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3화 - 옮김

제3화 「옮김」
1. 436미터
우재혁은 아침에 마른 천을 들고 있었다.
처리대 위에 어제 깨진 두 토막과 새벽에 올라온 토막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재혁은 그중 하나를 천으로 닦고 있었다.
한서진이 들어오다가 그대로 섰다.
“손 떼.”
재혁이 천을 든 채로 멈췄다.
“뭐 하는 거야.”
“닦았습니다. 표면이 미끈거려서요.”
“뭐로 닦았어.”
“천으로요.”
서진이 재혁 손에서 천을 받아 손가락으로 눌러 봤다. 눌린 자리가 반들거렸다.
“이거 기름이야.”
“압니다. 시추액이요.”
“알면서 왜 닦아.”
재혁이 대답을 못 했다.
서진이 처리대 끝에 천을 내려놓았다.
“이 구멍은 그냥 두면 얼음이 흘러서 닫혀. 그래서 액을 채워 놓는 거고, 얼음은 그 액 속을 400미터 넘게 지나서 올라와. 올라오는 동안 겉에 묻어.”
“그러니까 닦은 겁니다.”
“닦으면 얇게 펴져. 그리고 표면에 실금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가.”
서진이 장갑을 끼면서 밴드 톱 쪽으로 갔다.
“묻은 건 못 지워. 깎아 내는 거야.”
재혁이 따라갔다.
“깎으면 얼마나 깎습니까.”
“겉에서 몇 밀리.”
“그건 그럼 못 씁니까.”
“못 써. 버려.”
재혁이 처리대 위의 토막을 봤다. 굵기가 어른 팔뚝만 했다. 그중 겉의 몇 밀리는 통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질 것이었다.
“아까운데요.”
“안 버리면 더 아까워.”
서진이 톱날 각도를 보면서 말했다.
“겉에 묻은 걸 그냥 넣어서 보내면, 나중에 인천에서 성분을 재는 사람이 이게 그해 눈에 있던 건지 우리가 묻힌 건지를 몰라. 하나를 모르면 나머지도 못 믿어. 그러니까 겉을 버리는 건 겉을 버리는 게 아니야. 안쪽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쪽은 확실합니까.”
“확실하지. 여긴 아무것도 안 들어갔어.”
서진이 얼음 단면을 손끝으로 짚었다.
“1700년 동안 아무것도 안 들어갔고, 지난 40분 동안에도 안 들어갔어. 들어갈 뻔한 것만 지금 깎아 내는 거고.”
깊이는 436미터였다. 어제보다 12미터 아래였다.
캠프 철수까지 60일이었다.
2. 314일
문경옥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저온시료동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3월 배편 계획서였다. 남극에서 인천까지 오는 데 걸리는 날짜와, 그동안 시료가 몇 번 옮겨 실리는지가 적혀 있었다.
새로 온 연구원이 커피를 들고 옆에 앉았다.
“오늘 314일째죠.”
“51일 남았어요.”
연구원이 계획서를 넘겨다봤다.
“배로 오는 동안에 녹으면 어떻게 됩니까.”
“녹으면 안 되죠.”
“녹았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도착해서 열어 보기 전에는 못 보잖아요.”
경옥이 계획서 뒤쪽을 펴서 목록 하나를 짚었다. 상자마다 같은 물건이 하나씩 들어간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대신 볼 걸 같이 넣어요.”
“뭔데요.”
“온도를 적는 거예요. 손가락만 한 건데, 몇 분에 한 번씩 지금 몇 도인지를 혼자 적어요. 두 달이든 석 달이든 계속 적어요.”
“그걸 도착해서 읽는 겁니까.”
“읽죠. 그럼 두 달치 온도가 줄로 나와요.”
연구원이 커피를 놓았다.
“근데 녹았으면 얼음을 봐도 알지 않습니까.”
“알아요.”
경옥이 잠깐 웃었다.
“녹았다가 다시 얼면 그 자리는 훤해져요. 기포가 없어지거든요. 얼음 안에 유리 같은 띠가 하나 생기는 거예요. 열어 보면 바로 보여요.”
“그럼 굳이 왜 넣습니까.”
“얼음은 녹았다는 것만 알려 줘요. 언제 녹았는지는 안 알려 줘요.”
경옥이 계획서의 이동 구간을 손끝으로 훑었다. 캠프에서 해안 기지, 기지에서 배, 배에서 부두, 부두에서 여기까지 화살표가 네 번 꺾여 있었다.
“온도 줄을 보면 어느 날 몇 시에 몇 도까지 올라갔는지가 나와요. 그러면 그게 배에서 그런 건지, 부두에 내려놓고 기다리는 동안 그런 건지를 알아요.”
“알아서 뭐 합니까. 이미 녹은 건데요.”
