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1화 - 바꿈

제11화 「바꿈」

1. 0미터

달력에 동그라미가 다섯 개 쳐져 있었다. 나흘 전에 한서진이 친 것이었다.

우재혁은 그 동그라미를 아침마다 봤다. 오늘이 그중 첫 번째였다.

“오늘 안 파는 날이죠.”

“응.”

“그럼 뭐 해요.”

“내려가.”

빈 드릴이 케이블에 걸렸다. 코어를 받는 통은 떼고 부스러기 통만 달았다. 아무것도 깎지 않고 내려갔다가, 구멍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만 훑어 올릴 참이었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그 사이에 재혁은 할 일이 없었다.

“파는 날보다 오래 걸리네요.”

“파는 날은 파느라 시간이 가지. 오늘은 안 가.”

올라온 통을 열자 잿빛 죽 같은 것이 반쯤 차 있었다. 체에 받쳐 30분 두었다. 지난주에 인천이 물어봐서 고친 규칙대로, 젖은 것을 재고 액을 뺀 것을 재고 흘러나온 액도 잰다.

젖은 무게 7.4, 액을 뺀 마른 무게 6.1킬로그램. 흘러나온 액이 1.3이었다.

“이거 8퍼센트 아니었어요? 이건 두 배는 되는데요.”

“곱아서 그래. 가루가 고우면 겉넓이가 넓어서 액을 더 물고 있어.”

재혁이 저울 눈금을 두 번 봤다.

“6.1이요. 열흘 동안 모자란 게 10.4인데.”

“그렇지.”

“절반이 넘게 여기 있었네요. 이건 좀 시원한데요.”

“나온 게 아니야.”

“나왔잖아요.”

“담긴 게 나온 거야.”

훑개는 바닥에 닿는 것만 긁어 올린다. 곱은 가루는 액에 떠서 통 옆으로 빠져나가고, 벽에 눌어붙은 것은 손이 안 닿는다.

“그럼 이 숫자는 뭐예요.”

“하한이야. 최소한 이만큼은 아래 있었다는 거.”

재혁이 노트에 적었다.

「훑음 6.1kg. 마른 무게. 이것은 하한임. 훑개가 못 담은 양은 모름. 왜: 잴 방법 없음.」

적고 나서 재혁이 잠깐 손을 멈췄다.

“저 지난주에 인천에 뭐라고 답했죠. 열흘에 한 번이라는 거, 근거 없다고요.”

“임의로 정했다고 썼지.”

“오늘 잰 게 근거 아니에요? 열흘에 6.1이면 하루에 600그램쯤 가라앉는 거잖아요.”

“아니야.”

“왜요.”

“한 번 잰 건 값이야. 두 번 재야 변화고.”

오늘 잰 6.1은 이 깊이에서 열흘 동안 쌓인 양일 뿐이었다. 다음 청소일에 또 재서 비슷하게 나오면 그때 처음으로 속도라고 부를 수 있고, 크게 다르면 열흘이라는 간격이 틀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직 근거가 아니고, 근거의 반쪽인 거예요.”

“반쪽 좋아하네.”

서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 노트에 같은 줄을 옮겨 적었다.

그날 시추 진척은 0미터였다. 깊이는 어제와 같은 484미터였다.

재혁이 노트 맨 위에 굵게 적었다.

「8월 20일. 진척 0미터. 계획된 청소일.」

“0이라고 적는 게 좀 이상해요.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거 같아서.”

“0을 안 적으면 그날은 없던 날이 돼.”

“없던 날이 되면요.”

“열흘에 하루 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열흘에 하루 게을렀던 게 되지.”

2. 반나절

인천은 새벽 3시였다.

문경옥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야간 당직 기사가 공구 가방을 들고 들어왔고, 둘은 인사 대신 시계를 봤다.

3시 10분에 냉매 회수를 시작했다.

이호기 안에 든 냉매를 회수통으로 빨아냈다. 이것부터 하지 않으면 배관을 못 연다. 회수가 끝나는 데 50분이 걸렸다.

