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0화 - 건드림

제10화 「건드림」
1. 98.4밀리
우재혁은 아침 첫 인양 전에 공구함부터 열었다.
정비용 캘리퍼스가 기름종이에 싸여 있었다. 드릴 부품 치수를 잴 때 쓰는 것이었다. 스테인리스, 눈금 0.05밀리.
“그걸로 얼음을 잰다고.”
한서진이 뒤에서 물었다.
“어제 제가 한다고 했잖아요. 구멍은 못 재도 코어는 잰다고.”
“재. 재기 전에 세 개만 정하고.”
서진이 손가락을 폈다.
“어디를 재는지. 언제 재는지. 몇 도에서 맞춘 자인지.”
재혁이 손을 멈췄다.
“자를요? 자를 왜요.”
“쇠는 추우면 줄어.”
서진은 캘리퍼스를 들어 눈금 쪽을 보였다.
“이거 공장에서 20도에서 맞춘 거야. 여기는 영하 25도. 45도 차이면 쇠가 만분의 오쯤 줄어. 100밀리짜리를 재면 0.05밀리.”
“그럼 값이 작게 나오는 거예요?”
“반대야. 자가 줄면 눈금 사이가 좁아져. 같은 걸 대도 눈금이 더 많이 지나가. 크게 읽혀.”
재혁이 종이에 화살표를 그렸다. 자 줄어듦, 화살표, 크게 읽힘.
“0.05밀리면 이 자 눈금이랑 똑같은데요.”
“그러니까 고치지 마. 고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야.”
“그럼 어떡해요.”
“적어. 보정 안 함, 그리고 어긋나는 쪽은 크게 읽는 쪽이라고.”
재혁은 그 두 줄을 먼저 적었다. 값보다 먼저 적힌 줄이었다.
첫 토막이 올라온 것은 8시 12분이었다. 처리대에 눕히고 시추액을 흘려 보낸 뒤, 재혁이 캘리퍼스를 들었다.
“어디를 재요.”
“어차피 버릴 데.”
“네?”
“자 다리 끝이 얼음을 눌러. 영하 25도짜리 얼음도 쇠보다는 물러. 자국 남아.”
서진이 코어 겉면을 손등으로 스쳤다.
“어차피 겉 몇 밀리는 깎아서 버려. 시추액 묻은 데니까. 그러니까 그 버릴 자리를 재는 거야.”
“버릴 데를 재서 안쪽 값을 쓴다고요?”
“안쪽 값을 쓰는 게 아니야. 바깥 지름을 아는 거지. 안쪽은 어차피 안 잴 거잖아.”
재혁이 캘리퍼스를 댔다. 다리가 얼음에 닿는 감각이 장갑 너머로도 왔다. 힘을 조금 주자 눈금이 움직였다. 힘을 뺐다.
“얼마나 세게 대요?”
“손이 그걸 기억할 때까지 연습해. 매번 다르면 매번 다른 값이 나와.”
98.4밀리였다.
“설계는 100인데요.”
“그럼 고리가 더 넓은 거지.”
서진이 노트 뒷장을 펴고 계산했다. 구멍 130, 코어 100일 때 3미터 한 토막에 약 15킬로그램. 코어가 98.4면 고리가 넓어져 15.6킬로그램.
“부족분이 더 커지겠네요.”
“그래.”
“좋아지는 게 하나도 없네요.”
“안 좋아지려고 재는 거야.”
세 번째로 정할 것이 남아 있었다. 언제 재느냐.
“인양하자마자 재면 안 돼.”
“왜요.”
“얼음이 500미터 아래 압력에 눌려 있다가 올라온 거야. 위로 오면서 조금씩 부풀어. 몇 시간, 며칠에 걸쳐서.”
“그럼 재는 순간마다 값이 달라요?”
“그러니까 시각을 고정해. 인양하고 몇 분 뒤에 재겠다고 정해.”
“몇 분이요?”
“네가 정해. 정하고 안 바꾸면 돼.”
재혁이 잠깐 생각했다. 처리대에 눕히고 시추액을 흘려 보내는 데 8분쯤 걸렸다.
“15분요.”
“됐어.”
