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52화(마지막 화) - 돌아옴

제152화(마지막 화) 「돌아옴」
1. 0.22
발사한 지 예순아흐레가 지났다.
명호의 책상에 봉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내륙 발사장 쪽 팀에서 온 것이었다. 한 달 전에 명호가 25줄 종이를 근거 칸까지 통째로 복사해 보낸 그 팀이었다.
봉투 안에는 같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다만 명호가 보낸 것과 한 군데가 달랐다.
열넷째 줄 아래, 환산식에 쓰는 지수 자리의 숫자가 지워져 있었다. 그 위에 다른 숫자가 적혀 있었다.
0.14가 0.22로 바뀌어 있었다.
3번 밸브를 보던 관제사가 옆에서 그 종이를 들여다봤다.
“우리가 보낸 걸 고쳐서 보냈는데요.”
“고친 게 맞습니다.”
명호가 종이를 책상에 폈다.
바람은 땅에 가까울수록 느리고 위로 갈수록 빨라진다. 얼마나 빨리 빨라지는지는 땅이 얼마나 거친가로 정해진다. 그 거칠기를 숫자 하나로 바꿔 놓은 것이 그 지수였다.
“우리 발사장은 바다 옆 개활지입니다. 앞이 트여 있으니까 땅이 잡는 게 적습니다. 0.14입니다.”
“거기는요.”
“산 사이입니다. 능선이 있고 나무가 있습니다. 이십 정도는 됩니다.”
명호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같은 12미터에서 이십이 나왔다고 칩시다. 우리 자리에서는 60미터에 스물일곱쯤인데, 거기서는 서른둘이 넘습니다.”
“다섯 차이입니다.”
“다섯이면 갈지 안 갈지가 갈립니다.”
관제사가 잠깐 말이 없다가 물었다.
“그럼 우리가 보낸 종이가 틀린 겁니까.”
“우리 값은 우리 자리에서 맞습니다.”
명호가 종이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틀리는 건 값이 아니라 값만 보내는 겁니다. 숫자만 보내면 저쪽은 그걸 베낍니다. 근거를 같이 보내면 저쪽은 그걸 고칩니다.”
봉투 안에는 짧은 편지도 한 장 들어 있었다. 마지막 줄에 물음이 하나 적혀 있었다.
당신들 종이에는 탑이 헐리면 이 근거도 같이 없어진다고 적혀 있는데, 그럼 우리 쪽은 뭐라고 적어야 합니까.
명호는 답장에 한 줄만 썼다.
거기 지금 뭐가 서 있는지를 적으시면 됩니다.
오후에 다음 발사 준비 회의가 있었다. 넉 달 뒤였다. 팀장이 자료를 넘기다가 말했다.
“이번에도 자네가 앞이야.”
“저 사람이 섰으면 합니다.”
명호가 관제사 쪽을 봤다. 관제사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앞에 서면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봅니다. 저 사람이 앞에 서면 종이를 봅니다.”
팀장이 명호를 봤다.
“자네는 그럼 뭐 할 건데.”
“아침에 어제와 같은가 봅니다.”
“그거 반년째 하고 있잖아.”
“네. 그래서 앞으로도 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관제사가 따라 나왔다. 뭘 준비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명호가 25줄 종이를 건넸다.
“이거 읽으시면 됩니다. 읽다가 근거 없음이라고 적힌 데가 나오면 그건 제가 못 찾은 겁니다.”
“몇 군데입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명호가 잠깐 웃었다.
“그런데 자꾸 생깁니다. 안 생기면 그건 안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2. 72장
관제실 화면에 154번째 정렬 결과가 떠 있었다.
81장은 매일 새벽에 조금씩 어긋났고 매일 새벽에 조금씩 되돌려졌다. 사람이 값을 넣지 않았다. 배가 어제 정한 규칙대로 스스로 돌려 놓았고, 사람은 그 규칙이 오늘도 맞는지를 봤다.
“격자 오차 0.04입니다.”
