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50화 - 지냄

제150화 「지냄」
1. 93번째
발사한 지 여드레가 지났다.
그동안 관제실에서 한 일은 하나뿐이었다. 81장을 서로 맞추는 일이었다.
닷새 전 새벽에 새것이 자리에 들어갔을 때 인턴은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팀장은 그날 아니라고 했다. 이제 81장이 서로를 봐야 한다고 했다. 인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날 오후에 알았다.
한 장을 자리에 넣자 그 옆의 20장이 어긋났다.
거울은 빛을 제 앞으로 받아서 지상의 한 군데로 던지는 물건이다. 80장이 같은 자리로 던지도록 맞춰 놓았는데 가운데에 한 장이 새로 들어오면 그 한 장이 던지는 몫만큼 다른 장들이 조금씩 각을 물려 줘야 했다. 물려 준 각은 또 그 옆으로 번졌다.
“한 번에 다 못 고칩니까.”
인턴이 물었었다. 유도 담당이 화면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고치면 또 어긋나. 81장을 한꺼번에 푸는 식이 없어. 조금씩 여러 번 돌리면서 값이 작아지는 걸 보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89번째, 90번째, 91번째, 92번째가 있었다. 매번 조금씩 나아졌고 매번 다 맞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8시 11분에 93번째가 끝났다.
“격자 오차 0.07밀리미터입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인턴은 그 숫자가 왜 조용한지 몰라서 옆을 봤다. 유도 담당이 설명해 줬다.
“석 달 동안 0.1이었어.”
“좋아진 겁니까.”
“응. 처음이야.”
80장일 때는 매번 0.1이 나왔다. 좋아지지 않고 나빠지지도 않는 값이었다. 한 장이 늘고 다섯 번을 돌린 끝에 그 값이 처음으로 내려갔다.
팀장이 다른 화면을 켰다. 지상 수전소의 하루치 그래프였다.
선은 대체로 평평했는데 하루에 한 번, 아주 얕게 파인 자리가 있었다.
“여기가 벌어진 데가 지나가는 시각이야. 4분 12초 동안 오는 빛이 얇아져. 그동안은 지상에 쌓아 둔 걸 꺼내 썼어.”
팀장이 손끝으로 그 얕은 골을 짚었다.
“오늘 저녁 6시 40분부터 저게 없어져.”
인턴이 물었다.
“그럼 이제 정말 닫힌 겁니까.”
“오늘 닫혔지.”
팀장이 말했다. 그러고 잠깐 있다가 덧붙였다.
“내일부터 벌어져.”
인턴이 팀장을 봤다. 팀장은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지구가 완전한 공이 아니야. 적도가 조금 부풀어 있어. 그래서 그 위를 도는 것들은 궤도면이 매일 조금씩 돌아가. 높이가 몇 미터만 달라도 도는 속도가 달라지고, 속도가 다르면 앞의 것과 뒤의 것 사이가 매일 조금씩 벌어져.”
“몇 미터 차이로 말입니까.”
“응. 그리고 저건 거울이야.”
팀장이 화면의 고리를 가리켰다.
“얇고 넓어. 빛을 받는 물건이라 빛한테 밀려. 세게 밀리는 건 아닌데 하루 종일 밀리고 몇 달을 밀려. 저건 제 일을 하느라 제자리를 잃어.”
인턴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럼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나.”
팀장이 흐름표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끝나는 건 안 쓰는 물건이야. 쓰는 물건은 안 끝나.”
팀장이 오늘 칸에 2줄을 적었다.
오늘 한 일: 81장을 다 맞춤. 내일 할 일: 다시 맞춤.
인턴이 그 2줄을 보다가 물었다.
“그럼 오늘 한 건 뭡니까.”
“오늘 한 게 있어야 내일 조금만 맞추면 돼.”
팀장이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반년 뒤에 저건 고리가 아니라 그냥 흩어진 81장이야. 매일 조금 맞추면 계속 고리고.”
누적 송전 시간이 1824시간이었다. 76번째 날이었다.
