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7화 - 데움

제7화 「데움」

1. 466미터

아침 여섯 시에 드릴이 저절로 올라왔다.

인양은 40분 걸렸고, 올라온 드릴의 부스러기 통은 뚜껑까지 꽉 차 있었다. 스물두 시간 동안 무엇이 붙잡고 있었는지가 그것으로 끝났다.

한서진은 그 통을 비우지 않고 그대로 저울에 올렸다.

“재혁아, 종이.”

우재혁이 노트를 폈다.

“통 무게 빼고 열여섯 킬로 조금 넘어. 적어.”

“이걸 왜 재요?”

“어제 것까지 들어 있으니까. 오늘부터는 한 토막 하고 한 번씩 잴 거야.”

서진이 장갑 낀 손으로 통 안을 긁어냈다. 얼음 가루가 아니라 거의 젖은 모래 같았다. 시추액이 배어 무거웠다.

“계산은 이래. 우리가 뚫는 구멍이 지름 13센티고, 코어로 남기는 게 10센티야. 그 사이 고리만 부스러기가 되는 거지. 3미터 한 토막이면 열다섯 킬로쯤 나와.”

“열다섯이요?”

“응. 통은 그거 하나 겨우 받아. 그러니까 두 토막을 연달아 하면 두 번째 건 갈 데가 없어. 넘친 건 드릴 옆으로 새서 위에 쌓이고.”

재혁이 통을 다시 봤다. 통은 생각보다 작았다.

“그럼 원래부터 한 토막마다 비웠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얕을 땐 시추액이 묽어서 남은 것도 떠서 같이 올라왔어. 지금은 아니야. 밑으로 갈수록 액이 차가워지고 되직해져. 데려오는 힘이 줄어.”

“그건 어제 들었어요.”

“어제는 이유였고 오늘은 방법이야.”

첫 토막을 내렸다. 깎고, 올리고, 통을 열었다. 저울이 13.2를 가리켰다.

“열다섯이어야 하는데 열셋이에요.”

“그럼 1.8킬로가 아래 있는 거야. 적어.”

“안 올라온 걸 어떻게 적어요?”

“안 올라온 건 없어진 게 아니라 아래 있는 거야. 없어졌다고 적으면 다음 사람이 안 찾아.”

두 번째 토막은 14.1이 나왔다. 세 번째는 못 했다. 통을 비우고 저울에 올리고 노트에 적는 데 매번 스무 분이 더 붙었고, 그만큼 하루가 짧아졌다.

깊이는 466미터가 됐다. 하루에 6미터.

“어제 못 한 12미터는요?”

“메우는 건 없어.”

“네?”

“내일 24미터 하면 오늘까지 한 거로 되는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무리한 날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오늘 것만 있어.”

재혁이 노트에 6미터라고 적었다. 어제 적은 0미터 바로 아래였다.

2. 마흔 분

인천의 저온시료동은 318일째였다. 첫 절단까지 47일.

문경옥은 계획서 한 장을 은재 앞에 놓았다. 제목은 「제상 실시 계획」이었고, 실행 시각은 내일 새벽 세 시로 적혀 있었다.

“오늘 밤 열 시부터 설정을 2도 내려요. 영하 32까지 내려놓고 시작할 거예요.”

“더 춥게요? 어차피 올릴 건데요.”

“제상은 위로만 가요. 출발을 아래에서 하는 거예요.”

노은재가 계획서를 받아 읽었다. 예상 최고 온도가 영하 26도, 소요 시간 40분이라고 되어 있었다.

“근데요.”

“네.”

“다음 주에 이호기 부품이 오잖아요. 두 대면 제상해도 0.4도만 오른다면서요. 그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경옥은 잠시 계획서를 봤다.

“맞아요. 다음 주에 하면 훨씬 안전해요.”

“그런데요?”

“다음 주까지 일호기가 갈지는 아무도 몰라요. 성에는 지금도 끼고 있고, 끼는 속도는 우리가 못 봐요.”