인턴이 읽었다. 유도 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에 0.05였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사율은 올라가지 않아.”
팀장이 다른 화면을 켰다. 거울 81장의 반사율이 표로 떠 있었다. 넉 달 전 값 옆에 오늘 값이 붙어 있었고, 오늘 값이 조금씩 낮았다.
“먼지가 박혀.”
팀장이 말했다.
“모래알보다 훨씬 작은 게 초속 수십 킬로미터로 날아다녀. 하나 박히면 그 자리에 눈에 안 보이는 구멍이 하나 생겨. 하루에 몇 개씩 생겨.”
“닦으면 안 됩니까.”
“박힌 걸 어떻게 닦아.”
인턴이 표를 봤다. 거기에 다른 줄도 있었다. 자외선과 우주선에 반사막이 삭는 몫이었고, 정전기로 표면에 붙는 먼지 몫이었다.
“다 합치면 한 해에 한 푼쯤 떨어져.”
“백에 하나 말입니까.”
“응. 한 해에 백에 하나.”
인턴이 계산기를 들었다.
“열두 해면…….”
“81장이 72장 몫이 돼.”
인턴이 손을 멈췄다.
“거울은 81장 그대로 있는데요.”
“응. 그대로 있어.”
팀장이 화면을 껐다.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하는 일은 줄어. 그게 제일 늦게 알아채는 종류야. 없어지면 표가 나는데 얇아지는 건 표가 안 나.”
“그럼 넉 달 뒤에 9장을 더 올립니까.”
“2장이야.”
“9장이 모자란다면서요.”
“열두 해 뒤에 모자라는 거지.”
팀장이 자리에 앉았다.
“한 번에 9장을 올려서 메우는 게 아니라 해마다 2장씩 올려서 안 줄어들게 하는 거야. 그러면 열두 해 뒤에도 81장 몫이야.”
“해마다 2장씩이면…….”
인턴이 말끝을 흐렸다.
“끝이 없습니다.”
“응.”
“끝나는 건 안 쓰는 물건이니까요.”
팀장이 인턴을 봤다.
“그거 내가 넉 달 전에 한 말인데.”
“외웠습니다.”
“외운 거랑 아는 거랑 달라.”
“압니다.”
“어떻게 알아.”
인턴이 잠깐 생각했다.
“넉 달 전에는 그 말이 서운했습니다. 오늘은 안 서운합니다.”
지상 송전 누계는 3288시간이었다. 137일이었다. 그래프에 골은 없었다.
팀장이 흐름표를 인턴 쪽으로 밀었다.
“이제 자네가 써.”
인턴이 연필을 들었다. 10분쯤 아무것도 못 쓰다가 2줄을 적었다.
오늘 한 일: 어제와 같은지 봄.
내일 할 일: 어제와 같은지 봄.
“짧네.”
“길게 쓸 게 없습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날이야.”
팀장이 흐름표를 도로 넘겨보고 말했다.
“길게 쓸 게 많은 날은 뭔가 잘못된 날이거든.”
3. 75건에 하나
동현은 부서 공용 문서를 열어 놓고 숫자 2개를 비교하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여섯 부서에서 241건이 지나갔고 그중 여섯 건이 잘못 처리됐다. 40건에 하나였다.
이번 달에는 300건이 지나갔고 네 건이 잘못됐다. 75건에 하나였다.
부장이 뒤에서 화면을 봤다.
“절반으로 줄었네.”
“2배를 했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동현이 종이에 선을 하나 그었다. 처음에는 가파르게 내려가다가 뒤로 갈수록 눕는 선이었다.
“사람이 같은 일을 처음 할 때는 조금만 해도 금방 줄어듭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지나면 지금까지 한 걸 다시 2배로 해야 그만큼 또 줄어듭니다.”
“그러니까 다음번엔.”
“지금까지 541건 했으니까, 다음에 또 절반이 되려면 541건이 더 필요합니다. 한 달에 300건이면 두 달쯤입니다.”
“점점 느려지는 거잖아.”
“느려집니다.”
