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5화 - 섞임

제5화 「섞임」

1. 460미터

한서진이 노트를 넘겨 보고 있었다.

우재혁이 여덟 시간을 자고 나와서, 자기 노트가 남의 손에 펼쳐져 있는 것을 봤다.

”…보셨습니까.”

“열두 미터 했네.”

“네.”

“세 번째 토막에서 장갑 벗고 2분 40초.”

”…네.”

“그것도 적었고.”

“네.”

서진이 노트를 덮어 처리대에 놓았다.

“잘했어.”

재혁이 잠깐 멈췄다.

“혼날 줄 알았습니다.”

“90초 넘긴 건 잘못한 거야. 적은 건 잘한 거고.”

서진이 장갑을 끼며 말했다.

“두 개를 따로 세. 같이 세면 다음부터는 안 적게 돼.”

그날 아침에 세 토막을 더 냈다. 깊이가 460미터가 됐다.

서진이 마지막 토막을 처리대에 눕히고, 밑에 있는 등을 켰다. 얼음 속으로 빛이 지나가면서 결이 드러났다. 손톱 너비보다 조금 좁은 줄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몇 년 전 겁니까.”

“얼음은 천팔백 해쯤. 공기는 천육백 해쯤.”

“이백 해 차이요.”

“이백다섯 해. 처음에 말했지.”

재혁이 얼음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럼 이건 천육백 해 전 여름 공깁니까, 겨울 공깁니까.”

“둘 다 아니야.”

서진이 등을 조금 옆으로 밀었다.

“위에 눈이 쌓인 층 있잖아. 예순일곱 미터까지는 구멍이 다 이어져 있어서 공기가 위아래로 들락날락해. 그 안에서 섞여.”

“섞인다고요.”

“응. 그리고 기포도 한 번에 딱 닫히는 게 아니야. 어떤 건 예순 미터에서 닫히고 어떤 건 일흔 미터에서 닫혀. 그러니까 한 기포 안에 든 공기가 한 해 치가 아니야.”

“몇 해 칩니까.”

“여기는 눈이 아주 조금 와. 일 년에 손가락 한 마디도 안 와. 그러니까 폭이 넓어. 백몇십 해쯤 섞여 있다고 봐.”

재혁이 얼음에서 얼굴을 뗐다.

“그럼 우리가 재는 게 천육백 해 전 공기가 아니라…”

“천육백 해 언저리 백몇십 해의 평균이야.”

“한 해 만에 확 변한 건 못 봅니까.”

“여기선 못 봐. 뭉개져서 나와.”

서진이 얼음을 두 손으로 받쳐 통에 넣었다.

“그린란드는 눈이 많이 와서 폭이 좁아. 거기선 몇십 해 단위로 봐. 대신 오래된 건 없어. 아래가 얕아.”

“자세히 보려면 거기, 멀리 보려면 여기입니까.”

“응.”

“둘 다는 안 됩니까.”

“안 돼. 그래서 둘 다 파는 거야.”

재혁이 통 뚜껑을 눌러 닫았다.

“얼음 자체로도 알 수 있는 게 있어.”

서진이 라벨에 깊이를 적으면서 말했다.

“물에는 무거운 산소가 조금 섞여 있어. 바다에서 증발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거운 쪽이 먼저 비나 눈으로 떨어져. 추울수록 더 일찍 떨어지고.”

“그럼 여기 오는 눈에는 무거운 게 적겠네요.”

“응. 추운 해에는 더 적어. 그래서 얼음 속 산소 비율을 재면 그때가 얼마나 추웠는지 나와.”

“온도계네요.”

“온도계 없던 시절의 온도계야.”

서진이 펜 뚜껑을 닫았다.

“그것도 평균이고.”

2. 영하 23.8도

노은재의 전화가 새벽 2시 40분에 울렸다.

저온시료동 이호기가 멎었다는 알람이었다. 은재는 연구소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살았고, 택시를 못 잡아서 40분 만에 도착했다.

