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49화 - 맞물림

제149화 「맞물림」
1. 4시 22분
관제실에 사람이 여섯 있었다.
새벽 4시였고, 화면에는 2개의 점이 있었다. 하나는 고리였다. 80장의 거울이 지구를 한 바퀴 두르고 도는 선이었고, 그 선의 한 군데가 조금 벌어져 있었다. 사흘 전에 80장이 각자 3분씩 물러나서 만들어 둔 자리였다.
다른 하나는 그 아래에 있었다. 120킬로미터 낮은 데서 사흘 동안 혼자 돌던 새것이었다.
낮은 데가 빠르다. 사흘 동안 새것은 고리보다 앞서 나갔고, 오늘 새벽에 비워 둔 자리의 바로 아래에 와 있었다.
“4시 22분입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워.”
첫 번째 점화는 짧았다. 화면의 숫자가 몇 개 움직였고 새것의 궤도가 타원이 되었다. 낮은 쪽은 그대로였고 높은 쪽만 고리의 높이까지 올라간 타원이었다.
인턴이 화면을 보다가 물었다.
“올라갔는데요.”
“아직 안 올라갔어.”
팀장이 말했다.
“지금은 올라가는 길만 만든 거야. 저 배는 45분 뒤에 반 바퀴를 돌아서 제일 높은 데에 닿아. 거기가 고리 높이야.”
“닿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닿기만 하면 도로 내려와.”
팀장이 화면의 타원을 손끝으로 짚었다.
“타원이니까 제일 높은 데를 지나면 다시 낮은 쪽으로 떨어져. 거기가 제자리가 되려면 그 순간에 한 번 더 태워야 돼. 두 번째로 태우는 건 올라가려고 태우는 게 아니라 그 높이에 남으려고 태우는 거야.”
인턴이 잠깐 말이 없다가 말했다.
“올라가는 거랑 거기 있는 게 다른 일이군요.”
“응. 거기 있는 게 더 어려워.”
45분이 지났다. 5시 7분에 두 번째 점화가 들어갔다. 타원이 다시 원이 되었고, 새것은 고리와 같은 높이에서 같은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같은 높이에 같은 속도였지만 아직 자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사이에 400미터가 남아 있었다.
“이제 붙입니까.”
“천천히.”
팀장이 말했다.
“여기서부터가 제일 느려. 지금 상대속도가 초에 몇 센티미터야. 이 400미터를 한 시간에 걸쳐서 갈 거야.”
“왜 그렇게 느리게 갑니까.”
“빨리 가는 건 쉬워.”
팀장이 의자에 앉았다.
“안 부딪치고 서는 게 어려운 거야. 여기서는 급하면 손해가 아니라 사고야. 80장이 사흘 동안 비워 놓은 자리인데 들어가면서 옆엣것을 치면 81장이 되는 게 아니라 80장도 없어져.”
6시 11분에 마지막 신호가 왔다. 새것이 자리 안에 섰다. 붙인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선 것이었고, 그게 이 고리에서는 붙인 것과 같은 뜻이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관제실에서 누가 손뼉을 치려다가 말았다. 칠 만한 순간이 아니었다.
2. 81장
아침이 되고 나서 팀장이 관제사에게 물었다.
“몇 장이야.”
“81장입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되지.”
관제사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다 됐습니다.”
“아니.”
팀장이 화면을 켰다.
“이제 81장이 서로를 봐야 돼.”
화면에 격자 정렬 항목이 떴다. 88차라는 숫자가 붙어 있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안 하던 항목이었다.
“새로 들어온 저 한 장은 지금 양옆 2장하고만 맞아 있어. 그건 맞은 게 아니야. 고리는 한 장이 어긋나면 그 한 장만 어긋나는 게 아니라 반대편 20장이 같이 어긋나. 빛을 한 군데로 모으는 물건이라서 그래. 한 장이 조금 딴 데를 보면 모이는 자리가 흐려져.”
관제사가 물었다.
“그럼 80장을 다시 다 맞춥니까.”
“응. 81장을 처음부터 다시 맞춰.”