2. 0도
노은재는 어제 자기가 만든 칸을 다시 보고 있었다.
「모름」 칸과 그 옆의 「왜 모르는지」 칸. 세 줄이 들어가 있었다.
“선생님.”
“네.”
“어제 우리가 0.05도가 분해능이라 그보다 작은 건 판정 안 한다고 정했잖아요.”
“정했죠.”
“그 0.05도가 맞는 건 어떻게 알아요?”
문경옥이 장부를 덮었다.
“그 질문, 나는 안 했어요.”
“제가 늦은 거예요?”
“내가 늦은 거예요. 스물세 해 걸렸으니까.”
경옥이 스테인리스 통에 얼음을 부수어 담기 시작했다. 잘게, 눈보다 조금 굵게.
“뭐 하세요.”
“영도를 만들어요.”
증류수를 붓고 저었다. 얼음이 물에 잠기고 물이 얼음에 잠긴 상태. 슬러시.
“물이랑 얼음이 같이 있으면 그 물은 영도예요.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는 계속 영도고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제일 정확한 온도 중에 하나예요.”
“그냥 물에 얼음 넣은 거잖아요.”
“그냥 넣으면 위는 차고 아래는 미지근해요. 얼음을 잘게 부수고, 물을 얼음이 겨우 잠길 만큼만 넣고, 저어야 돼요. 그리고 30분 기다려요.”
30분 뒤에 기록계 여덟 대를 차례로 담갔다. 감온부만, 5분씩.
3번이 영상 0.12도를 읽었다. 5번이 영하 0.07도. 나머지 여섯 대는 0.03도 안쪽이었다.
은재가 3번을 들고 서 있었다.
“이거 지금까지 계속 쓴 거예요.”
“썼죠.”
“그럼 3번이 적어 놓은 값은 다 0.12도씩 높은 거예요?”
“그건 몰라요.”
“방금 쟀잖아요.”
“영도에서 0.12도 높은 거예요. 우리 방은 영하 30도고요.”
은재가 입을 다물었다.
“온도계는 한 점에서 맞다고 다른 점에서 맞는 게 아니에요. 두 점을 맞춰야 그 사이를 믿어요. 우리는 지금 한 점밖에 없어요.”
“영하 30도짜리 기준점은 못 만들어요?”
“만들려면 장비가 있어야 돼요. 없어요.”
경옥이 3번을 받아 제자리에 걸었다.
“그러면 어제 그 0.06도는요.”
“여전히 판정 못 해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에요.”
은재가 웃었다. 웃고 나서 조금 얼굴을 굳혔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적은 숫자들은 뭐예요.”
“이 기록계가 옳다는 걸 전제로 한 숫자들이에요.”
“그 전제는 어디 적혀 있어요?”
“안 적혀 있어요. 전제라서.”
경옥이 장부를 다시 폈다.
“고치지는 않아요. 지난 값에 0.12를 빼거나 하지 않아요.”
“왜요.”
“우리가 맞춘 게 오늘이니까요. 오늘 알아낸 걸로 어제 숫자를 고치면, 어제 숫자가 어제 것인지 오늘 것인지 모르게 돼요.”
“그럼요.”
“옆에 적어요. 8월 19일에 얼음물로 맞춰 봤고 3번은 이만큼 높았다고. 나중 사람이 빼든 말든 그건 나중 사람이 정해요.”
기록계를 다시 제자리에 거는 데 40분이 걸렸다. 그동안 그 여덟 대는 방을 재지 않았다.
“이거 좀 이상해요.”
“뭐가요.”
“재는 걸 재는 동안에는 방을 못 재잖아요.”
“그래서 오늘 한 거예요.”
경옥이 문 쪽을 봤다.
“내일 새벽에 이호기 바꿔요. 내일은 여덟 대가 다 제자리에 있어야 돼요.”
3. 59.6헤르츠
오정한은 파형을 보고 있었다.
어제 옮긴 파일이었다. 원본 릴은 상자에 들어가 선반에 있었고, 다시 걸 생각은 없었다. 재생 헤드가 조금씩 자석이 되는 것을 안 뒤로 원본은 한 번만 듣는다고 정해 두었다.
