잣대가 못 된다. 나도 거기 살았으니까.」
5. 한 시간
오후에 재혁이 쟁반 두 개를 들고 왔다.
체 두 벌로 걸러 놓은 것이었다. 눈이 1밀리미터인 것과 0.25밀리미터인 것. 사흘 전 청소일에 훑어 올린 헌 날의 부스러기와, 새 커터로 사흘 동안 나온 부스러기를 따로 걸렀다.
“헌 날 것은 고운 게 서른넷이에요. 백에 서른넷요.”
“새 날은?”
“첫날 스물하나, 둘째 날 스물하나, 셋째 날 스물둘요.”
재혁이 종이를 내밀었다.
“사흘 동안 안 변했어요. 날은 아직 안 무뎌졌어요.”
서진이 종이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액이 많이 나온 건 날 때문이 아니네.”
“그러니까 뭐 때문이에요?”
서진이 대답 대신 두 번째 토막에서 남겨 둔 부스러기를 반으로 갈랐다. 한쪽은 여느 때처럼 30분 받쳤고, 다른 쪽은 시계를 놓고 한 시간을 받쳤다.
30분 쪽에서 나온 액이 6.9퍼센트. 한 시간 쪽에서 7.6퍼센트.
재혁이 두 숫자를 번갈아 봤다.
“같은 얼음인데요.”
“같은 얼음이야.”
“삼십 분 더 뒀다고 0.7이 더 나와요?”
“응.”
서진이 노트를 폈다. 사흘 치 액 비율이 적혀 있었다. 6.1과 6.4, 6.2와 6.5, 6.8과 6.9.
“이거 받친 시간, 네가 다 쟀어?”
재혁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아니요.”
“어제 두 번째 토막은 누가 받쳤어.”
“제가 걸어 놓고 시추동에 갔다가 왔어요.”
“몇 분 있다 왔는데.”
”…모르겠어요. 한 사십 분쯤요.”
서진이 연필로 노트 여백에 짧은 선을 그었다.
“삼십 분이라고 적혀 있는데, 삼십 분인 날이 하루도 없었을 수도 있어.”
재혁이 쟁반을 내려다봤다.
“그럼 사흘 동안 세 개를 잰 게 아니라요.”
“조금씩 다른 세 가지를 잰 거지.”
“그럼 휜 게…”
“휜 게 아니라 자가 흔들린 거야.”
재혁이 아무 말도 안 했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어제 네가 좋아했잖아. 마이너스 0.5가 두 번 나왔다고.”
“네.”
“네가 좋아한 건 값이 아니야. 값이 두 번 같았던 거지. 같은 게 두 번 나오면 사람이 안심을 해. 그게 제일 위험해.”
그날 저녁에 두 사람이 규칙을 고쳤다.
「액 빼기: 30분 고정 폐지. 5분 동안 무게 변화가 0.05kg 이내가 될 때까지 받침. 실제 받친 시간을 분 단위로 기재할 것. 걸어 놓은 사람과 내린 사람 이름도 기재할 것.」
「8월 21~23일 액 비율 및 부족분은 같은 자로 잰 값이 아님. 지우지 않음. 이 줄 위와 아래를 한 표에 넣지 말 것.」
재혁이 마지막 줄을 적다가 손을 멈췄다.
“이 줄, 그저께도 그었는데요.”
“그랬지.”
“사흘 만에 또 그으면, 나중에 이 노트 보는 사람은 줄만 잔뜩 보겠어요.”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줄이 많은 노트하고 줄이 하나도 없는 노트가 있으면, 너는 어느 쪽을 믿을래.”
재혁이 대답하지 않았다.
“줄이 없는 쪽은 안 바꾼 게 아니라 안 적은 거야.”
인천으로 보낸 세 줄은 이랬다.
「입도 사흘 불변(21/21/22%). 커터 마모에 의한 설명 배제 가능.」
「액 비율 사흘 변화는 받침 시간 변화로 설명 가능함. 배제 못 함. 절차를 항량 기준으로 개정함.」
「−0.5 / −0.5 / −0.8 세 점은 곡선으로 읽지 말 것. 다른 자로 잰 세 점임.」
6. 자리
오후 두 시에 강릉 차가 떠났다.
1998년 시료 연속 세 통. 통 안에 기록계 하나, 상자에 하나. 떠나기 전에 세 통 다 온도를 쟀다. 통 안 −30.1, 상자 −29.8.
은재가 출발 시각과 바깥 기온과 차량 번호까지 적었다. 서식 사본은 상자 옆면에 붙여 보냈다. 맨 위에 참고용이라고 써 놨고, 그 아래에 맞댈 때는 두 서식의 차이부터 적을 것이라고 써 놨다.
차가 정문을 나가는 것을 보면서 은재가 말했다.
“도착하면 저쪽도 종이부터 볼까요.”
“안 볼 수도 있죠.”
“그럼요?”
“그럼 우리가 안 붙여 보낸 거예요.”
저녁 여덟 시에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은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센서를 서로 바꿔 달면 안 돼요? 일호기 것을 이호기 자리에, 이호기 것을 일호기 자리에요.”
“못 바꿔요. 제어부에 붙어 있어서 떼면 그 냉동기가 서요.”