“사흘 동안 잘 맞아 있던 80장을 다시 건드립니까.”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잘 맞아 있던 게 아니야. 80장끼리 맞아 있던 거야. 81장이 되면 그건 다른 물건이야. 하나가 늘면 늘어난 하나만 손보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하면 늘어난 하나한테만 맞는 고리가 돼.”
88차 정렬이 시작됐다. 격자 간격은 여전히 십분의 1밀리미터가 남아 있었다. 사흘 전과 같은 숫자였다. 새것이 들어와서 좋아진 게 아니라, 새것이 들어와도 나빠지지 않은 것이었다.
송전은 끊기지 않았다. 누적 시간이 1704시간이 되었다. 칠십하루째였다.
관제사가 흐름표에 오늘 것을 적었다.
오늘 한 일: 자리에 넣음. 아직 다 안 맞았음.
팀장이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으라고 했다.
80장이 사흘 동안 비워 놓은 자리라서 들어갈 수 있었음.
“이건 왜 적습니까.”
“석 달 뒤에 이 기록을 보는 사람은 오늘 한 장 넣은 것만 볼 거야.”
팀장이 말했다.
“사흘 전에 80장이 3분씩 물러난 건 아무 데도 안 적혀 있어. 그날 흐름표에는 오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고, 그건 아무것도 안 한 날처럼 보여. 넣는 날은 표가 나고 비우는 날은 표가 안 나. 그래서 적어 놔야 돼.”
3. 25줄
같은 날 아침, 발사장 회의실에는 사람이 22명 앉아 있었다.
비행 후 검토는 어제 끝났다. 오늘은 다른 자리였다. 벽에는 석 달 전에 붙인 종이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발사 제한 조건 23줄이었고, 제일 아래에 그저께 날짜가 적혀 있었다. 고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팀장이 그 종이 앞에 섰다.
“오늘 이걸 고칩니다.”
몇 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저께 아침에 이 종이를 넓히자고 했던 유도 담당이 제일 먼저 팀장을 보았다.
“그저께는 안 고친다고 하셨는데요.”
“그저께는 가고 싶었으니까.”
팀장이 말했다.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 규정은 안 갈 때 고치는 거야. 갈 때 고치는 건 고치는 게 아니라 넘어가는 거고.”
유도 담당이 물었다.
“그럼 일곱째 줄을 75로 넓힙니까.”
“아니. 70은 그대로 둡니다.”
팀장이 종이 옆에 새 종이를 붙였다.
“그날 우리를 통과시킨 건 한계가 아니라 새벽에 기구를 세 번 띄운 거였어요. 예보가 65였고 실측이 육십팔이었는데, 그 68로 경로를 다시 만들어서 여유가 19퍼센트 남았습니다. 예보값으로 그냥 갔으면 8퍼센트였고요. 넓혀야 될 건 한계가 아니라 방법입니다.”
새 종이에 2줄이 추가됐다. 24번째 줄과 25번째 줄이었다.
24번째 줄에는 상층풍이 한계의 90퍼센트를 넘으면 발사 당일 새벽에 실측을 세 번 하고 그 값으로 비행 경로를 다시 만든다고 적혀 있었다. 25번째 줄에는 그 재계산이 끝나야 하는 시각이 적혀 있었다. 그저께는 예정보다 20분 늦었고, 그 20분이 어디서 늦었는지가 어제 검토에서 나왔다.
“한계를 넓히면 그날 한 번 더 갈 수 있고, 방법을 적으면 앞으로 계속 갈 수 있습니다.”
팀장이 종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하나 더.”
젊은 관제사가 자기 이름이 불릴 줄 모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흘 전에 3번 밸브 몸통 온도를 굳이 말했던 사람이었고, 그 항목은 별표가 붙은 채로 발사 당일에 실제로 쓰였고, 어제는 1단과 함께 바다 밑으로 떨어졌다.
“3번 밸브 몸통 온도, 정규 항목으로 올립니다. 번호는 147번입니다.”
관제사가 종이를 받았다.