”…”

“안전한 걸 고르는 게 아니라 아는 걸 고르는 거예요. 오늘 하면 몇 도까지 올라가는지를 우리가 정해서 알 수 있어요. 다음 주까지 기다렸다가 일호기가 서면, 그건 우리가 정한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난 거고요.”

은재가 사물함 쪽으로 가서 통을 하나 들고 왔다. 알루미늄 코어 통이었는데 라벨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거 어제 만들었어요.”

경옥이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못 쓰는 얼음 조각이 채워져 있었다. 재작년에 조각으로 깨져 들어와 값을 못 낸 것들이었다. 그 사이에 온도 기록계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값을 못 쓰는 얼음이라도 열은 똑같이 받아요. 통도 똑같고요.”

”…이걸 어디 놓으려고요.”

“셋째 줄 가운데요. 벽 온도계 바로 옆에요.”

경옥은 통을 한참 들고 있었다.

“은재 씨.”

“네.”

“우리가 스물세 해 동안 뭘 재 왔는지 알아요?”

“온도요.”

“방 온도요. 얼음 온도를 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

“벽에 붙은 온도계는 공기를 재요. 공기는 금방 오르고 금방 내려요. 통 안에 든 건 안 그럴 거예요. 그런데 얼마나 안 그런지를 우리가 몰라요.”

경옥은 서식 뭉치를 세었다. 스물여덟 장. 줄마다 한 장씩.

그리고 한 장을 더 얹어 스물아홉 장으로 만들었다.

3. 열다섯 날

오정한의 작업실에는 새로 온 릴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의뢰인이 아버지 방 장롱 위 칸에서 더 찾아냈다는 것들이었다.

이관 마감까지 열닷새.

정한은 첫 번째 릴의 뚜껑을 열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한 번 맡고, 케이스를 덮었다가, 다시 열고 한 번 더 맡았다.

식초 냄새였다.

“이건 못 굽습니다.”

혼잣말이었지만 소리 내서 했다. 굽지 않기로 한 것을 소리로 한 번 정해 두는 습관이었다.

이 릴은 바탕이 아세테이트였다. 세월이 가면 바탕 자체가 삭으면서 식초 냄새를 냈다. 물러지는 것과 삭는 것은 달랐다. 물러진 테이프는 당기면 늘어났고, 삭은 테이프는 당기면 끊어졌다.

“물러진 건 늘어나고, 삭은 건 끊어져요.”

정한은 릴을 조명 아래로 가져갔다. 감긴 테이프의 옆면이 매끈하지 않고, 가운데 허브에서 바깥으로 뻗은 자국이 별처럼 나 있었다. 바탕이 줄어들면서 감긴 채로 뒤틀린 것이었다. 그대로 기계에 걸면 첫 바퀴에서 갈라진다.

그는 릴을 통풍이 되는 선반에 옮겨 놓았다. 밀폐 상자에는 넣지 않았다.

“봉해 두면 자기가 낸 냄새를 자기가 또 먹습니다.”

저온실은 봉해서 지키고, 이건 열어 놓아야 지켜지는 것이었다. 같은 말이 어디서는 맞고 어디서는 정반대였다.

두 번째 릴은 바탕이 폴리에스터였고, 손끝에 진득한 것이 묻었다. 이건 구워야 했다. 그는 오븐을 50도에 맞추고 여덟 시간을 걸어 두었다. 내일 아침에 꺼내면, 거기서부터 옮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두 달, 짧으면 삼 주였다.

마감까지 열닷새. 시간은 맞았다.

오븐 문을 닫고, 정한은 책상 위의 사진들 앞에 앉았다. 케이스 옆면의 지워진 자국이었다.

어제 현미경으로 알아낸 것은 하나였다. 오른쪽 세로획이 나중에 그어진 것이라는 것. 먼저 그은 획이 만든 종이 둔덕을, 나중 획이 밟고 넘어가 있었다.

그는 종이에 세로획 하나를 긋고 그 오른쪽에 또 하나를 그었다. 그 두 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글자를 적어 나갔다. 여섯 개쯤 적었을 때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

“후보를 좁히는 건 읽는 게 아니지.”