무음 구간을 확대하자 아주 낮은 자리에 가느다란 선이 하나 서 있었다.
전원 소리였다. 1983년의 어느 방에서, 벽에 흐르던 전기가 마이크선이나 기계 속으로 스며들어 테이프에 같이 실린 것이다. 아무도 녹음하려고 하지 않은 소리.
우리나라 전기는 초당 60번 흔들린다. 그러니 그 선은 60에 서 있어야 했다.
59.6에 서 있었다.
정한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59.6 나누기 60. 0.9933.
녹음할 때보다 재생할 때가 0.67퍼센트 느렸다는 뜻이었다. 소리 전체가 그만큼 낮게 옮겨져 있었다.
반음이 6퍼센트 조금 안 된다. 0.67퍼센트면 반음의 9분의 1이다. 사람 귀로는 들리지 않는다.
전화가 울렸다.
“선배님, 대구입니다.”
한동규였다. 서른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남한테 적어 준 이름이었다.
“오셨습니까.”
“어제 오셨습니다. 릴 열한 개요. 아버님 유품이라고.”
“열한 개면 두 달은 잡으셔야 합니다.”
“두 달이요?”
“굽는 건 하루면 되는데, 굽고 나면 3주 안에 옮겨야 됩니다. 그러니까 굽는 날짜를 나눠서 잡으셔야 돼요. 한꺼번에 구우면 뒤에 것이 상합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선배님은 지금 뭐 하고 계십니까.”
“헤르츠 보고 있습니다.”
“험이요?”
“59.6에 있습니다.”
“아, 그 집 데크가 빨랐군요.”
“아니면 이 데크가 느리거나요.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릅니다.”
“고치실 겁니까.”
“안 고칩니다.”
“안 들릴 텐데요.”
“안 들립니다. 지금은.”
정한은 종이에 그 숫자를 적었다.
“나중에 이 소리를 다른 소리하고 맞대 볼 일이 생기면 그때는 들립니다.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0.67퍼센트도 어긋나 보이거든요. 그때 쓰라고 숫자만 적어 놓습니다.”
“파일에는 손 안 대시고요.”
“손대면 나중 사람이 제가 뭘 보고 손댔는지를 못 봅니다. 숫자를 적어 놓으면 곱하기 하나면 되고요.”
한동규가 웃었다.
“요새는 그 험으로 녹음 날짜도 찾던데요. 전력망 주파수가 시시각각 조금씩 흔들리는데, 그 흔들리는 무늬를 전력회사 기록하고 맞춰 보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인지가 나온다고.”
“됩니다. 요새 것만.”
“1983년은요.”
“없습니다.”
정한이 창밖을 봤다.
“기술이 없어서 안 되는 게 아닙니다. 그때 아무도 그 값을 적어 놓지 않아서 안 되는 겁니다. 나중에 쓸 데가 있을 줄 몰랐으니까요.”
”…그러네요.”
“없는 거랑 안 적어 놓은 건 나중에 보면 똑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한은 서랍을 열었다.
뒤집힌 채 들어 있는 종이가 있었다. 지워진 세 글자의 후보를 적어 놓은 종이였다. 여전히 뒤집힌 채였다.
정한은 그것을 봉투에 넣고 겉에 적었다.
「열지 마시오」라고 쓰려다가 지웠다.
「1인의 짐작임. 판독 아님.」
그렇게 적고 서랍에 넣었다.
4. 여섯 시
유하람은 월요일 저녁 5시 40분에 도착했다.
열흘째였고, 처음으로 저녁이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지나가다가.”
미강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조금 컸다.
6시가 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6시 10분에 미강이 현관 쪽을 봤다. 하람도 같이 봤다. 아무도 없었다.
“뭐 기다려?”
“아니.”
6시 40분에 한 번 더 봤다.
하람은 묻고 싶은 것을 세어 보았다. 저녁마다 아래층에 왜 가는지, 거기가 어딘 줄 아는지, 옛날 집에 가려던 건지.
셋 다 물으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어머니는 대화를 이어 가려고 대답한다. 모르는 것도 대답한다. 하람이 “옛날 집에 가려고 그랬어?”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응”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그것은 어머니의 대답이 아니라 하람이 넣어 준 대답이 된다.