동현이 선의 끝을 짚었다.
“느려지는 게 나빠지는 건 아닙니다. 안 느려지는 건 두 가지뿐입니다. 아직 시작을 안 했거나, 아무도 안 세고 있거나.”
부장이 잠깐 서 있다가 물었다.
“자네가 다 하면 지금 당장 영이잖아.”
“영입니다. 그리고 제가 없으면 삼백입니다.”
동현은 이번 달에도 한 건도 고치지 않았다. 네 건 다 담당자한테 어디를 보면 되는지만 알려 줬다. 그중 두 건은 문서에 이미 적혀 있는 자리였고, 두 건은 안 적혀 있어서 그날 한 줄씩 늘었다.
오전에 캐비닛 쪽에서 소리가 났다.
낯선 사람이 아래 칸을 열어 놓고 노트를 하나 펴 놓고 있었다. 다른 부서 사람이었다. 표지에는 이름이 없고 연도만 적혀 있었다.
“그거 어디서 났습니까.”
“아래 칸에 있길래요.”
그 사람이 노트를 들어 보였다.
“15년 거 보고 있습니다. 그때 여기가 지금 우리가 걸린 거랑 똑같은 걸로 걸렸더라고요. 그때는 어떻게 넘어갔나 보려고요.”
“어떻게 넘어갔습니까.”
“넘어간 게 아니라 두 달 걸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동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름이 적혀 있었으면 그 사람은 노트를 펴는 대신 동현에게 물으러 왔을 것이다. 연도만 적혀 있어서 그냥 폈다. 10년치 걱정이 10년 뒤에 처음으로 남에게 읽혔고, 읽은 사람은 그걸 쓴 사람이 누군지 모른 채로 읽었다.
동현은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손수건은 여전히 그 사람 책상 위에 펴진 채로 놓여 있었다. 한 달 동안 아무한테도 안 갔다.
동현은 안 물어봤다. 언제 넘길지는 그 사람이 정할 일이었고, 안 넘기고 계속 쓰는 것도 정하는 것 중 하나였다.
점심때 동현이 연차 신청서를 냈다. 사흘이었다.
“또 쉬어?”
“네.”
“어디 가는데.”
“이번엔 정해 놨습니다.”
지난번에는 나흘을 쉬면서 이틀을 갈 데 없이 보냈다. 이번에는 첫날 아침에 뭘 할지를 지난주에 적어 놨다.
“뭐 적어 놨는데.”
“별거 아닙니다. 아침에 어디 가서 뭘 먹는다는 겁니다.”
동현이 서류를 넘기고 말했다.
“10년 동안 그건 한 번도 안 적어 봤습니다.”
4. 삼십 센트
조율사가 온 날이었다.
소율은 옆에 앉아서 지켜봤다. 조율사는 가운데 음부터 시작해서 양쪽으로 벌려 나갔고, 높은 쪽으로 갈수록 계기에 뜨는 숫자가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높은 데를 일부러 올려서 맞추시네요.”
“네.”
“계기에는 안 맞다고 나오는데요.”
“계기에는 안 맞고 귀에는 맞습니다.”
조율사가 손을 멈추고 낮은 건반 하나를 눌렀다.
“현이 완전히 낭창하면 정확히 2배, 3배로 울립니다. 그런데 실제 현은 뻣뻣합니다. 굵을수록 더 뻣뻣하고요. 뻣뻣하면 위쪽 울림이 2배보다 조금 위에서 납니다.”
“그럼 한 옥타브 위를 정확히 2배로 맞추면요.”
“아래 음이 데리고 있는 울림이랑 어긋납니다. 흐리게 들려요.”
“그래서 위를 올리는 거군요.”
“위는 올리고 아래는 내립니다. 끝까지 가면 삼십 센트쯤 벌어집니다. 반음이 백이니까 삼분의 일쯤이요.”
소율이 건반 끝을 봤다.
“맞게 맞추면 안 맞게 들리고, 안 맞게 맞춰야 맞게 들리네요.”
“그렇습니다.”