회수가 도는 동안 경옥은 새 압축기 상자를 뜯었다. 3시 40분이었다. 뜯자마자 설명서부터 폈다.

“같은 게 아니네.”

같은 모델은 이미 만들지 않았다. 상자에 든 것은 그 뒤에 나온 모델이었다. 다는 자리도 배관 지름도 맞았지만, 용량이 3퍼센트쯤 컸고 윤활유 종류가 달랐다.

“같은 걸 넣는 게 아니에요.”

당직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같다고 칠 수 있는 걸 넣는 거예요.”

4시 5분에 옛 압축기를 뗐다. 스무 해 넘게 이 자리에 있던 쇳덩이였다.

경옥은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었다. 부품 이름, 모델 번호, 용량 차이, 기름 종류. 그리고 그 밑에 한 줄 더 적었다.

「계통에 남은 옛 기름과 섞일 우려 있음. 배관 세척 여부 확인 필요.」

두 기름은 서로 잘 안 섞이고, 섞이면 어느 쪽도 제 일을 못 한다. 새 압축기를 다는 일보다 다는 자리에 옛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더 문제였다.

4시 50분에 장착이 끝났다. 그리고 5시 20분부터 진공 펌프가 돌기 시작했다.

“이게 몇 시간이라고 하셨죠.”

“반나절이요.”

배관 안의 공기와 습기를 다 빨아내야 한다. 습기가 남으면 그 물기가 나중에 팽창밸브 자리에서 얼고, 냉매가 안 돌고, 방 온도가 조금씩 이상해진다. 그게 몇 달 뒤에 표가 난다.

“몇 달 뒤에 표가 나면 어떻게 돼요.”

“그때 아무도 오늘 새벽을 원인이라고 생각 안 해요.”

펌프 소리가 낮게 깔렸다. 계기 바늘은 이미 눈금 왼쪽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다 뽑힌 거 아니에요? 바늘이 끝까지 갔는데.”

“그건 뽑는 중이라는 뜻이지 다 뽑혔다는 뜻이 아니에요.”

경옥은 반나절을 다 채운 뒤에 밸브를 잠그고 20분을 그냥 둘 거라고 했다. 그동안 바늘이 도로 올라오면 습기가 남았거나 어딘가 새는 것이고, 안 올라오면 그때 냉매를 넣는다.

“다 뽑았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못 알아요.”

경옥이 계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안 올라오면 아는 거죠.”

당직 기사가 잠깐 웃었다.

“고치는 게 오래 걸리네요.”

“고치는 거 아니에요.”

경옥이 종이에 시각을 적으면서 말했다.

“바꾸는 거예요. 고치면 이어지는데, 바꾸면 끊겨요.”

이제 반나절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참이었다.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지켜봐야 했다.

3. 30초

오정한은 소자기를 켜기 전에 손목시계를 뺐다.

릴 하나가 데크에 걸려 있었다. 어제 옮긴 2번 릴이 아니라, 서른 해쯤 전에 산 정렬용 시험 테이프였다.

“이거 먼저 뜹니다.”

혼잣말이었다. 작업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험 테이프에는 소리가 없다. 1,000헤르츠, 10,000헤르츠. 사람 목소리도 악기도 아니고 그냥 한 음이 길게 들어 있다. 정한은 그걸 30초 떠서 저장했다.

그런 다음 소자기를 들었다.

헤드는 쇠다. 테이프가 자석 가루를 묻힌 채 그 위를 수십 년 지나가면 쇠가 조금씩 자석이 되고, 자석이 된 헤드는 지나가는 테이프의 높은 소리를 재생할 때마다 조금씩 지운다.

소자기는 그 자화를 흩는 물건인데, 쓰는 순서가 있다. 멀리서 켜고, 켠 채로 아주 천천히 다가가서 헤드에 잠깐 댔다가, 다시 아주 천천히 멀어진 다음에야 끈다.

가까이서 켜거나 가까이서 끄면 그 순간에 오히려 자국이 남는다.