책상 반대편에는 나흘 전에 뽑아 놓은 다른 종이가 있었다. 지운 자리에 남은 여자 목소리의 구간표였다. 21분 40초부터 32분 10초까지. 억양만 있고 단어는 하나도 없는 것.

한동안 두 종이가 같이 놓여 있었다.

정한은 여자 목소리 쪽 종이를 서랍에 넣었다. 두 개를 한 책상에 올려 두면, 언젠가 자기가 둘을 잇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 두 개를 붙이면 아는 게 하나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하나 늘어.”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서는 알아냈습니다. 오른쪽 획이 나중입니다.”

”…그러면 뭐가 됩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안 됩니다.”

”…”

“근데 이건 안 바뀌는 겁니다. 나중에 누가 다른 걸 하나 더 알아내면, 그 사람은 이것부터는 안 해도 됩니다.”

4. 이레째

하람은 이날 오전에 어머니 집에 갔다. 여태까지는 늘 오후였다.

전날 밤에 수첩을 처음부터 다시 읽다가 알아챈 것이 있었다. 다섯 줄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잘된 날은 전부 아침이나 낮이었다.

일요일 낮, 컵을 깬 것을 낮잠 뒤에 스스로 말했다. 월요일 아침, 단을 3센티로 되박음질 두 번 해서 박았다. 화요일 저녁, 서랍을 다 꺼내 놓고 못 넣었다. 목요일 저녁, 정숙이라고 불렀다.

한 줄에 요일만 적혀 있고 시각이 없었다. 하람은 다섯 줄 옆에 뒤늦게 시각을 적어 넣었다.

「오후 늦게가 어렵다.」

그 아래에 한 줄 더 적었다.

「오늘부터 시각도 적을 것.」

문을 열자 국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에는 냄비가 두 개 올라가 있었다. 두 개 다 같은 국이었다. 하나는 뚜껑이 덮여 있었고, 하나는 열려 있었다. 두 개 다 식어 있지 않았다.

“엄마, 이거 두 번 끓였어?”

“아까 데워 놨는데 안 데운 줄 알고.”

미강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했다. 하람은 가스 밸브를 확인했다. 잠겨 있었다. 두 번 켰고 두 번 껐다.

“두 번 데운 국은 맛없어.”

“맛은 없어도 탄 건 아니야.”

하람은 냄비 두 개를 그대로 두었다. 하나를 치우면 다음부터는 두 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밥을 먹는데 미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하람아.”

하람의 손이 멈췄다.

이레 만이었다. 아니, 이레보다 더 오래였다. 목요일에는 정숙이라고 불렀고, 그 앞 며칠은 아예 안 불렀다.

“응.”

“국이 싱겁지.”

“아니야. 괜찮아.”

하람은 밥을 계속 먹었다. 목이 아팠는데 티 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른 것이 어제를 취소하지는 않는다는 걸 하람은 알고 있었다. 좋아진 게 아니라 폭이 넓어진 것이었다. 좋은 날이 더 좋아지면 나쁜 날도 더 나빠진다. 둘은 같이 온다.

설거지를 하고, 수첩을 폈다.

「금요일 오전 열한 시. 하람이라고 불렀음. 국을 두 번 데웠음. 불은 두 번 다 껐음.」

여섯 줄째였다.

그러고 하람은 수첩을 뒤집어, 맨 뒷장부터 거꾸로 한 줄을 적었다.

「이레째. 오늘은 오전에 왔다.」

앞쪽은 어머니 것이었고 뒤쪽은 자기 것이었다. 왜 나눠 적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한 장에 같이 적어 놓으면 나중에 어느 게 누구 것인지 못 가릴 것 같았다.

5. 1,100미터

남극의 밤 열한 시, 캠프 사무동에서 서진은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캠프 일보는 이미 보냈다. 「진척 6미터. 부스러기 회수 13.2kg / 14.1kg. 계산치 대비 각각 1.8kg, 0.9kg 부족.」

지금 쓰는 건 그것과 별개였다.

첫 줄을 썼다.