“별표가 없어졌습니다.”
“응. 이제 별표가 아니야.”
팀장이 말했다.
“별표는 누가 봐 주니까 있는 거야. 자네가 안 보면 아무도 안 보는 값이었어. 번호가 붙으면 자네가 없어도 누가 봐. 자네 이름은 이제 저기 안 적혀 있고, 대신 저 값은 앞으로 계속 읽혀.”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갈 때 팀장이 명호를 불렀다.
“다음 건 자네가 앞에 서.”
명호가 종이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제가 말입니까.”
“이번에 자네가 한 일이 뭔지 알아?”
팀장이 벽의 25줄을 가리켰다.
“자네는 아무것도 새로 안 만들었어. 있던 걸 매일 아침에 어제와 같은가 하고 들여다봤을 뿐이야. 그게 제일 안 표 나고 제일 안 없어지는 일이야. 새로 만드는 사람은 많아. 매일 같은 걸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들 못 가는 거고.”
명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종이를 마저 정리했고, 그건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일 긴 대답이었다.
4. 옮겨 심음
병실 창가에 화분이 2개 있었다.
원래는 하나였다. 오늘 아침에 김지수가 빈 화분을 하나 더 들고 왔다.
26일째였고, 두 싹이 나란히 서 있었다. 첫 싹은 떡잎 사이에 본잎이 2장 벌어져 있었고, 나흘 늦게 나온 두 번째 싹은 어제 굽었던 목을 오늘 아침에 폈다. 첫 싹이 스무하루 만에 한 일을, 늦은 쪽은 스무닷새 만에 했다. 나흘 차이는 그대로였다.
진우가 화분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둘이 붙어 있네요.”
“네. 그래서 오늘 옮겨요.”
“하나를 뽑습니까.”
김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뽑는 건 자리가 하나일 때 하는 거예요. 자리는 만들면 돼요.”
김지수가 손끝으로 흙을 조금 걷어 냈다.
“둘이 한 화분에 있으면 나중에 둘 다 못 커요. 위에서는 잎이 서로 그늘을 지고 밑에서는 뿌리가 같은 물을 나눠 먹어요. 그러면 둘 다 반씩만 자라요.”
“그럼 지금 떼면 안 다칩니까.”
“지금이니까 되는 거예요.”
김지수가 첫 싹 둘레를 넓게 파기 시작했다.
“뿌리가 아직 짧아요. 2주만 있으면 두 뿌리가 서로 감아요. 감기고 나면 떼는 순간에 둘 다 끊어져요. 그때는 옮기는 게 아니라 다치게 하는 거예요.”
진우가 그 손을 보다가 물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파신 겁니까.”
“아니요. 오늘 알았어요.”
김지수가 웃었다.
“어제까지는 늦은 쪽이 나오는지를 봐야 했으니까요. 나오기 전에 화분을 준비하면 안 나올 때 그 화분이 계속 보여요.”
첫 싹은 뿌리에 흙을 한 덩이 붙인 채로 옮겨졌다. 김지수는 뿌리를 흙에서 씻지 않았다.
“뿌리 끝에 아주 가는 털이 있어요. 물을 먹는 건 굵은 뿌리가 아니라 그 털이에요. 흙을 털면 그 털이 같이 떨어져요. 그래서 흙째로 옮겨요. 옮기는 건 뿌리가 아니라 뿌리가 있던 자리째로 옮기는 거예요.”
옮기고 나서 물을 주었다. 물을 주고 나서 김지수가 화분을 창가에서 조금 안쪽으로 밀었다.
“오늘이랑 내일은 그늘에 둬요.”
“햇빛을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뿌리가 아직 물을 못 빨아요. 잎은 볕을 보면 물을 내보내는데 밑에서 못 올려 주면 시들어요. 옮긴 다음 이틀은 일부러 덜 줘요. 잘 자라게 하는 게 아니라 안 마르게만 하는 이틀이에요.”
진우가 화분 2개를 나란히 보았다. 하나는 21일째 것이었고 하나는 25일째 것이었다. 이제 각자 화분이 하나씩이었다.