“지우는 기계인데 지우는 순서를 틀리면 더 남습니다.”

소자가 끝난 뒤 정한은 시험 테이프를 다시 걸었다. 그리고 또 30초를 떴다.

두 파일을 나란히 놓으니 소자한 뒤 쪽이 높은 데가 조금 더 살아 있었다. 귀로는 거의 모를 만큼이었다. 그래도 달랐다.

정한은 종이에 적었다.

「8월 20일 헤드 소자. 소자 전 기준음 30초, 소자 후 기준음 30초 저장. 이 날짜 앞뒤로 이 데크는 다른 기계임.」

그리고 어제 뜬 파일을 다시 불렀다.

일요일에 옮긴 파일 맨 앞에 정한은 이 기준음 30초를 붙였다. 소리 앞에 소리가 아닌 것을 30초 붙이는 것이 규칙이었다.

“자가 없으면 나중 사람은 소리를 소리로만 듣습니다.”

그러면 이 소리가 원래 이랬는지 정한이 이렇게 만든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앞에 붙은 30초는 소리가 아니라 자였다.

기준음 파일을 열어 주파수를 읽어 보다가 정한이 멈췄다.

1,000헤르츠짜리가 1,000.2로 나와 있었다.

이 데크는 안 느리다는 뜻이었다.

지난주에 정한은 옮긴 파일의 무음 구간에서 전원 험이 59.6헤르츠에 있는 것을 봤다. 60이어야 할 것이 59.6이면 재생이 녹음보다 느리다는 뜻인데, 그때는 그 집 기계가 빨랐던 건지 이 기계가 느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제 기계는 안 느립니다.”

정한이 종이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러면 그 집 기계가 빨랐던 겁니다. 그건 이제 압니다.”

그러고는 잠깐 자기가 적은 줄을 봤다.

자로 쟀는데 그 자가 옳은지는 어떻게 아는가. 이 시험 테이프도 서른 해를 묵었다. 자기 신호는 약해지고 테이프는 늘어난다. 자도 늙는다.

정한은 그 줄 밑에 이렇게 적었다.

「이 자가 옳은지는 모름. 시험 테이프 제조사·연도 병기. 같은 자를 구하면 맞대 볼 수 있음.」

오후에 대구에서 전화가 왔다. 한동규였다. 넘겨받은 릴 열한 개 중에 하나에서 식초 냄새가 난다고 했다.

“굽지 마세요. 그것만 빼서 통풍되는 데 혼자 두시고요.”

나머지 열 개도 한꺼번에 굽지 말라고 했다. 구운 테이프는 3주 안에 옮겨야 하는데, 열 개를 한 날에 구우면 뒤엣것은 그 안에 차례가 안 온다.

“날짜를 나눠 잡으세요.”

전화를 끊고 정한은 책상 구석의 봉투를 봤다. 지워진 세 글자에 대한 짐작을 적어 넣고 봉해 둔 봉투였다.

오늘도 열지 않았다. 대신 봉투 겉에 날짜와 함께 한 줄을 더 적었다.

「8월 20일. 열지 않음. 사유: 판독 아님. 짐작이 먼저 읽히면 판독을 못 함.」

왜 안 열었는지를 안 적으면, 나중 사람은 정한이 그냥 안 봤다고 알 것이었다.

마감까지 열하루 남아 있었다.

4. 열하루째

유하람은 화요일 오전 10시에 어머니 집에 갔다.

어제 저녁에 다녀갔지만, 오전 방문은 오전 방문대로 갔다. 열하루째였다.

송미강은 앞치마 끈을 갈아 달고 있었다. 낡은 끈을 뜯어내고 새 끈을 대는데, 시침을 먼저 하고 그 위에 박는 순서가 손에 그대로 있었다.

“어제 저녁에 니가 왔었지.”

하람은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

맞는 말이었다. 어제 저녁 5시 40분부터 7시 반까지 하람은 이 집에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제를 기억한 것인지, 요새 하람이 매일 오니까 늘 그랬던 대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매일 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날이나 왔었지 하고 말해도 대개 맞는다.