「2019년, 1,100미터에서 케이블이 끊어졌다.」

읽어 보고 지웠다.

「2019년, 1,100미터에서 당기기로 결정했다.」

또 지웠다.

「2019년, 1,100미터에서 내가 당기자고 했다.」

이번에는 두지 않고 다음 줄로 넘어갔다.

재혁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가 종이를 봤다.

“그거… 보고서예요?”

“자료야.”

“이거 남으면 선배한테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안 좋지.”

서진은 펜을 놓지 않았다.

“근데 안 남으면 다음 사람이 또 당겨.”

”…”

“그때 나한테 남은 기록이 뭔지 알아? 장력계 최대치하고 케이블 절단, 두 줄이야. 왜 당겼는지는 아무 데도 없어. 그래서 나는 그게 내 성격 때문인 줄 알았어.”

“아니었어요?”

“배 날짜 때문이었어. 삼월에 배가 뜨고, 그 전에 코어를 실어야 하고, 못 실으면 시즌 하나가 날아가고. 그 밑에서 사람이 서 있으면 당기게 돼 있어. 나를 민 건 드릴이 아니라 달력이었어.”

서진은 종이 아래쪽에 표를 그렸다. 그날의 시각별 장력, 대기 시간, 판단한 사람, 판단한 이유. 이유 칸이 제일 넓었다.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달았다. 「사고 보고」라고 썼다가 지우고, 「1,100미터에서 있었던 일」로 바꿨다.

그리고 두 번째 종이에 개정안을 적었다. 부스러기 통은 한 토막마다 비운다. 비울 때마다 무게를 잰다. 계산치보다 적으면 그 차이를 적는다.

세 번째 종이에는 한 줄뿐이었다.

「이번 시즌 목표를 800미터에서 760미터로 내립니다.」

“목표를 내리는 것도 적어요?”

“제일 먼저 적어야지. 안 적고 그냥 못 하면, 인천에서는 우리가 게을렀는지 못 할 이유가 있었는지를 몰라.”

재혁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56일 남았고 하루 6미터면 796인데요.”

“6미터는 지금 얘기야. 600미터 넘어가면 왕복이 50분이 되고, 700이면 한 시간이야. 뒤로 갈수록 하루에 두 토막도 못 해.”

“그럼 브리틀존은요? 800부터라면서요.”

“안 들어가.”

”…다행 아니에요?”

“다행이야. 반쯤 들어가서 끝나는 게 제일 나빠.”

서진은 컵을 내려놓았다.

“브리틀존 코어는 올라오자마자가 제일 잘 튀어. 시추동에 며칠 눕혀 놨다가 포장해야 돼. 그런데 시즌 끝물에 걸리면 그 며칠이 배 날짜랑 겹쳐.”

“…2019년이랑 같네요.”

“응. 같아.”

서진은 종이 맨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이 종이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대한 것이다.」

6. 새벽 세 시

밤 열 시부터 방을 내렸다. 새벽 두 시 오십 분에 벽 온도계는 영하 32.1도였다.

경옥과 은재는 방 안이 아니라 밖 복도에 서 있었다. 안에서 지켜보는 건 금지였다.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만큼 방이 데워졌다.

세 시 정각에 제상이 걸렸다.

유리창 너머로 천장의 열교환기가 보였다. 하얗게 덮여 있던 성에가 조금씩 색을 잃더니, 회색이 되고, 젖은 색이 됐다.

그리고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은재가 유리에 가까이 갔다.

“저 여기서 물 처음 봐요.”

“나도 매번 처음 같아요.”

물은 아래 받이로 떨어져 배관으로 나갔다. 성에가 담요처럼 덮고 있던 관이 드러나면서 검은 금속이 보였다. 40분 예정이었는데 44분이 걸렸다.

세 시 사십사 분에 제상이 끝나고 일호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방 온도는 그때부터 내려갔다.

아침에 둘은 방 안에 들어가 스물아홉 장을 받아 적었다.