2. 근거 없음
명호가 회의실 앞자리에 섰다.
앞자리에 서 본 적이 없었다. 팀장은 옆에 앉아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호가 처음 꺼낸 건 다음 발사 일정이 아니었다.
“오늘 주문해야 되는 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류를 넘겼다.
“다음 발사가 반년 뒤라고 하면 반년 있다가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다. 노즐 하나 만드는 데 넉 달입니다. 탱크 판을 마는 데 다섯 달이고, 그 판을 만드는 데 쓸 재료를 주문하고 받는 데 6주입니다.”
명호가 표의 맨 아래를 짚었다.
“제일 오래 걸리는 걸 거꾸로 세면 오늘입니다. 오늘 안 주문하면 반년 뒤가 아니라 여덟 달 뒤입니다.”
“급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요.”
누가 말했다.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급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급해지는 건 넉 달 뒤인데,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명호는 그 말을 하면서 닷새 전 새벽 관제실에서 들은 말을 생각했다. 도착할 때 맞추는 게 아니라 떠날 때 맞춰야 한다는 말이었다. 여기서도 같았다.
두 번째 안건이 종이였다.
명호가 25줄짜리 종이를 복사해서 돌렸다. 복사본에는 오른쪽에 빈 칸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종이를 다른 팀도 쓰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대로는 못 씁니다.”
“왜 못 씁니까. 숫자가 다 적혀 있는데요.”
“숫자만 적혀 있어서 못 씁니다.”
명호가 일곱째 줄을 짚었다. 상층풍 한계 초당 70미터라고 적힌 줄이었다.
“이게 왜 칠십인지가 이 종이에 없습니다. 제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으면 저한테 물어봐야 되고, 저한테 물어보게 만들면 그 줄은 제 것이지 규정이 아닙니다.”
명호는 지난 나흘 동안 25줄 옆에 근거를 적었다고 했다. 한 줄에 반나절씩 걸린 것도 있었다. 왜 칠십인지를 적으려면 몸통이 견디는 굽힘 하중과 그때 나오는 받음각을 다시 계산해야 했고, 그 계산이 언제 만들어진 건지를 찾아야 했다.
“25줄 중에 22줄은 적었습니다.”
“나머지 셋은요.”
명호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모릅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열넷째 줄은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있던 값입니다. 물려받았습니다. 왜 그 값인지 아는 사람을 못 찾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명호가 복사본을 들어 보였다. 열넷째 줄 옆 칸에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근거 없음.
“지우지 그래.”
팀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명호가 고개를 저었다.
“지우면 다음 사람이 이 줄을 처음부터 다시 만듭니다. 만들면서 또 근거를 안 적을 거고요. 근거 없음이라고 적혀 있으면 다음 사람이 찾아봅니다.”
명호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적어 놓는 게 아는 걸 적는 것보다 오래갑니다. 아는 건 적어 놓으면 끝인데 모르는 건 적어 놔야 누가 채웁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간 뒤에 팀장이 물었다.
“내일 아침 점검은 자네가 해?”
“둘이 하려고 합니다.”
명호가 말했다. 3번 밸브를 보던 젊은 관제사와 같이 하기로 했다고 했다.
“둘이 보면 느립니다. 10분이면 될 걸 20분 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보는 걸 저 사람이 배우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보고 제가 또 보게 하려고요.”
명호가 종이를 접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야 제가 없는 날에도 그 10분이 남습니다. 느려지는 게 이 일의 값입니다.”
3. 벽 너머
소율은 열나흘째였다.
곡이 닫힌 지 닷새가 지났고, 그동안 매일 한 번씩 처음부터 끝까지 쳤다. 11마디였다. 아홉째 마디가 세 번째로 돌아가고, 앞에서 떼어 낸 2마디가 맨 뒤에 붙어서 한 바퀴가 되었다.
오후에 연습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옆방 사람이었다. 얼굴은 알았다. 복도에서 몇 번 지나쳤고 인사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 곡 다 됐어요?”
소율이 손을 건반에서 떼면서 물었다.