맞는 말인데, 맞았다고 적을 수가 없었다.

하람은 수첩을 펴고 이렇게 적었다.

「맞았음. 단, 맞은 이유는 모름. 기억인지 늘 하던 말인지 구별 못 함.」

수첩은 어제 저녁부터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앞장을 세로로 반 갈랐다. 왼쪽은 내가 있을 때, 오른쪽은 내가 없을 때.

그리고 그 위에 가로줄을 하나 굵게 그어 놓았다.

「8월 19일부터 저녁 시간대 관찰 추가. 이 줄 위와 아래를 이어서 읽지 말 것.」

열흘치 기록은 전부 오전의 어머니였다. 어제부터 저녁이 붙었으니, 앞으로 무엇이 달라져 보이더라도 그게 어머니가 달라진 것인지 하람이 보는 시간이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당분간은 오전도 그대로 다닌다. 둘을 겹쳐 놓고, 겹치는 동안에는 합치지 않는다.

수첩 맨 뒤에는 짐작을 적어 두는 자리가 따로 있었다. 장을 넘긴 다음 장에 적고 뒤로 접어서 앞장에서 안 보이게 해 둔 자리였다.

거기 적혀 있는 것은 한 줄이었다.

「옛날 집이 2층이었음.」

하람은 오늘 그 밑에 확인하는 방법 세 개를 적었다가 두 개를 지웠다.

어머니에게 묻는다. 지웠다. 물으면 어머니는 대답을 만든다. 만든 대답은 그다음부터 기억 자리에 앉아서 진짜처럼 나온다.

옛날 사진을 보여 준다. 지웠다. 보여 주는 순간 그게 어머니의 기억이 된다. 그러면 어머니가 이층 계단을 기억하는 것인지, 하람이 보여 준 사진을 기억하는 것인지 다시는 못 가른다.

남은 하나는 이것이었다.

「어머니를 지나지 않는 데서 확인할 것.」

옛 주소, 등기 서류, 시장 상인회. 그리고 정숙.

정숙은 지난주에 어머니가 먼저 꺼낸 이름이었다. 연락처는 모르고, 어머니에게 물으면 안 된다.

“확인하는 방법이 어머니를 지나가면, 그건 확인이 아니라 만드는 거야.”

하람은 혼잣말로 그렇게 말하고 수첩을 덮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래층에서 최영숙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제 부탁한 대로 판단은 하나도 없고 시각과 행동만 적혀 있었다.

「6시 5분 문 두 번. 6시 40분 문 한 번. 계단 참에서 잠깐 섰음. 그다음 올라감.」

계단 참이라는 말이 하람의 눈에 걸렸다.

하람은 그 종이를 그대로 오른쪽 칸에 붙였다. 계단 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으면 짐작이 앞장으로 넘어온다.

수첩 뒷장에 하람은 다섯째 줄을 적었다.

「바꾸면 앞엣것하고 못 이어 붙인다. 그래도 바꿔야 하면 줄을 긋는다.」

5. 1.8밀리

남극은 오후였다.

안 파는 날은 정비하는 날이기도 했다. 서진과 재혁은 드릴 머리를 작업대에 눕히고 커터 세 장을 뗐다.

날은 눈으로 보면 멀쩡했다. 서진이 새 커터를 옆에 놓고 높이를 재게 했다.

“1.8밀리요.”

484미터를 파는 동안 날이 1.8밀리 닳아 있었다. 하루로 나누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양이었다.

“이만큼 닳으면 뭐가 달라져요.”

“부스러기 크기.”

무딘 날은 얼음을 뜯는 게 아니라 문지른다. 문지르면 가루가 곱게 나오고, 곱은 가루는 시추액에 오래 떠 있다가 통에 안 담긴 채 아래로 간다.

“그럼 우리 부족분…….”

“그래. 열흘 동안 점점 무딘 날로 판 거야.”

재혁이 새 커터를 봤다.