조율사가 다시 손을 놀렸다.
“어디에 맞추느냐의 문제입니다. 숫자에 맞출지 이 피아노에 맞출지요. 피아노마다 뻣뻣한 정도가 달라서 이 집 값은 이 집에서만 맞습니다.”
소율은 그 말을 종이 귀퉁이에 적어 놓았다.
새 종이에는 5마디가 적혀 있었다. 한 달 전에 2마디였다.
한 달에 3마디였다. 지난 곡은 아흐레에 11마디였다.
느려졌다는 걸 소율도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이미 안에 있던 것이 나온 것이었고, 이번 것은 아직 안에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라서 그랬다.
셋째 마디에서 한 번 걸렸다. 규칙대로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화음이 있는데, 넣어 보니 너무 매끄러웠다.
소율은 그 화음을 반음 밀어 놓고 그대로 뒀다. 계기에는 안 맞았다.
오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옆방 사람이었다. 한 달 전에 객석까지 왔던 사람이었다.
“저 그 곡 악보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한 바퀴」요.”
“다음 달에 저도 무대가 있어서요.”
소율이 복사를 해서 건넸다. 그러다가 여덟째 마디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서 옆 건반을 스칠 거예요.”
“어려운 자리예요?”
“제가 스쳤어요. 무대에서.”
“지울까요.”
“두세요.”
소율이 손을 뗐다.
“저도 안 지웠어요.”
옆방 사람이 악보를 들고 나갔다가 문에서 돌아섰다.
“이거 몇 번 치면 됩니까.”
“한 바퀴예요. 몇 번 치는지는 치는 사람이 정해요.”
문이 닫히고 나서 소율은 자기 새 종이를 봤다.
5마디였다. 여섯째가 언제 올지는 몰랐다.
몰라도 종이는 안 치웠다.
5. 붓 한 번
92번째 날 아침에 첫 꽃이 폈다.
먼저 난 쪽이었다. 밤사이에 봉오리가 벌어져서 아침에 보니 이미 다 펴져 있었다.
김지수가 왔다. 물 주는 날은 아니었는데 왔다.
“폈네요.”
“어제저녁까지는 안 폈습니다.”
“그것들은 밤에 펴요.”
김지수가 가방에서 작은 붓을 꺼냈다. 끝이 가늘고 부드러운 붓이었다.
“뭡니까 그건.”
“이제 이걸 써야 해요.”
김지수가 꽃 안쪽을 가리켰다.
“이 꽃은 제 꽃가루로는 씨가 안 앉아요. 자기 것을 알아보고 안 받아요.”
“왜 그럽니까.”
“자기 것끼리만 계속 섞이면 약해져서요. 그래서 아예 안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럼 밖에서는요.”
“밖에는 벌레가 오죠. 여긴 창문 안이라 아무도 안 와요.”
진우가 늦게 난 쪽을 봤다. 아직 봉오리였고 초록빛이 조금 남아 있었다.
“저쪽은 언제 핍니까.”
“나흘 뒤예요.”
“그럼 이 꽃은 그때까지 있습니까.”
“닷새 피어 있어요.”
김지수가 손가락을 폈다.
“이건 오늘부터 닷새, 저건 나흘 뒤부터 닷새. 겹치는 게 하루예요.”
“하루밖에 안 됩니다.”
“하루면 돼요.”
진우가 두 화분을 봤다. 한 뼘 떨어져 있었다. 여름에 진우가 그렇게 놓은 것이었다.
문득 넉 달 전 일이 떠올랐다. 싹이 2개 났을 때 진우가 하나를 뽑느냐고 물었고, 김지수가 뽑는 건 자리가 하나일 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때 하나를 뽑았으면요.”
“꽃은 폈을 거예요.”
김지수가 붓을 내려놓았다.
“씨는 안 앉아요.”
진우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는 둘 다 살리려고 나눈 거였는데요.”
김지수가 말했다.
“지금 보니까 살리려고 둘로 나눈 게 아니라, 하나로는 안 되는 거였네요.”