“어떻게 아세요.”
“지난주까지는 같은 데서 멈췄어요.”
옆방 사람이 벽을 가리켰다.
“똑같은 데서 멈추고 다시 처음부터. 하루에 열몇 번씩요. 그런데 이번 주부터는 안 멈춰요. 끝까지 가고 조금 있다가 또 끝까지 가요.”
소율은 벽을 봤다. 자기가 매일 몇 번씩 멈춘 걸 벽 너머에서 세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멜로디도 들려요?”
“아뇨.”
옆방 사람이 웃었다.
“높은 건 안 넘어와요. 벽이 높은 소리를 잘 먹어요. 넘어오는 건 낮은 거랑 언제 치고 언제 안 치는지뿐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곡인지는 몰라요. 어디서 멈추는지만 알아요.”
소율은 그 말을 한동안 생각했다.
자기는 이 곡을 만드는 동안 선율만 생각했다. 아홉째 마디가 어떻게 생겼는지, 앞의 2마디를 어디로 옮길지. 그런데 벽 너머 사람이 아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아는 건 자기가 어디서 걸렸고 언제부터 안 걸렸는지였다.
그건 소율 자신도 세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들어 보실래요.”
소율이 말했다. 말해 놓고 조금 놀랐다. 곡을 다 만들고 남한테 처음 들려주는 건 무대라고 생각했었다.
문을 열어 놓고 쳤다.
11마디는 짧았다. 다 치고 나니까 옆방 사람이 말했다.
“짧네요.”
“한 바퀴예요.”
소율이 말했다.
“한 바퀴면 다시 치면 되겠네요.”
소율이 다시 쳤다. 두 번째로 칠 때 처음으로 손이 안 떨렸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첫 마디로 들어갈 때 그 이음매가 이번엔 걸리지 않았다.
옆방 사람이 나가고 나서 소율은 종이를 폈다.
무대는 굳히는 자리라고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 안 게 하나 더 있었다.
굳기 전에 한 번은 남 앞에서 흘러 봐야 했다.
소율은 다음 달 무대 목록에 이 곡을 적었다. 11마디짜리 곡이었고 제목은 아직 없었다. 제목 칸에는 비워 두었다.
비워 둔 자리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4. 20건에 하나
동현은 복귀 사흘째였다.
나흘 쉬고 돌아온 첫날 아침에 책상을 보고 한동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 쌓여 있었다.
10년 동안 하루를 쉬면 이틀 치가 쌓였다. 이틀을 쉬면 나흘 치가 쌓였다. 그건 자기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나흘을 쉬었는데 아무것도 안 쌓였다.
발사 전에 파일철을 여섯으로 나눠 각 부서에 보낸 게 나흘 동안 실제로 굴러갔다. 각자 자기 몫을 자기가 처리했다.
그런데 한 건이 잘못 처리돼 있었다.
승인 순서가 뒤바뀐 건이었다. 동현이 있었으면 안 났을 실수였다. 부장이 그걸 들고 왔다.
“역시 자네가 있어야 되겠어.”
동현은 서류를 받아서 봤다. 어디서 틀렸는지는 30초 만에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고쳐서 돌려줬을 것이다. 그게 제일 빨랐다.
동현은 고치지 않았다.
대신 나눠 보낸 문서에서 그 항목이 몇 쪽에 있는지를 찾아서 담당자에게 갔다.
“여기 보시면 됩니다.”
“제가 고칠까요.”
“네. 고치시고, 다 고치시면 알려 주세요. 제가 문서에 한 줄 넣겠습니다.”
담당자가 갔다. 부장이 옆에서 봤다.
“자네가 고치면 5분이면 되잖아.”
“제가 고치면 다음에도 저한테 옵니다.”
동현이 말했다.
“이번에 저 사람이 고치면 다음에는 저 사람이 압니다.”
“그동안 틀리는 건.”
“틀립니다.”
동현이 계산한 게 있었다. 나흘 동안 여섯 부서를 지나간 건이 54건이었다. 그중 잘못 처리된 게 세 건이었다. 20건에 하나꼴이었다.