“그럼 내일부터 부족분이 줄어들겠네요.”

“줄겠지.”

“좋은 거 아니에요?”

“좋아진 게 아니라 날을 바꾼 거야.”

재혁은 그 말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얼굴이 굳었다. 열흘치 숫자가 방금 성격이 달라졌다. 마이너스 10.4라는 누계는 헌 날로 판 열흘의 값이고, 내일부터 쌓이는 값은 새 날로 판 값이다.

“이거 그럼 못 더하는 거예요?”

“못 더해.”

“겹쳐서 재면 되잖아요. 헌 날로 한 토막, 새 날로 한 토막.”

“구멍이 하나야.”

같은 얼음을 두 번 팔 수는 없다. 헌 날이 판 자리는 이미 없어졌고, 새 날은 그 밑을 판다. 두 날이 같은 조건에서 판 결과를 나란히 놓을 방법이 여기에는 없었다.

“인천이면 되잖아요. 옛날 기계랑 새 기계랑 며칠 같이 돌려 보면.”

“인천은 방이 그대로 있으니까. 여기는 파 버리면 없어져.”

재혁이 한참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금을 그어.”

서진이 노트에 굵은 가로줄을 하나 그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적었다.

「8월 20일 오후. 커터 3매 교체. 마모 1.8mm. 이 줄 위와 아래를 한 표에 넣지 말 것.」

“이어 붙일 수 없으면 이어 붙인 척을 하면 안 돼. 여기서부터 다른 거라고 적어 놓는 게 이어 붙이는 것보다 나아.”

그러고는 헌 커터 세 장을 봉투에 넣었다. 봉투에 깊이 구간과 날짜를 적고 상자에 넣었다.

“버리는 거 아니에요?”

“인천 보낼 거야.”

“다 닳은 건데요.”

“다 닳은 게 아니라, 얼마나 닳는지를 아는 유일한 물건이야.”

다음 시즌에 오는 사람은 커터가 몇 미터에 몇 밀리 닳는지 알고 시작한다. 이 봉투가 없으면 그 사람도 484미터를 파고 나서야 안다.

재혁이 작업대를 정리하다가 문득 말했다.

“얼음은 못 겹치는데요.”

“응.”

“부스러기는 겹칠 수 있는데요.”

서진이 돌아봤다.

오늘 훑어 올린 6.1킬로그램은 헌 날이 만든 부스러기고, 그게 지금 체 위에 그대로 있다. 눈금이 다른 체 두 개로 걸러 굵은 것과 고운 것의 비율을 재 두면, 내일 새 날이 만든 것과 맞대 볼 수 있다.

“얼음은 못 겹치지만 부스러기 크기는 겹치잖아요. 반쪽은요.”

“반쪽 좋아하네.”

서진은 또 그렇게 말했고, 또 자기 노트에 같은 줄을 옮겨 적었다.

그날 저녁 인천으로 보낸 보고에는 세 줄이 들어갔다.

「커터 3매 교체. 마모 1.8mm / 484m 기준. 이전 구간 소급 보정 안 함.」

「교체 전후 부스러기 입도 비교 예정. 체 2종 사용. 근거: 얼음은 겹칠 수 없으나 부스러기는 겹칠 수 있음.」

「8월 20일 진척 0m. 계획된 청소일. 훑음 6.1kg(마른 무게, 하한).」

6. 종이부터

인천은 아침 8시였다.

노은재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문경옥을 안 봤다.

책상 위에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은재는 겉옷도 안 벗고 그 종이부터 읽었다.

「3:10 냉매 회수 시작 / 4:05 압축기 탈거 / 4:50 신품 장착 / 5:20 진공 배기 시작 / 8:00 현재 배기 중」

「부품 = 같은 모델 아님. 단종. 후속 모델. 용량 +3%. 윤활유 종류 다름. 계통 잔류유와 혼합 우려.」

「인지일: 8월 20일 03:40. 상자 개봉 시.」

경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을 새운 얼굴이 아니라 밤을 새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은재가 다 읽고 고개를 들었다.