정전은 아니었다. 압축기 한 대가 그냥 선 거였다. 일호기는 돌고 있었다.

은재는 문 앞에 서서 안 열었다.

유리창 너머로 온도계 숫자만 봤다. 영하 26.4도였다.

당직 기사가 부품을 갈고, 이호기가 다시 돌기 시작한 것이 5시 50분이었다. 그사이 벽 온도계가 제일 높이 올라간 값이 영하 23.8도였다.

문경옥이 아침 8시에 왔다. 은재가 그때까지 복도에 앉아 있었다.

경옥이 코트도 안 벗고 물었다.

“몇 도까지 갔어요.”

“영하 이십삼 점 팔이요.”

“얼마나요.”

“세 시간 이십 분입니다.”

경옥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코트를 벗었다.

“얼음은 안 녹았습니다.”

은재가 말했다.

“안 녹았죠.”

경옥이 장부를 폈다.

“근데 안 녹았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건 아니에요.”

“영하 이십삼 도인데요.”

“깊은 데서 나온 얼음은요, 압력 때문에 기포가 기포로 안 있어요. 공기가 얼음 결정 안에 끼어들어 가 있어요. 꺼내 놓으면 그게 몇 해에 걸쳐서 다시 기포로 돌아와요.”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돌아오는 속도가 온도를 타요. 따뜻해지면 빨라져요.”

경옥이 장부에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얼음에는 눈에 안 보이는 금이 있어요. 그 금을 따라서 기체가 조금씩 나가요. 이산화탄소가 제일 먼저 어긋나요. 얼음에 잘 녹는 기체라서요.”

“그럼 이 통들 다 못 씁니까.”

“써요.”

경옥이 은재를 봤다.

“대신 나중에 값이 이상하게 나올 때, 그게 원래 그런 건지 오늘 새벽 때문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적는 거예요.”

“얼음이 말해 주지 않습니까. 자기가 몇 도까지 갔었는지.”

“안 해요.”

경옥이 펜을 들었다.

“종이가 해요.”

은재가 잠깐 말이 없다가 물었다.

“문 안 연 건 잘한 겁니까.”

“그게 제일 잘한 거예요.”

경옥이 장부에서 눈을 안 뗐다.

“열면 사람 몸 온도랑 복도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와요. 삼 분이면 이호기 세 시간보다 나빠요.”

이호기 부품은 다음 주에 온다고 했다. 그때까지 일호기 한 대로 영하 30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유지는 되는데, 여유가 없었다.

재우기 시작한 지 316일째였다. 절단까지 49일이었다.

3. 반대 방향

오정한이 어제 찾은 구간을 다시 걸었다. 21분 40초부터 32분 10초까지, 사람 말이 없는 구간이었다.

거꾸로 돌리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은 있는데 단어가 하나도 안 잡혔다.

정한이 볼륨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의뢰인에게 전화가 왔다. 정한이 어제 남긴 말에 대한 답이었다.

“지워진 거면 안 들으셔도 됩니다.”

“지운 건 그쪽 아버님이 아닐 겁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1983년에 방송국에서는 테이프를 지우고 다시 썼습니다. 비쌌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릴은 원래 다른 데서 쓰던 겁니다.”

”…그럼 그 여자 목소리는요.”

“모릅니다.”

정한이 헤드폰을 목에 걸었다.

“안 듣는 게 나은지 아닌지는 제가 정할 일이 아니라서요. 옮겨는 놓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한이 왜 단어가 안 잡히는지를 종이에 적었다.

지운 소리는 없어진 게 아니라 60데시벨쯤 작아진 거다. 작아지면 잡음 바로 위에 걸린다. 사람 말에서 자음은 원래 제일 작고 제일 짧다. 모음은 크고 길다. 그러니까 작아지면 자음부터 잡음에 묻힌다.