“그럼 나흘 늦은 게…….”
“나흘 늦어서 하루가 겹치는 거예요. 같은 날 폈으면 닷새가 다 겹쳤을 텐데, 그건 그거대로 좋고요.”
김지수가 웃었다.
“근데 나흘 늦은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루면 되니까.”
진우가 붓을 봤다.
“이거 오늘 씁니까.”
“오늘은 아니에요. 저쪽이 펴야 옮기죠. 나흘 뒤예요.”
“나흘 뒤면…….”
진우가 달력을 봤다.
“제 차례입니다.”
“네.”
김지수가 붓을 진우 손에 쥐여 줬다.
“그때 하시면 돼요. 한 번만 살짝 대면 돼요. 세게 하면 꽃잎이 상해요.”
“제가 잘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올해는 씨가 안 앉죠. 그럼 내년에 다시 하면 돼요.”
진우가 붓을 들고 한참 있었다.
붓은 가벼웠다. 아무 무게도 없었다.
6. 6시
현수가 6시에 오기로 했다.
진우는 오후 3시부터 집을 치웠다. 5년 동안 아무도 안 온 집이었다. 안 쓰는 방 문을 열어 놓고 창을 열었다.
4시에 국을 올렸다.
아들이 지난달에 밥이랑 국이면 된다고 했다. 진우는 그 말을 듣고 한 달 동안 국 하나를 생각했다. 아내가 하던 대로 하려니 어느 대목에서 뭘 넣었는지가 기억이 안 나서, 결국 자기가 아는 만큼만 했다.
5시 40분에 벨이 울렸다.
20분 일렀다.
진우가 문을 열었다.
“왔구나.”
말이 먼저 나왔다.
5년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종이의 첫 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종이를 안 보고 나왔다. 종이는 부엌 벽에 붙어 있었고, 진우는 아침에 그 앞을 두 번 지나가면서 한 번도 안 봤다.
현수가 신을 벗으면서 말했다.
“차가 안 막혀서요.”
“들어와라.”
밥을 먹었다. 국이 조금 싱거웠다. 현수가 두 그릇을 먹었다.
“이거 어머니 하시던 거랑 비슷해요.”
“똑같이는 안 되더라.”
“비슷해요.”
밥을 먹고 나서 현수가 부엌을 둘러보다가 벽을 봤다.
달력 옆에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이거 계속 붙어 있었어요?”
“여름부터.”
현수가 다가가서 봤다.
종이는 누랬다. 종이는 볕을 안 봐도 누래진다. 만들 때 남은 것이 공기 중 물기와 아주 천천히 반응해서, 서랍에 넣어 둬도 몇 해가 지나면 색이 변한다. 볕을 보면 훨씬 빨리 변한다.
이 종이는 5년 동안 주머니 속에서 천천히 누랬고, 여름에 벽에 붙인 뒤로 두 달 동안 창 쪽 귀퉁이만 조금 더 진해졌다.
거기에 줄이 몇 개 있었다.
맨 위에 2줄이 있었다.
왔구나.
미안하다.
그 아래에 시각이 4개 적혀 있었다. 9시. 11시. 11시 반. 수요일 저녁 7시. 지나간 것도 안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에 날짜 없이 한 줄이 있었다.
매달 수요일.
현수가 오래 봤다.
“이거 언제 쓰신 거예요.”
“오래됐다.”
진우가 종이 아래쪽을 잡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지난달에도 여기까지 왔다가 놨었다.
오늘은 뗐다.
종이가 떨어진 자리에 종이만 한 사각형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두 달치였다.
진우가 종이를 뒤집어서 식탁에 놓았다.
뒷면이 앞면보다 하얬다. 많이 하얗지는 않았다. 벽을 보고 있던 두 달치만큼만 하얬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요.”
“네 자리다.”
현수가 진우를 봤다.
“제 자리요.”
“봄에 어떤 사람이 그랬다. 앞면은 내가 할 말이고 뒷면은 네가 할 말이라고. 앞면을 늘리면 네가 말할 데가 없어진다고.”