“이거, 다른 기계네요.”

“네.”

“얼굴로 먼저 말 안 하셨어요.”

“안 했어요.”

경옥이 그제야 의자를 돌렸다.

“어땠어요.”

“종이에 없는 건 하나도 못 봤어요.”

은재가 잠깐 멈췄다가 물었다.

“그게 맞는 거죠?”

“그게 맞아요.”

경옥이 말했다.

“종이에 없는 게 있으면, 그건 종이가 모자란 거예요.”

배기는 두 시간쯤 더 남아 있었다. 그 뒤에 밸브를 잠그고 20분을 보고, 그다음에 냉매를 넣고, 그다음에 돌려 볼 참이었다.

“돌아가면 이제 두 대죠.”

“네. 그런데 그때부터가 문제예요.”

용량이 크면 방을 끌어내리는 속도가 다르고, 속도가 다르면 온도 곡선의 모양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이 방의 온도 기록은 열몇 해 동안 같은 두 대가 그린 선이었다.

오늘부터 그 선이 끊긴다.

“그래서 나흘은 같이 돌릴 거예요.”

일호기는 예전 설정 그대로 두고, 이호기만 새것으로 돌린다. 같은 방, 같은 문 여닫음, 같은 사람 드나듦에 대해서 두 기계가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나흘 동안 나란히 적는다.

“겹치는 나흘이 있어야 이 방 온도 기록이 오늘에서 안 끊겨요.”

은재가 서식을 펴서 가로줄을 그었다. 어제 배운 것도 아니고 시킨 것도 아닌데 손이 먼저 갔다.

「2026-08-20 05:20부터 이호기 압축기 교체(후속 모델). 이 줄 위아래를 한 그래프에 그리지 말 것. 병행 구간 8/20~8/24.」

그러고는 서식 아래쪽에 칸을 하나 더 그렸다.

“이건 뭐예요.”

“「바꾼 것」 칸이요.”

그날 이 방에서 사람이 바꾼 것을 다 적는 칸이라고 했다. 부품, 설정값, 물건 놓은 자리, 사람.

“값이 이상해지면 제일 먼저 볼 데가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얼음부터 의심하는데, 얼음은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경옥이 그 칸을 한참 봤다.

“그건 서식이 아니라 일지네요.”

“일지면 안 돼요?”

“돼요.”

경옥이 웃었다.

“안 되는 건 없는 거예요.”

은재가 겉옷을 벗어 걸면서 말했다.

“새벽에 저 안 부르신 거요.”

“네.”

“이제 알겠어요.”

“뭘요.”

“제가 옆에 있었으면, 지금 이 종이를 안 읽었을 거예요.”

진공 펌프는 아직 돌고 있었다. 계기 바늘은 왼쪽 끝에 붙어 있었고, 그게 정말 끝까지 간 것인지는 밸브를 잠가 봐야 알 일이었다.


바꾼다는 것은 같은 자리에 새것을 놓는 일이 아니다. 앞의 것으로 잰 값과 뒤의 것으로 잰 값 사이에 금이 하나 생기는 일이다.

그 금은 새것이 나빠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새것이 좋아도 생기고, 오히려 좋으면 더 크게 생긴다. 그래서 바꾼 다음에 숫자가 좋아지면, 좋아진 것인지 바꾼 것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이어 붙이는 방법은 겹치는 것뿐이다. 옛것과 새것을 얼마 동안 나란히 두고 두 값을 같이 적어 두면, 나중 사람이 그 겹친 자리를 딛고 앞뒤를 건너간다.

겹칠 수 없는 자리도 있다. 판 얼음은 다시 팔 수 없고, 지나간 저녁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럴 때는 이어 붙인 척을 하지 않는다. 금을 긋고, 여기서부터 다른 것이라고 적는다.

금이 그어진 두 줄은 흉해 보인다. 그러나 자국 없이 매끈하게 이어진 한 줄은, 어디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영영 감춘다.

한 번 잰 것은 값이다.

두 번 재야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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