억양은 모음이 만든다. 그래서 억양은 남고 말은 안 남는다.

거기다 이 테이프는 폭을 반으로 나눠 양쪽 방향으로 쓰는 물건이었다. 뒤집어 걸었던 흔적이 있으니, 지금 헤드가 지나가는 자리에 지운 소리의 옆자락이 조금 걸려 들어온다. 앞 소리와 뒤집힌 소리가 한 자리에서 같이 들리는 것이다.

정한이 그 문장을 적고 밑줄을 그었다.

두 방향이 한 자리에 있다.

오후에는 케이스를 다시 꺼냈다. 옆면에 연필로 썼다가 지운 자국이 있었고, 이틀 전에 조명 방향만 바꿔 여덟 장을 찍어 뒀다.

첫 글자의 세로획을 확대해서 보다가, 정한이 화면을 멈췄다.

획이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가 아주 조금 어긋나서 겹쳐 있었다.

한 번 쓰고, 지우고, 같은 자리에 다시 쓴 것이다.

정한이 의자를 뒤로 밀고 한참 있었다.

세 글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두 번 쓴 것이 세 글자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가려 볼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지우개를 문지르면 종이든 판지든 표면이 일어난다. 일어난 자리에 연필을 대면 획이 조금 굵어지고 가장자리가 번진다. 그러니까 번진 쪽이 나중에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정한이 사진 여덟 장을 다시 하나씩 띄웠다.

한 장에서는 왼쪽 획의 가장자리가 번져 보였고, 조명 방향을 반대로 준 다른 장에서는 오른쪽 획이 번져 보였다.

조명이 만든 그림자였다. 획이 아니라.

정한이 화면을 끄고 종이에 적었다.

같은 자리에 두 번 쓴 것으로 보임. 어느 쪽이 나중인지 모름. 조명 방향으로는 못 가름. 판독 불가.

겹친 것은 뗄 수가 없다. 뗄 수 있는 건 위에 있는 것뿐인데, 어느 쪽이 위인지도 모른다.

적어 놓고 보니, 이틀 전에 적은 종이와 결론이 같았다. 다만 그때는 못 읽는다는 것만 알았고 지금은 왜 못 읽는지를 알았다.

그것도 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이관 마감까지 17일이었다.

4. 수요일

유하람이 수요일 저녁에도 갔다. 토요일부터 닷새째였다.

원래는 토요일에만 갔다. 언제부터 매일이 됐는지는 하람도 몰랐다.

어머니가 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분이었다.

“어제 시장에서 참기름집 아저씨를 봤는데.”

송미강이 숟가락을 놓으면서 말했다.

“왼쪽 다리가 그렇더라. 계단을 옆으로 내려가더라고.”

하람이 국을 뜨다가 멈췄다.

그 아저씨는 하람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본 사람이었다. 제일시장 안쪽 골목, 어머니가 미싱을 놓고 있던 가게 바로 옆집이었다.

”…옆으로요.”

“응. 옆으로.”

“어떻게 생겼는데요.”

“머리가 하얬어. 앞치마를 했고. 앞치마 끈을 앞에서 묶더라.”

“앞에서요.”

“뒤로 손이 안 가니까. 어깨가 안 올라가는 사람이야.”

하람은 언제 봤느냐고 안 물었다.

며칠 전에 알아본 게 있었다. 기억에는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이 언제 것인지를 적어 둔 딱지가 따로 붙어 있는데, 딱지가 먼저 떨어져 나간다고 했다. 내용은 남아 있는데 시간표만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것들이 최근이라는 딱지를 달고 올라온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순서를 잃은 것이다.

언제냐고 물으면, 없는 딱지 자리에 뭐라도 붙여서 대답을 만들어야 한다. 만든 대답은 그다음부터 진짜 기억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하람은 시간을 안 묻기로 했다. 대신 내용만 물었다. 내용은 아직 있으니까.