“제가 다 하면 안 틀립니다. 대신 제가 없으면 54건이 다 멈춥니다.”
동현이 서류를 부장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지금은 20건에 하나 틀리는데 제가 없어도 19건은 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도 다음 달에는 안 틀릴 겁니다. 저는 10년 동안 안 틀렸는데 10년 동안 저 말고는 아무도 안 배웠습니다.”
부장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오후에 새로 온 사람이 인사를 왔다. 지난주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명찰 5개가 걸린 자리 옆에 여섯 번째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이 거기 걸렸다.
동현은 서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접혀 있지 않았다. 열흘 전부터 접지 않고 뒀다.
“이거 받으세요.”
새로 온 사람이 손수건을 봤다. 모서리에 들꽃이 5장 수놓여 있었고 실이 두 색이었다.
“왜 저한테요.”
“모르겠습니다.”
동현이 말했다.
“저도 왜 저한테 왔는지 모릅니다. 놓은 사람은 저한테 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중간에 누가 있었는데 그게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새로 온 사람이 손수건을 받았다.
“그럼 저는 이걸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접지 마세요.”
동현이 말했다.
“접으면 다시 안 펴게 됩니다.”
동현은 그날 흐름표를 안 썼다. 이레째 안 쓰고 있었고 아무것도 안 밀렸다.
5. 한 뼘
31번째 날이었고 진우 차례였다.
화분이 2개였다. 닷새 전에 나눴다. 늦은 싹을 새 화분으로 옮겼고 이틀 그늘에 뒀다가 볕으로 냈다.
첫 화분의 싹은 본잎이 2장 더 났다. 늦은 싹은 옮긴 뒤로 사흘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김지수가 왔을 때 진우가 그 얘기를 먼저 했다.
“사흘 동안 멈춰 있었습니다.”
“위가요?”
“네. 잎도 안 커지고 색도 안 진해지고요.”
“밑에서 하고 있었을 거예요.”
김지수가 화분 옆에 앉았다.
“옮길 때 뿌리털이 다 끊어져요. 물을 먹는 건 그 털인데 그게 없으니까 며칠은 못 먹어요. 그동안 위를 키우면 키운 만큼 마르니까 위를 안 키워요. 밑에다 새 털을 내느라 다 쓰는 거예요.”
“안 자라는 게 아니라.”
“밑에서 자라는 거죠.”
진우가 늦은 화분을 봤다. 오늘 아침에 잎 하나가 어제보다 조금 넓어져 있었다.
“오늘 다시 큽니다.”
“그럼 밑에 다 났나 보네요.”
김지수가 두 화분의 자리를 보고 물었다.
“이건 왜 이렇게 놓으셨어요?”
두 화분이 한 뼘쯤 떨어져 있었다. 붙어 있지도 않고 창가 양쪽 끝으로 갈라져 있지도 않았다.
“붙여 놓으니까 큰 쪽 잎이 작은 쪽에 그늘을 지길래요.”
진우가 말했다.
“그래서 떼어 놨는데, 너무 떼어 놓으니까 아침에 하나만 보고 하나는 안 보게 되더라고요. 저쪽 끝에 있으면 물 주는 날을 잊습니다.”
김지수가 웃었다.
“보이는 데는 같이 두고 닿는 데는 떼어 놓으셨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김지수가 화분 흙을 손끝으로 눌러 보고 진우를 봤다.
“물을 덜 주셨네요.”
“네.”
“왜요?”
진우가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뿌리가 짧으니까 밑에 있는 물은 못 먹겠다 싶었습니다. 못 먹는 물이 밑에 계속 고여 있으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았고요.”
김지수가 진우를 봤다.
“누가 가르쳐 주셨어요?”
“아뇨.”
진우가 말했다.
“스무 날 봤습니다.”
김지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진우가 그 말을 대단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가면서 김지수가 물었다.
“오늘 저녁이죠.”
“네.”
“7시요.”
“네.”
“몇 시에 나가실 거예요?”