한 사람의 짐작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먼저 들어가면, 나중에 진짜가 나와도 진짜를 보는 게 아니라 짐작하고 맞춰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만 물었다.
“오늘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싱크대에는 씻어서 엎어 놓은 그릇이 세 개 있었다.
7시 반에 하람이 일어섰다.
내려오는 길에 아래층에 들렀다. 최영숙이 문틈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접힌 자국이 반듯했다.
「토요일 저녁 여섯 시 십 분. 문 두 번 두드리심. 계단으로 내려오심.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웃으심. 오 분쯤 계시다 올라가심.」
「일요일 없음.」
「월요일 없음.」
“판단은 안 적었어요.”
“고맙습니다.”
“근데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내가 이렇게 적는 게 그 양반한테 나쁜 건 아니지요.”
하람이 잠깐 대답을 못 했다.
“제가 못 보는 시간에 어머니가 어떻게 계시는지, 저는 그것만 알고 싶어요.”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람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계단으로 내려오심. 한 층.
1989년까지 살던 집이 2층이었다. 제일시장 뒷골목, 대문 지나 계단 열네 칸. 어머니가 미싱을 놓았던 방이 그 집 안쪽이었다.
하람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수첩을 꺼내 칸을 하나 더 그렸다. 「남이 본 것」 옆도 아니고 「내가 본 것」 옆도 아닌, 장을 넘긴 다음 장에.
「짐작」
그 아래에 한 줄만 적었다.
「옛날 집이 2층이었음.」
적고 나서 그 장을 뒤로 접었다. 앞장을 펴면 안 보이게.
앞장에는 두 줄을 적었다.
「토요일 저녁 여섯 시 십 분. 문 두 번. 계단. 오 분. — 아래층」
그리고 그 밑에.
「월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일곱 시 반. 아무 일 없었음. 단, 내가 있었음.」
수첩 뒷장, 자기 것을 적는 자리에 네 줄째가 들어갔다.
「가 봤다. 내가 가면 그 일이 안 일어난다.」
5. 네 군데
밤 9시, 두 번째 토막이 처리대에 올라와 있었다.
재혁이 캘리퍼스를 들고 서 있는데 서진이 옆에 섰다.
“한 군데만 재?”
“아침에는 한 군데 쟀는데요.”
“그럼 그건 지름이야.”
“네.”
“네 군데 재면 그건 모양이고.”
재혁이 십자로 두 방향을 잡고, 토막 위쪽과 아래쪽에서 각각 쟀다.
98.4. 99.2. 98.5. 99.3.
“안 맞아요.”
“안 맞는 게 아니라 안 둥근 거지.”
서진이 코어 끝면을 손으로 짚었다.
“구멍이 얼음 속에 있잖아. 얼음이 옆에서 계속 밀어. 미는 힘이 사방에서 똑같으면 동그랗게 닫히는데, 한쪽이 세면 그쪽부터 닫혀. 그러면 구멍이 찌그러져. 구멍이 찌그러지면 그 안에서 나온 코어도 찌그러져.”
“드릴은 동그란데요.”
“드릴도 흔들려. 흔들리면서 깎으면 자기보다 크게 깎아.”
재혁이 네 값을 다 적었다. 평균을 낼까 하다가 손을 멈췄다.
“평균 적을까요.”
“평균만 적으면?”
”…모양이 없어져요.”
“그래. 네 개 적고, 밑에 평균 적어. 평균은 오늘 계산하는 데 쓰고, 네 개는 내일 이후를 위해서 적는 거야.”
“내일 이후요?”
“오늘 0.9밀리 찌그러진 건 아무 얘기도 아니야. 근데 이게 600미터에서 1.5밀리 되고 700미터에서 2밀리 되면 그건 큰 얘기지.”
“뭐가 큰 얘긴데요.”
“구멍이 우리 생각보다 빨리 닫히고 있다는 얘기. 그건 시추액이 모자라다는 얘기고, 그건 드릴이 언젠가 낀다는 얘기야.”
재혁이 그 줄까지 적었다.