최고 온도는 줄마다 달랐다. 천장 쪽 위 칸이 영하 25.8도, 문에서 제일 먼 아래 칸이 영하 27.9도. 벽 온도계는 영하 26.6도를 가리켰다. 벽 숫자는 여전히 가운데 값일 뿐이었다.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은재가 셋째 줄에서 라벨 없는 통을 꺼내 기록계를 뽑았다. 판독기에 꽂고, 둘이 같이 화면을 봤다.

“…0.4예요.”

“뭐가요.”

“공기는 5.5도 올랐는데, 통 안은 0.4도요.”

경옥이 화면을 당겨 봤다.

“최고점이 언제예요?”

”…”

은재가 두 번 세었다.

“다섯 시 오십 분이요.”

“제상은 세 시 사십사 분에 끝났는데요.”

“두 시간 십 분 늦어요.”

방 안이 조용했다. 냉동기 도는 소리만 났다.

경옥은 판독기를 든 채로 한참 서 있었다.

“스물세 해예요.”

“네?”

“내가 여기서 스물세 해 동안 온도 이상을 여섯 번 겪었어요. 여섯 번 다 몇 도까지 갔는지를 적어 놨고, 그걸 볼 때마다 무서웠어요.”

”…”

“그게 다 방 온도였어요. 얼음이 실제로 받은 건 그거의 십분의 일도 안 되고, 그것도 두 시간 뒤에 왔어요.”

“그럼… 지금까지 걱정한 게 다 헛거예요?”

“아니요.”

경옥이 판독기를 내려놓았다.

“반대예요. 얼음은 늦게 데워지고 늦게 식어요. 그러니까 무서운 건 한 번 오른 게 아니라 두 번째예요. 얼음이 아직 안 식었는데 또 오르면,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으로 겹쳐요.”

”…이호기 정지가 그저께였어요.”

“네. 그저께랑 오늘이 겹쳤는지 안 겹쳤는지를, 우리는 오늘 처음으로 잴 수 있게 된 거예요.”

2003년은 여전히 못 풀었다. 그해 노트에는 날짜만 있고 숫자가 없었다. 이제는 그 숫자가 있었어도 그게 방 숫자였을 거라는 것까지 알게 됐지만, 없는 건 없는 거였다.

은재가 스물아홉 번째 장 아래쪽 빈칸에 자기 글씨로 한 줄을 적었다.

「이 통은 시료가 아님. 값을 얻기 위해 자리를 하나 비워 둔 것임.」

경옥이 그 줄을 읽었다.

“은재 씨.”

“네.”

“다음엔 두 개 만들어요. 위 칸에 하나, 문 옆에 하나.”

“통 두 개가 시료 자리를 먹는데요. 3월에 다섯 통이 자리가 없잖아요.”

“알아요.”

경옥이 서식을 정리해 클립으로 물렸다.

“자리를 하나 비워 둬야 나중에 아는 게 생겨요. 꽉 채워 놓으면, 다 지켰는데 뭘 지켰는지를 몰라요.”


지키는 일이 늘 차게 두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것은 데워야만 나온다. 굳어 버린 것은 50도에 여덟 시간을 두어야 겨우 한 번 돌릴 수 있게 되고, 관을 덮은 성에는 방을 데워야 떨어진다. 반대로 어떤 것은 데우는 순간 끝난다. 삭은 것을 구우면 남는 건 냄새뿐이다. 그래서 데우기 전에 먼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냄새를 두 번 맡는다.

정해 놓고 나빠진 것과 그냥 나빠진 것은 같은 숫자여도 다른 일이다. 하나는 뒤에 종이가 있고 하나는 없다. 종이가 있으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자료가 되고, 자료가 된 것은 다음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손을 멈추게 한다.

데워진 것은 늦게 데워지고 늦게 식는다. 그래서 무서운 것은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다. 겉이 다 식었는데 속이 아직인 것을, 겉만 보고 다 지나갔다고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을 두 번 켠 국은 맛이 없다. 그래도 탄 것은 아니다.

두 번인 걸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기록이다.

댓글

처음 쓰는 닉네임이면 자동 등록됩니다. 같은 닉네임 재사용/삭제엔 같은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