“그 통은 못 고쳐요.”
경옥이 계획서를 덮었다.
“고치는 건 얼음이 아니에요. 길이에요. 다음번에 그 부두에서 두 시간 기다리는 걸 없애는 거예요.”
경옥이 방한복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온도 적는 걸 넣는 건 이번 시료를 지키려고 넣는 게 아니에요. 다음 시료를 지키려고 넣는 거예요.”
3. 19일
오정한은 오전에 전화를 걸었다.
의뢰인은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 목소리가 젊었다. 마흔쯤 된 사람 같았다.
“오정한입니다. 릴 맡기신 분 되시죠.”
“네.”
“어제 구웠고, 오늘 한 번 다 돌렸습니다. 소리 납니다.”
전화 저쪽이 잠깐 조용했다.
“납니까.”
“납니다. 남자분이 뭘 읽는 소리예요. 안내문 같은 겁니다.”
”…그게 다입니까.”
“뒤쪽은 아직 안 들어 봤습니다. 오늘 옮기면서 들을 겁니다.”
정한이 달력을 봤다.
“그런데 이건 오래 못 갑니다. 구운 게 효과가 있는 게 길어야 두 달, 짧으면 삼 주입니다. 오늘부터 세면 19일입니다. 그 안에 찾아가시거나, 아니면 제가 옮겨 놓은 걸 받아 가셔야 합니다.”
“지금 지방에 있어서요.”
“그러시면 옮겨 놓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짐 정리하다가 나온 거라서요.”
정한이 데크 쪽을 봤다. 릴이 걸려 있었다.
“저도 모릅니다.”
정한이 말했다.
“그래서 옮겨는 놓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한은 오전 내내 각도를 맞췄다.
테이프에는 소리가 아주 가는 줄로 새겨져 있다. 그 줄을 읽는 머리가 테이프와 정확히 나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비스듬하면 높은 소리부터 흐려진다. 사람 귀에는 그냥 답답하게 들릴 뿐이라서, 모르는 사람은 원래 그렇게 녹음된 줄 안다.
정한은 시험용 테이프를 먼저 걸었다. 아무 뜻도 없는 소리만 들어 있는 테이프였다. 그것을 틀어 놓고 나사를 아주 조금씩 돌렸다. 어느 지점에서 소리가 제일 또렷해졌다. 거기서 손을 뗐다.
그다음이 곡선이었다.
소리를 테이프에 넣을 때는 있는 그대로 넣지 않는다. 낮은 소리는 눌러서 넣고 높은 소리는 올려서 넣는다. 그래야 잡음에 안 묻힌다. 틀 때는 그 반대로 되돌려 준다. 문제는 되돌리는 곡선이 나라마다, 시대마다 달랐다는 것이다.
1983년에 국내 방송국에서 쓰던 것이 어느 쪽인지 정한은 대충 알고 있었다. 대충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정한은 파일을 두 개 만든다.
하나는 되돌린 것이다. 사람이 듣기에 제일 그럴듯한 소리다.
하나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머리에서 나온 신호를 그대로 받아 놓은 것이다. 듣기에는 이상하다. 낮은 소리가 없고 높은 소리가 과하다.
정한은 두 번째 것을 꼭 남긴다. 나중에 누가 1983년 그 방송국이 실제로 어느 곡선을 썼는지 알아내면, 그 사람은 두 번째 파일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첫 번째 파일에서는 못 한다. 이미 한 번 되돌려 놓은 것을 다시 되돌리면 두 번 휘어진다.
정한은 종이에 오늘 한 것을 적었다. 기계 이름, 속도, 머리 각도를 맞춘 방법, 되돌린 곡선, 안 되돌린 파일이 어느 것인지.
“옮기는 건 소리가 아니에요.”
정한이 혼잣말을 했다.
“소리를 어떻게 쟀는지까지 같이 옮기는 겁니다.”
4. 월요일
유하람은 월요일 아침에 어머니 집에 들렀다. 출근길에서 한 정거장쯤 돌아가는 거리였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오래 안 들어 본 소리였다.
미싱이었다.
송미강이 베란다 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하람의 바지가 놓여 있었고, 발이 판을 밟고 있었다.
“엄마.”
“어, 왔니.”
미강이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손은 계속 천을 밀고 있었다.
하람이 옆에 섰다.
미강은 바지 단을 박고 있었다. 시작에서 되박음질을 두 번 하고, 쭉 밀고, 끝에서 다시 두 번 박았다. 실을 자르고 천을 뒤집어 접힌 자리를 손톱으로 눌러 폈다.
하람이 지난주에 두고 간 바지였다. 두고 가고 잊고 있었다.
“이거 언제 했어.”
“아까.”
“몇 시에.”
”…아까.”