“그런데 오늘 값은 오늘 쓸모가 없잖아요.”
“오늘 쓸모없는 걸 오늘부터 적어야 나중에 쓸모가 생겨. 나중에 쓸모 생겼을 때 적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만 알아.”
인천으로 보낼 답신에 두 줄을 더 붙였다.
「478미터 이전 구간은 코어 지름 미실측. 소급 보정 안 함.」
「484미터부터 매 토막 네 군데 실측. 인양 후 15분 시점. 자는 20도 기준 강철제, 저온 보정 안 함. 어긋나면 크게 읽히는 쪽.」
재혁이 종이 한 장을 따로 썼다. 어디를 재는지, 언제 재는지, 어떤 자로 재는지, 얼마나 세게 대는지.
제목을 「측정 방법」이라고 썼다가 줄을 긋고 다시 썼다.
「이렇게 재었음.」
서진이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잠시 뒤에 자기 노트를 펴서 같은 제목을 옮겨 적었다.
그날 두 토막, 484미터였다.
6. 그때 없던 사람
밤 10시, 저온시료동 앞방.
내일 새벽 3시에 이호기 압축기를 바꾼다. 냉매를 빼고, 반나절 진공으로 습기를 뽑고, 다시 채운다.
경옥이 순서표를 벽에 붙이고 있었다.
“저 몇 시에 올까요.”
“아침에 오세요.”
은재가 순서표에서 눈을 뗐다.
“새벽에 있으면 안 돼요?”
“있어도 돼요. 야간 기사님도 계시고요.”
“그런데요.”
“있으면 은재 씨도 새벽 세 시 사람이 돼요.”
경옥이 압정을 하나 더 눌렀다.
“내가 새벽에 값을 읽고, 은재 씨가 아침에 그 종이만 보고 값을 읽으면 두 사람이 두 번 보는 거예요. 은재 씨가 옆에 있으면 은재 씨는 내가 읽는 걸 보는 거고요. 그건 한 번이에요.”
“어제 그거네요. 같은 데서 나온 두 개.”
“그거예요.”
은재가 잠깐 서 있다가 「모름」 칸에 두 줄을 더 적었다.
「기록계가 언제부터 어긋났는지 모름. 왜: 그동안 안 맞춰 봐서.」
「영하 30도에서도 맞는지 모름. 왜: 맞춰 볼 기준점이 없어서.」
“두 번째 건 처방이 뭐예요?”
“사면 돼요. 값이 얼마인지는 나도 몰라요. 그것도 적어 놓으세요.”
경옥이 서식 맨 아래에 한 줄을 넣었다.
「이 값은 8월 19일에 영도에서 맞춰 본 기록계로 잰 것이다.」
“이걸 왜 값 옆에 적어요?”
“값은 혼자 못 서요.”
경옥이 펜을 놓았다.
“숫자만 있으면 그건 그냥 숫자예요. 어떻게 쟀는지가 붙어 있어야 그게 값이 돼요. 어떻게 쟀는지가 없으면 나중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쟀다고 치고 읽어요.”
문을 잠그고 나오면서 경옥이 한마디를 더 했다.
“내일 아침에 오면 나 보지 말고 종이부터 보세요.”
“왜요.”
“내가 얼굴로 먼저 말해 버리면 은재 씨가 종이를 안 읽어요.”
은재가 복도등을 껐다.
“제일 중요한 사람이 그때 없던 사람이라는 거, 좀 서운한데요.”
“서운한 거 맞아요.”
경옥이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그 자리는 아무나 못 서요. 안 봐야 서니까.”
재려면 건드려야 한다. 자를 대면 그 자리가 눌리고, 문을 열면 방이 더워지고,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조금 지워진다.
그래서 값에는 값만 적으면 안 된다. 어떻게 쟀는지가 붙어 있어야 그것이 값이 된다. 붙어 있지 않은 숫자는, 나중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쟀다고 치고 읽는다.
없는 것과 적어 놓지 않은 것은 나중에 보면 똑같다.
가 보면 알게 되지만, 가 본 그 시각은 내가 있는 시각이 된다. 내가 있는 동안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이렇게 적는다.
아무 일 없었음.
단, 내가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