진우가 잠깐 말이 없었다.
“6시에 나가려고 했는데 6시 반에 나가겠습니다.”
“왜 바꾸셨어요?”
“6시에 나가면 30분을 밖에 서 있게 되겠더라고요.”
진우가 말했다.
“30분 서 있으면 들어갈 때 이미 지쳐 있습니다.”
6. 7시
진우는 6시 50분에 도착했다.
10분을 밖에 서 있었다. 30분보다는 나았다.
아들이 고른 집이 아니었다. 현수가 답장으로 물었었다. 아버지 드시고 싶은 거요, 라고 왔다.
진우는 그 답을 이틀 동안 못 했다.
5년 동안 누가 뭘 먹겠냐고 물으면 아무거나, 라고 했었다. 그게 겸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를 안 생각한 지 오래됐던 것이었다. 아내가 좋아하던 건 기억이 났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한참 걸렸다.
이틀째 밤에 생각이 났다.
냉면이었다. 아내는 별로 안 좋아했다. 그래서 5년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안 먹었다.
7시에 현수가 왔다.
두 사람은 냉면을 먹었다. 처음 10분은 별말이 없었고 그다음에는 현수가 회사 얘기를 했다. 지난번 국밥집에서 한 얘기의 다음 얘기였다.
가위를 건네주다가 현수가 말했다.
“저 그날 들었어요.”
진우가 젓가락을 멈췄다.
산소에서였다. 현수가 몇 걸음 물러서면서 아버지도 뭐 말씀하세요, 라고 했고 진우가 5년 만에 소리를 내서 말했었다. 약 먹고 있다고, 그해에는 안 먹었다고, 지금은 아침에 하나 먹는다고.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들었으면 들은 거고 못 들었으면 다음에 자기가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진우가 말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 말도 안 붙였다.
현수도 아무 말도 안 붙였다. 다시 회사 얘기를 했다.
나올 때 현수가 말했다.
“다음 달에도 수요일 괜찮으세요?”
진우가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되물었다.
“매달 할까.”
현수가 잠깐 진우를 봤다.
“네.”
집에 와서 진우는 부엌 벽 앞에 섰다.
종이에는 시각이 4개 적혀 있었다. 지나간 것 3개는 안 지웠다. 오늘 지나간 것이 네 번째였다.
진우는 다섯 번째 시각을 안 적었다.
대신 그 아래에 다섯 글자를 적었다.
매달 수요일.
날짜를 안 적었다. 날짜를 적으면 그날까지 세게 될 것 같았고, 오늘은 세지 않아도 오는 것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오랫동안 세는 사람이었다. 세는 것으로 견뎌 왔다. 세는 걸 그만두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종이 뒷면에 손이 갔다.
뒷면에는 아직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다. 아들 몫으로 비워 둔 면이었다.
진우는 종이 아래쪽을 손끝으로 조금 들었다가 놓았다.
오늘은 안 뒤집었다.
닫힌다는 것은 더 할 일이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안 쓰는 물건뿐이다. 쓰는 물건은 매일 조금씩 흐트러지고, 그래서 매일 조금씩 맞춰야 한다. 오늘 다 맞췄기 때문에 내일은 조금만 맞추면 된다. 완성은 끝나는 일의 이름이 아니라 매일 다시 해야 하는 일의 이름이다.
안 자라는 며칠이 있다. 위가 멈춘 며칠은 밑에서 뿌리털이 나는 며칠이다. 그 며칠 동안 억지로 위를 키우면 키운 만큼 마른다.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과 멈춘 것은 다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어 놓아야 누가 채운다. 아는 것은 적어 놓으면 거기서 끝나지만 모르는 것은 적어 놓아야 시작된다. 지운 자리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은 세지 않아도 온다. 세는 일은 오지 않을까 봐 하는 일이다. 오는 것이 확실해지면 세지 않게 되고, 세지 않게 되는 것이 기다림의 끝이다.
81장이 오늘 처음으로 한 바퀴를 다 채웠다.
내일부터는 그것이 조금씩 벌어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