밥을 먹고 나서 어머니가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어제 정리한 것 중에 “아닌 것” 상자였다.

그 안에 초등학교 이름표가 하나 있었다. 흰 천에 파란 실로 이름이 박혀 있었다.

“이건 누구 거예요.”

“몰라.”

미강이 이름표를 손바닥에 놓고 봤다.

“근데 이건 버리면 안 되는 거야.”

“왜요.”

“몰라. 근데 그건 알아.”

파란 실 밑에 하람의 이름이 있었다. 미강이 그걸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실이 좋아. 이건 안 풀려.”

“어머니가 박으신 거예요.”

“그래?”

미강이 이름표를 뒤집어 실밥을 봤다.

“그러네. 이렇게 하는 사람이 몇 없어.”

하람이 이름표를 받아서 다시 상자에 넣었다. 상자는 아까 있던 자리에 그대로 뒀다.

집에 와서 수첩에 네 줄째를 적었다.

수요일. 참기름집. 사람은 맞고 때가 틀림. 시간을 묻지 말 것.

5. 접힌 층

오후에 한서진이 노트북을 켜서 재혁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다른 나라 팀이 20년 전에 낸 코어의 밑바닥 쪽이었다. 라이트 위에 얹어 찍은 사진이었는데, 층이 물결처럼 접혀 있었다. 어떤 데서는 아예 뒤집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밑바닥.”

“왜 이렇게 됐습니까.”

“얼음이 흘러.”

서진이 화면을 확대했다.

“밑으로 갈수록 자기 무게에 눌려서 옆으로 밀려. 아래가 반반하면 그냥 밀리는데, 바위에 언덕이 있고 골이 있으면 흐르는 속도가 자리마다 달라져. 그러면 층이 접혀.”

“접히면요.”

“순서가 없어져. 밑에 있는 게 위에 있는 것보다 오래됐다는 보장이 없어지는 거야.”

재혁이 화면을 봤다.

“그럼 삼천이백까지 파도 밑에 몇백 미터는 못 씁니까.”

“못 쓰는 게 아니야.”

서진이 노트북을 닫았다.

“순서를 모르는 채로 있는 거지. 나중에 순서를 알아낼 방법이 생기면 그때 써.”

“방법이 생깁니까.”

“이십 년 전에는 그 얼음을 그냥 못 쓰는 걸로 쳤어. 지금은 다른 데 코어랑 화산재를 맞춰 보고, 기체 비율로 앞뒤를 가려. 조각들 순서를 다시 세우는 중이야.”

서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린 순서가 보증되는 데까지만 나이를 말해. 그 밑은 나이를 안 붙이고 두는 거야.”

재혁이 종이에 뭘 적다가 물었다.

“그런데 계산이 안 맞습니다.”

“뭐가.”

“지금 하루 열두 미터고, 철수까지 쉰여드레니까 칠백 미터입니다. 사백육십에 더하면 천백육십인데요. 올해 목표가 팔백 아닙니까.”

서진이 웃었다.

“열두 미터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어?”

”…아닙니까.”

“지금 왕복이 사십 분이야. 육백 넘어가면 오십 분, 팔백이면 한 시간이야. 케이블 감았다 푸는 시간이 깊이만큼 늘어.”

“그럼 하루에.”

“여덟 미터, 여섯 미터로 줄어. 그렇게 계산해서 팔백이야.”

“나중엔 하루 세 토막입니까.”

“두 토막인 날도 있어.”

서진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백부터 천삼백까지가 잘 튀는 구간이야. 지난 시즌 인천에 보낸 게 그 구간 거고. 하필 올해 끝나는 자리가 그 초입이야.”

“그럼 칠백팔십에서 끊으면 안 됩니까.”

“끊는 자리를 우리가 정하면 좋지.”

서진이 창밖을 봤다. 활주로 쪽에 아무것도 없었다.

“근데 그건 배가 정해.”