오후에 진우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수였다.
수요일 저녁 괜찮으세요.
진우가 그 화면을 한참 보고 있었다. 김지수가 옆에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진우가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세 번 지웠다. 네 번째에 보낸 것은 아주 짧았다.
그래. 뭐 먹을래.
보내고 나서 진우가 말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제가 뭘 물어봤습니다.”
“뭘 물어보셨는데요.”
“뭐 먹을래요.”
진우가 조금 웃었다.
“별거 아니죠.”
“별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지금까지는 아버님이 다 대답만 하셨잖아요. 오라고 하면 가고, 시간 정해 주면 그 시간에 가고요. 묻는 사람은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다음이 없으면 안 물어봐요.”
저녁에 집에 와서 진우가 부엌 벽 앞에 섰다.
종이는 그대로 붙어 있었다. 앞면에는 5년 동안 세던 2줄이 있었고, 그 아래 지난주에 적은 시각 3개가 있었다. 9시, 11시, 11시 반. 셋 다 이미 지나갔다.
진우가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수요일 저녁 7시.
지나간 3개를 지우지 않았다. 지운 자리는 안 지나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종이 뒷면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진우는 오늘도 뒤집지 않았다. 그건 아직 아들 몫이었다.
5. 뒤에 오니까 붙음
소율은 아흐레째였다.
어제 아홉째 마디가 세 번째 마디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챘고, 확정은 안 했다. 오늘도 그러면 그때 적기로 했다.
오늘도 그랬다.
아홉째 마디의 끝을 놓으면 손이 저절로 세 번째 마디의 첫음으로 갔다. 세 번 해 봤고 세 번 다 그랬다.
“닫혔어요.”
소율이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
“닫혔다는 게 뭐예요.”
“끝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요.”
소율이 건반에서 손을 뗐다.
“곡이 끝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그냥 멈추는 거고 하나는 돌아가는 거예요. 멈추는 건 저기까지 갔다는 뜻이고 돌아가는 건 한 바퀴였다는 뜻이에요.”
“어느 쪽이 좋은 거예요.”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그 곡이 어느 쪽인지가 있어요.”
소율이 종이를 폈다.
“이 곡은 돌아가는 쪽이었어요. 제가 정한 게 아니라 아홉째 마디가 세 번째로 가려고 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틀 전에 소율은 앞의 2마디를 곡에서 뗐다. 처음 며칠 동안 나온 그 2마디였고, 나머지 6마디가 전부 거기서 자라 나온 씨앗이었는데, 8마디로 이어 붙이려니까 앞에 있으면 안 붙었다. 지우지 않고 줄을 긋고 그 아래부터 다시 적었다.
오늘 아홉째 마디를 세 번째로 돌려 보내면서 소율은 곡의 맨 끝이 허전한 걸 느꼈다. 한 바퀴는 돌았는데 문이 안 닫힌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소율이 줄 그은 데를 다시 보았다.
떼어 낸 2마디를 맨 뒤에 붙여 보았다.
붙었다.
소율이 손을 무릎에 놓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이상해요.”
“뭐가요.”
“똑같은 2마디예요. 앞에 있을 때는 안 붙었는데 뒤에 오니까 붙어요.”
소율이 다시 처음부터 쳤다. 세 번째 마디부터 시작해서 7마디를 지나고 아홉째에서 돌아왔다가, 마지막에 그 2마디가 나왔다. 처음 며칠 동안 매일 치던 2마디였고, 그 자리에서는 다르게 들렸다.
“음은 하나도 안 바꿨어요.”
소율이 말했다.
“순서만 바꿨어요. 그런데 소리가 달라요.”
옆 사람이 물었다.
“왜 달라져요.”
“제가 그 사이에 7마디를 지나왔으니까요.”
소율이 종이에 마지막 2마디를 적었다.
“같은 걸 들어도 언제 듣느냐에 따라 달라요. 처음에 들으면 시작이고 다 지나고 들으면 돌아온 거예요. 저는 저 2마디가 안 맞는 줄 알았는데 안 맞는 게 아니라 아직 자리가 아니었던 거예요.”