진우가 종이를 조금 밀었다.
“그래서 5년 동안 비워 놨다.”
현수가 앉았다. 한참 앉아 있었다. 진우는 아무 말도 안 붙였다.
현수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가 도로 넣고, 식탁 위에 있던 연필을 집었다.
2줄을 적었다.
다음 달 첫째 수요일 6시.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국 끓이는 법 알려 주세요.
진우가 그 줄을 봤다.
뭐라고 하려다가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아까 국이 싱거웠다는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 그 말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현수가 연필을 놓았다.
“붙일까요.”
“그래.”
진우가 종이를 받아서 벽에 다시 붙였다. 뒷면이 앞으로 오게 붙였다.
5년 동안 볕을 보던 면이 벽으로 갔고, 5년 동안 벽을 보던 면이 볕으로 나왔다.
붙이고 나서 진우가 잠깐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벽에 붙은 면에는 2줄이 있었다. 아들 글씨였다.
2줄 중에 하나는 시각이었고 하나는 물음이었다.
5년 동안 진우가 종이에 적어 온 것도 시각이었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진우가 적은 시각은 자기가 나가는 시각이었고 오늘 아들이 적은 시각은 자기가 오는 시각이라는 것이었다.
현수가 9시에 갔다. 나가면서 창가를 봤다.
“이거 꽃 폈네요.”
“오늘 아침에 폈다.”
“저쪽은요.”
“나흘 뒤에 핀다더라.”
“기다리시겠네요.”
“나흘은 세도 된다더라.”
현수가 웃고 나갔다.
진우가 설거지를 했다. 그릇이 2개였다.
앞면 2줄 중에 오늘 쓴 건 첫 줄뿐이었다. 두 번째 줄은 오늘도 안 썼다.
그 줄은 앞으로도 안 쓸 것 같았다. 안 써도 되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방법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었다.
다음 달 첫째 수요일에 진우는 국을 한 번 더 끓일 것이었다. 아들이 옆에서 볼 것이었다. 그러면 그때는 어느 대목에서 뭘 넣는지를 소리 내서 말해야 할 것이었다.
그게 진우가 아는 미안하다는 말의 다른 방법이었다.
끝나는 것은 안 쓰는 물건뿐이다. 쓰는 것들은 매일 조금씩 벌어지고 매일 조금씩 맞춰진다. 81장이 81장으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해서가 아니라 해마다 2장씩 올려서다.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도 계속 하는 일이다.
값은 그 자리에서만 맞는다. 다른 자리로 보낼 수 있는 것은 값이 아니라 값이 어디서 왔는지다. 숫자만 받은 사람은 그것을 베끼고, 근거까지 받은 사람은 그것을 고친다. 고쳐서 쓰는 것이 물려주는 일이다.
느려지는 것은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해도 많이 좋아지고 나중에는 많이 해야 조금 좋아진다. 그래도 좋아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면 느린 것은 값이지 손해가 아니다.
맞게 맞추면 안 맞게 들리는 것이 있다. 숫자에 맞출지 이 자리에 맞출지를 매번 정해야 하고, 그 정하는 일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다.
하루면 되는 일이 있다. 나흘 늦게 난 것과 나흘 먼저 난 것이 겹치는 날은 하루뿐이지만 하루면 씨가 앉는다. 그 하루를 위해 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 두는 것이 넉 달 전에 한 일이었다.
비워 둔 자리에는 언젠가 누가 온다. 5년 동안 비어 있던 면은 안 쓴 면이 아니라 기다린 면이었다. 기다린 면도 같이 낡는다. 다만 덜 낡을 뿐이고, 덜 낡은 만큼이 기다린 사람의 몫이다.
《영겁의 새벽》이라는 말은 끝나지 않는 새벽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매일 다시 오는 새벽이라는 뜻이었다.
81장은 오늘도 조금 벌어졌고 오늘도 조금 맞춰졌다.
내일도 그럴 것이었다.
— 《영겁의 새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