6. 28장

저녁에 문경옥이 은재에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오늘 새벽 거, 줄마다 한 장씩 써요.”

“한 장으로 안 됩니까. 같은 방인데요.”

“안 돼요.”

경옥이 벽에 붙은 온도 기록지를 가리켰다.

“천장 쪽이 바닥 쪽보다 1도 반 따뜻하다고 했죠. 그런데 벽에 붙은 온도계는 하나뿐이고, 그것도 가운데 높이에 있어요.”

경옥이 손끝으로 선반 맨 위 칸을 가리켰다.

“새벽에 위 칸은 영하 이십이 점 구까지 갔어요. 아래는 이십사 점 육이고요. 종이에 남은 이십삼 점 팔은 가운데 값이에요.”

“그럼 값을 두 개만 적으면.”

“스물여덟 줄이 다 조금씩 달라요. 문에서 가까운 줄이 더 갔고요.”

경옥이 종이를 은재 앞에 나눠 놓았다.

“같은 값으로 적어 놓으면요, 나중에 위 칸 시료 값이 이상할 때 이유를 못 찾아요. 기록이 뭉개져 있으면 없는 거나 비슷해요.”

은재가 종이를 세면서 물었다.

“영향 없어 보이는 줄도 씁니까.”

“써요. 영향 없다고 본 것도 적어야 나중에 비교가 돼요.”

경옥이 자기 캐비닛에서 오래된 노트를 꺼내 왔다. 표지가 벗겨져 있었다.

“이런 일이 스물세 해 동안 여섯 번 있었어요. 1998년, 2003년, 2004년, 2011년, 2019년, 2022년.”

“다 적혀 있습니까.”

“다섯 번은요.”

경옥이 노트를 넘기다가 한 장에서 멈췄다. 그 장에는 날짜만 있고 아래가 비어 있었다.

“2003년 건 날짜만 있어요. 몇 도까지 갔는지, 몇 시간이었는지가 없어요.”

“그때 사람이 안 적은 겁니까.”

“모르죠. 적었는데 없어졌을 수도 있고요.”

경옥이 노트를 덮었다.

“그런데 지금도 2003년에 들어온 시료만 값이 조금씩 튀어요. 그게 그해에 뭐가 있어서 그런 건지, 원래 그 얼음이 그런 건지, 이제 못 갈라요.”

“섞였네요.”

은재가 말했다.

경옥이 은재를 봤다.

”…네. 섞였어요.”

경옥이 노트를 캐비닛에 다시 넣었다.

“섞인 건 못 풀어요.”

“그래서 오늘 걸 적는 겁니까.”

“그래서 오늘 걸 적는 거예요.”

은재가 스물여덟 장을 다 쓰는 데 1시간 40분이 걸렸다. 다 쓰고 나서, 마지막 장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이호기 정지 중 문을 열지 않음.

경옥이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은재는 그게 지우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섞인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없어진 것은 자리가 비어서 비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섞인 것은 자리가 차 있다. 차 있는 자리를 보고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균은 거짓말이 아니다. 대답할 수 있는 만큼의 대답이다. 한 해를 물었는데 백몇십 해가 대답하는 것은 얼음이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얼음이 그만큼밖에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아는 것이 답을 얻는 일의 절반이다.

깊다고 오래된 것은 아니다. 순서를 보증하는 것은 깊이가 아니라 층이고, 층이 접힌 자리에서는 나이를 말하지 않고 그냥 둔다. 그냥 두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르다. 그냥 둔 것에는 나중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기억에서 먼저 떨어지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시간표다. 그래서 오래된 것이 최근이라는 얼굴을 하고 올라온다. 그때 언제냐고 물으면 없는 자리에 무엇이든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묻지 않는 것이 지켜 주는 일이 될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는 것도 적어야 한다. 안 적으면 나중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과 아무도 안 본 것을 가를 수 없다.

23년 중에 한 해가 그렇게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스물여덟 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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