종이에 11마디가 적혔다. 아흐레 만이었다.
소율이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떼어 낸 것을 안 버려서 다행이었다.
밤에 한 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쳤다. 곡이 닫혔고, 닫히고 나니까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흐레 동안 성가시게 굴러다니던 것이 오늘 밤에는 안 굴러다녔다.
소율은 그게 섭섭한 것도 알았고, 섭섭한 게 맞는 거라는 것도 알았다.
6. 안 해도 되는 날
동현은 연차 둘째 날이었다.
어제는 갈 데가 없었다. 오늘은 갈 데를 정하고 나왔다.
주머니에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어제도 넣고 나갔다가 하루 종일 안 폈다.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폈다. 모서리에 들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10년 동안 서류만 보던 눈으로 자세히 보니까 꽃잎이 5장이었고 실이 두 가지 색이었다.
동현이 간 데는 약국이었다.
한참을 문 앞에 서 있다가 들어갔다. 안에 나이 든 사람이 있었다. 동현이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요.”
“네.”
“제 사무실에 이게 왔습니다. 누가 놓고 갔는지 몰라서요.”
박영자가 손수건을 잠깐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놓은 게 맞아요.”
“왜 저한테 주셨습니까.”
“안 드렸어요.”
박영자가 말했다.
“저는 여기서 몇 장 드렸고, 그다음은 제가 안 했어요. 그 손수건이 아저씨한테 갔으면 중간에 누가 있었던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동현이 손수건을 다시 보았다.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안 받아요.”
“왜요.”
“저한테 오면 거기서 멈추니까요.”
박영자가 웃었다.
“다음 사람한테 주세요. 아무나요. 그 사람도 저 안 만나도 돼요.”
동현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10년 동안 하던 일이 그거였다. 무슨 서류든 자기를 거쳐서 가게 만드는 일이었고, 그걸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열흘 전에 그걸 여섯으로 나눠서 각자한테 보냈고, 통째로 가진 게 하나도 안 남았다.
이 손수건은 처음부터 그 방식으로 온 것이었다.
동현이 밖으로 나와서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안 접고 넣었다. 접으면 다시 안 펴게 된다.
집에 오는 길에 사무실 생각이 한 번 났다. 명찰 5장이 붙은 판이 있고, 다섯째까지는 다 채웠고, 여섯째 자리를 비워 뒀다가 그만두었다.
이제는 그 자리에 누구 이름을 적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적을 사람은 없었다. 그 자리는 이름을 적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음에 오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적으라고 비워 두는 자리였다.
동현이 흐름표를 꺼내지 않았다. 어제도 안 꺼냈다.
이틀 동안 안 썼는데 아무것도 안 밀렸다.
맞물린다는 것은 서로 가까워지는 일이 아니다. 가까워지기만 하면 부딪친다. 맞물리려면 먼저 물러나야 한다. 80장이 각자 3분씩 물러나서 만든 자리에만 81번째가 들어갈 수 있었고, 그 3분씩은 아무 데도 표가 안 났다. 자리는 남는 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들이 조금씩 내놓아야 생긴다.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다. 하나가 늘면 늘어난 하나만 손보면 될 것 같지만, 하나가 늘어난 것은 전부가 달라진 것이다. 81장은 80장에 하나를 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물건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맞춘다. 새로 온 것을 받는다는 것은 자리를 내주는 일이 아니라 전부가 조금씩 다시 서는 일이다.
안 맞는 것과 아직 자리가 아닌 것은 다르다. 앞에 두면 안 붙던 2마디가 뒤로 가니까 붙었다. 음은 하나도 안 바뀌었고 지나온 것만 달라졌다. 그러니 안 맞는다고 버리면 안 된다. 줄을 긋고 그 아래부터 다시 적으면 된다. 지우지 않은 것만 나중에 돌아올 수 있다.
81장이 오늘 처음으로 같은 데를 보았다.
내일부터는 81장이 서로를 맞추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