미강이 실 끝을 이로 끊었다. 그리고 바늘에 새 실을 꿰기 시작했다.
하람은 그것을 봤다.
실 끝을 손가락으로 비벼서 뾰족하게 만들고, 바늘구멍에 한 번에 넣었다. 밑실을 감는 자리에 실패를 걸고 발로 판을 짧게 두 번 밟았다. 실이 고르게 감겼다.
하람은 그 순서를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옆에서 몇 번이나 봤다. 그런데 하람은 지금 그 순서를 못 외운다.
의사가 했던 말 중에 몸에 대한 것이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손이 아는 것은 적히는 자리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것은 안쪽 자리를 거쳐야 남는다. 그 자리가 상하면 그것부터 없어진다. 그런데 여러 해 동안 몇천 번씩 해서 손에 배어 버린 것은 그 자리를 안 거친다. 다른 데에 적혀 있어서 오래 남는다.
미강은 1980년대에 제일시장 안쪽 골목에서 옷을 고쳤다. 하람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중학교 때까지였다.
“엄마, 어제 나 왔던 거 생각나?”
미강이 손을 멈추지 않았다.
“왔었니.”
“응. 왔었어.”
“밥은 먹고 갔어?”
하람이 바지를 들어 단을 봤다.
3센티였다. 하람은 늘 3센티로 줄여 달라고 했다. 자를 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람이 수첩을 꺼냈다.
앞쪽에는 1984년이 있고, 제일시장이 있고, 참기름집 아저씨의 왼쪽 다리가 있었다. 어제 적은 한 줄이 뒤쪽에 있었다.
하람은 그 밑에 적었다.
월요일. 단 3센티. 되박음질 두 번.
적고 나서 하람은 그 줄을 봤다. 어제 것과 오늘 것이 나란히 두 줄이 되어 있었다.
“엄마, 다음 주에 하나 더 가져올게.”
“가져와.”
미강이 그렇게 말하고 실을 끊었다.
하람은 그 말을 적지 않았다. 적으면 다음 주에 그 말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어머니가 될 것 같았다.
5. 28통
남극은 오후 4시에 비행기 소리가 났다.
앞 캠프에서 오는 소형기였다. 한 달에 두 번 왔고, 오늘은 실으러 오는 날이었다.
서진과 재혁은 아침부터 통을 골라 놓았다. 스물여덟 통이었다. 380미터에서 424미터까지의 코어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어제 깨진 두 토막도 들어갔다. 위에서부터 1번과 2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통은 그대로 실리지 않았다. 통을 다시 두꺼운 상자에 넣고, 상자 안쪽에 냉기를 붙들어 두는 판을 대고, 상자마다 온도 적는 것을 하나씩 넣었다.
재혁이 상자를 밀면서 물었다.
“여기서 인천까지 몇 번 옮겨 실립니까.”
“세어 봐.”
재혁이 손가락을 폈다.
“시추동에서 상자로 한 번. 상자를 비행기에 한 번. 비행기에서 해안 기지 냉동고로 한 번. 3월에 냉동고에서 배로 한 번. 배에서 부두로 한 번. 부두에서 차로 한 번.”
“여섯 번.”
“여섯 번입니다.”
서진이 상자 뚜껑을 눌러 닫았다.
“그중에 제일 위험한 게 언제일 것 같아.”
“비행기 아닙니까. 여덟 시간쯤 날 텐데요.”
“아니야.”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동안은 안 위험해. 상자 안이 그동안은 가만히 있거든. 위험한 건 문 여는 순간이야.”
서진이 손으로 상자와 비행기 사이의 허공을 짚었다.
“싣고 내리는 동안이야. 밖에 나와 있는 그 몇 분이야. 여섯 번 옮기면 그 몇 분이 여섯 번 있는 거고.”
재혁이 밖을 봤다. 비행기가 활주로 쪽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럼 그 몇 분을 어떻게 줄입니까.”
“미리 다 싸 놓고 기다리는 거지. 비행기 와서 그때부터 상자 싸는 데가 있어. 그러면 밖에 나와 있는 시간이 20분에서 한 시간이 돼.”
두 사람이 상자를 밖으로 밀어 냈다. 바깥은 영하 32도였고 바람은 약했다. 오늘은 밖이 안보다 추웠다.
마지막 상자를 밀어 넣고 문을 닫았을 때 재혁이 물었다.
“이제 우리 손을 떠나는 겁니까.”
“떠나지.”
“그럼 저건 이제 누구 겁니까.”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천 가서 자르고, 재고, 누가 읽어야 뭐가 되지.”
비행기가 다시 떠올랐다. 소리가 멀어지는 데 오래 걸렸다.
“여기서 우리가 하는 마지막 일은 저걸 우리 손에서 내보내는 거야.”