“그럼요.”
경옥이 선반 아래에서 알루미늄 통 두 개를 꺼냈다. 라벨이 없었다. 값을 못 내는 파편 얼음이 가득 차 있고, 안에 기록계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은재가 통을 알아봤다. 일주일 전 제상 때 자기가 만든 것과, 그때 경옥이 다음엔 두 개 만들라고 해서 하나 더 만들어 둔 것이었다.
“이걸로요?”
“하나는 일호기 센서 옆에, 하나는 이호기 센서 옆에. 하루 두고, 내일 저녁에 서로 바꿔요.”
“바꿔서 뭘 봐요?”
“차이 방향요. 오늘 일호기 쪽 통이 이호기 쪽 통보다 높게 나왔다고 쳐요. 내일 자리를 바꿨는데 여전히 같은 통이 높으면 그건 통 탓이에요. 자리를 바꿨는데 높은 쪽이 뒤집히면 자리 탓이고요.”
은재가 통 두 개를 내려다봤다.
“통 두 개가 서로 다르면요? 둘 다 못 믿잖아요.”
“둘 다 못 믿어도 돼요.”
“네?”
“바꿔 놓는다는 게 그거예요. 둘 다 못 믿는 채로 갈릴 수 있어요. 통이 다른 것도 자리가 다른 것도 다 이 시험 안에 들어 있어요. 두 개를 바꾸는 게 두 개의 차이를 재는 거예요.”
은재가 서식에 적었다.
「자리 바꿈 시험. 8/23 20:00 배치. 8/24 20:00 교환. 8/25 20:00 판독. 높은 쪽이 뒤집히면 자리, 안 뒤집히면 통 또는 계기.」
적고 나서 은재가 물었다.
“이건 셋째예요?”
“아니요.”
“그럼 뭐예요.”
“셋째가 없는 채로 하는 거예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여전히 몰라요.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만 갈려요.”
“그것도 아는 거예요?”
“적을 게 하나 줄어드는 거죠.”
두 사람이 통을 각각 제자리에 놓고 나왔다. 문을 닫고 복도 온도계를 보면서 은재가 말했다.
“저 하나 더 만들려고요. 서식에요.”
“뭐요.”
“「같은 걸 두 번 잰 날」 칸요. 우리 자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는 남이 안 재 줘요.”
경옥이 웃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은재에게 건넸다. 남극 캠프에서 온 회신 사본이었다. 어제 날짜였다.
「액 비율은 소수점 한 자리까지. 0.3 이내 차이는 변화로 보지 않음. 근거: 동일 시료 2회 0.2 차이(8/22 실측).」
그 아래 줄에 「모름」이라는 칸이 있었고, 그 옆에 「왜」라는 칸이 있었다.
은재가 종이를 두 번 읽었다.
“이거… 제가 만든 칸인데요.”
“그렇죠.”
“저쪽은 제가 만든 줄 알아요?”
“몰라요.”
“모르는데 써요?”
“그게 좋은 거예요.”
경옥이 문 앞 벽에 붙은 서식 견본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름이 붙어 있으면 안 고쳐요. 이름이 없으니까 저쪽에서 자기 식으로 고쳐 쓴 거고요. 서식은 이름을 안 달고 다녀요.”
은재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저쪽도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채로 쓰는 거네요.”
“그렇죠. 그게 제일 멀리 가요.”
경옥이 노트를 폈다. 어제 적어 놓은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셋째 없음. 8월 23일 기준. 대신 둘을 바꿔 놓아 봄. 어느 쪽이 맞는지는 여전히 모름.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만 갈림.」
“내일이면 알아요?”
“내일이면 갈려요.”
경옥이 노트를 덮었다.
“아는 건 아니고요.”
점이 두 개면 무엇을 그려도 직선이 되고, 점이 세 개면 무엇을 그려도 곡선이 된다. 네 개면 또 다른 곡선이 있다. 점을 하나씩 늘리는 일로는 아무것도 갈리지 않는다. 그림이 계속 그려지기 때문이다. 갈리게 하려면 같은 종류를 더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를 하나 찍어야 한다.
휘어 보이는 것 중에는 재는 자가 흔들려서 휘어 보이는 것이 있다. 사흘 동안 세 개를 잰 줄 알았는데 조금씩 다른 세 가지를 재고 있었던 것. 그래서 값에는 값만 적으면 안 되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떻게 쟀는지가 붙어야 한다. 붙어 있지 않은 값은 뒷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쟀다고 치고 읽는다.
갈래를 둘로 적어 놓으면 셋째 갈래는 보이지 않는다. 적힌 데까지만 눈이 가기 때문이다. 세 글자라는 것도 서른다섯 해 동안 아무도 안 적은 짐작이었다. 전제는 안 적힌다. 전제라서.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다. 안 일어난 것과 내가 안 본 것. 둘을 한 칸에 적으면 나중에 그 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물은 것에 답이 들어 있으면 그 대답은 확인이 아니라 메아리다.
셋째가 없으면 둘을 서로 바꿔 놓아 본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는 갈린다. 둘 다 못 믿는 채로도 갈릴 수 있다.
같은 값이 두 번 나오면 사람은 안심을 한다.
그게 제일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