서진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다음은 남이 하는 일이고. 그래서 오늘 다 적어 놓은 거야.”
캠프 철수까지 60일이었다.
6. 두 번째 글자
정한은 저녁 8시까지 남았다.
이관은 오후 5시에 끝났다. 파일 두 개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정한은 릴을 되감지 않고 풀린 그대로 케이스에 넣었다. 종이도 같이 넣었다.
그러고 나서 케이스 옆면을 다시 꺼내 봤다.
연필로 팔삼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지워진 자리가 있었다. 세 글자였다. 어제는 첫 글자에 세로획 하나와 그 아래 동그란 것까지만 나왔다.
오늘 정한은 종이를 대고 문지르지 않았다. 대신 사진기를 삼각대에 고정했다.
정한은 그 방법의 이름을 모른다. 오래전에 옆 건물에서 옛날 비석 하는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배웠다.
사진기는 한 자리에 그대로 두고 스탠드만 옮긴다. 왼쪽에서 한 장, 오른쪽에서 한 장, 위에서 한 장, 아래에서 한 장. 정한은 여덟 장을 찍었다.
눌린 자국은 골이 파여 있다. 빛이 왼쪽에서 오면 골의 오른쪽 벽에 그림자가 생기고, 오른쪽에서 오면 왼쪽 벽에 생긴다. 한 장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여러 장을 겹쳐서 보면 어느 쪽에서 비춰도 계속 어두운 자리가 나온다. 그게 진짜로 파인 자리다.
정한이 여덟 장을 화면에 띄워 놓고 하나씩 넘겼다.
첫 글자는 어제와 같았다. 세로획 하나, 그 아래 동그란 것.
두 번째 글자에서 정한이 손을 멈췄다.
가로획이 두 개 있었다. 나란히 두 개였고, 그 위에 짧은 세로가 하나 얹혀 있었다. 아래쪽은 아무리 넘겨도 안 나왔다. 지운 사람이 그쪽을 더 세게 문질렀거나, 처음부터 힘을 덜 줘서 눌린 자국이 얕았을 것이다.
세 번째 글자는 아무것도 안 나왔다.
정한이 화면을 껐다.
두 글자에서 획을 몇 개 얻었다. 두 글자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정한이 종이를 다시 꺼내 아래쪽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케이스 옆면에 연필 자국 세 글자 있음. 지워졌으나 눌린 자국 남음. 첫 글자 세로획 하나와 그 아래 원형. 둘째 글자 가로획 둘과 그 위 짧은 세로. 셋째 글자 판독 불가. 사진 여덟 장 같이 넣음.
정한은 이걸 왜 적는지 자기도 잘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의뢰인은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한도 모른다. 지금 이 자국이 무슨 글자인지 아는 사람은 어쩌면 이미 없다.
그래도 정한은 적는다. 지금 못 읽는 것과 앞으로도 못 읽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나중에 누가 이걸 읽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은 아직 이 일을 시작도 안 했을 수 있다.
정한이 케이스를 선반에 올렸다. 테이프는 풀린 채로 들어 있었다.
작업실 불을 끄고 나오면서 정한이 달력을 봤다.
19일이었다.
옮긴다는 것은 같은 것을 다른 그릇에 담는 일이 아니다. 그릇이 달라지면 안에 든 것도 조금 달라지기 때문에, 옮기는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옮겼는지를 같이 적어 두어야 한다. 되돌려 놓은 것 옆에 아무것도 안 한 것을 하나 남겨 두는 이유도 그것이다. 한 번 손댄 것은 다시 손대면 두 번 휘어진다.
위험한 것은 옮기는 동안이 아니라 옮겨 싣는 동안이다. 날아가는 여덟 시간보다 문을 열어 놓은 몇 분이 위험하고, 그 몇 분은 옮길 때마다 한 번씩 생긴다. 그래서 일을 줄이는 방법은 빨리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옮기는 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겉을 버리는 일도 있다. 400미터를 올라오는 동안 겉에 묻은 것을 그냥 두면 안쪽까지 못 믿게 된다. 버려서 잃는 것보다 안 버려서 잃는 것이 크다.
무엇을 지켰는지는 나중에 알 수 없다. 대신 무엇이 언제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적어 둘 수 있다. 상자마다 온도를 적는 것을 하나씩 넣는 이유가 그것이고, 그 기록은 이번 상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상자를 위한 것이다.
손이 아는 것은 오래 남는다. 어제 누가 왔다 갔는지는 없어져도 되박음질을 두 번 하는 것은 남는다. 그래서 남은 것을 보고 없어진 것을 슬퍼하기보다는, 남은 것에 대고 오늘 한 줄을 더 적는 편이 낫다.
지워진 글자에서 오늘 얻은 것은 획 몇 개였다.
읽지는 못했지만,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