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화 - 내려감

제1화 「내려감」
1. 412미터
바람이 밤새 불다가 새벽 4시쯤 그쳤다.
한서진은 6시에 시추동으로 들어갔다. 캠프에서 유일하게 밤새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이었다. 바깥은 영하 34도였고 안은 영하 20도였다. 여기서는 그 14도 차이가 따뜻하다는 뜻이었다.
시추기는 천장까지 닿는 철탑이었다. 그 아래로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은 얼음 속으로 400미터 넘게 내려가 있었다.
우재혁이 계기판 앞에 서 있었다. 이번 시즌에 처음 온 기사였다. 스물아홉이었고, 남극은 처음이었다.
“밤에 한 번 올렸습니다. 409미터에서 412미터.”
“깨진 데는.”
“두 군데요. 끝에서 손가락 2마디쯤 갈라졌습니다.”
서진이 코어 처리대 쪽으로 갔다.
받침대 위에 얼음 기둥이 놓여 있었다. 지름은 어른 팔뚝만 했고 길이는 세 뼘씩 세 토막이었다. 투명하지 않았다. 안쪽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뿌연 건 왜 그렇습니까.”
“기포야.”
서진이 장갑 낀 손으로 기둥을 돌렸다. 조명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안에서 잔 알갱이들이 반짝였다.
“눈이 쌓이면 사이사이에 공기가 남아 있어. 위에 눈이 더 쌓이면 눌리고, 더 눌리면 얼음이 되는데, 그때 그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그럼 저 안에 있는 게.”
“공기지.”
재혁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지금 우리가 숨 쉬는 거 말고요.”
“응. 여기 이 층이 쌓인 게 대략 1600년쯤 전이야.”
서진이 기둥 옆면을 손끝으로 짚었다. 자세히 보면 아주 얕은 결이 가로로 나 있었다. 결과 결 사이가 손톱 너비쯤 됐다.
“이 한 줄이 한 해야. 위쪽에서는 이게 한 뼘씩 됐어. 여기까지 내려오니까 이만해졌고, 3000미터쯤 가면 종이 한 장 두께가 돼.”
“눌려서요.”
“눌리고, 옆으로 퍼져. 밑에 있는 얼음은 위에서 계속 누르니까 천천히 옆으로 흘러. 그래서 한 해가 얇아지는 거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재혁이 기록판에 412라고 적었다.
목표는 3200미터였다. 바닥까지였다.
“오늘 몇 미터 갑니까.”
“12미터.”
“어제는요.”
“12미터.”
재혁이 잠깐 계산하는 얼굴이 됐다.
“그럼 230일쯤 걸리는데요.”
“그렇게 안 걸려. 대신 더 걸려.”
“어느 쪽입니까.”
“둘 다야.”
서진이 처리대의 조명을 껐다.
“깊어질수록 한 번 내려갔다 올라오는 데 오래 걸려. 지금은 왕복 40분인데 3000미터 가면 2시간이야. 그러면 하루에 6미터도 못 해.”
“그럼 한 번에 더 길게 뽑으면 안 됩니까.”
“길게 뽑으면 부러져.”
재혁이 구멍 쪽을 봤다. 입구에 기름 같은 것이 얇게 비쳤다.
“이건 뭡니까. 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시추액.”
“왜 채웁니까.”
“안 채우면 구멍이 닫혀.”
서진이 구멍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가리켰다.
“얼음은 단단해 보여도 위에서 누르면 천천히 흘러. 400미터쯤 되면 옆에서 밀고 들어와서 몇 주면 좁아지고, 더 깊어지면 며칠이야.”
“그럼 저 액체가 버팁니까.”
“밀도를 얼음이랑 비슷하게 맞춰 놨어. 바깥에서 미는 만큼 안에서도 밀어 주는 거지. 세우는 게 아니라 안 무너지게만 하는 거야.”
“안 채우고 빨리 뚫으면 되지 않습니까.”
“3000미터를 며칠에 뚫을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채워 놓고 가는 거야.”
“이번 시즌에는 어디까지 갑니까.”
“800.”
“3200이 목표라면서요.”
“이번 시즌은 800이야. 여기는 여름이 62일 남았고, 그다음에는 비행기가 안 떠.”
캠프 철수까지 62일이었다.
2. 312일
인천은 8월이었다.
문경옥은 오전 9시에 저온시료동 문 앞에서 방한복을 입었다. 밖은 31도였고 안은 영하 30도였다. 61도 차이를 옷 한 벌로 건너는 일을 스물세 해째 하고 있었다.
문을 열면 흰 김이 발치로 쏟아져 나왔다.
안에는 선반이 28줄 있었다. 선반마다 은색 통이 눕혀져 있었고, 통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라벨에는 시추 지점과 깊이가 적혀 있었다.
경옥은 셋째 줄로 갔다.
“오늘도 안 자릅니까.”
새로 온 연구원이 뒤에서 물었다. 스물여섯이었고, 온도가 낮은 데서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아직 15분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안 잘라요.”
“언제 자릅니까.”
“365일 지나고요.”
경옥이 통 하나의 라벨을 손등으로 쓸었다. 성에가 얇게 앉아 있었다.
“오늘이 312일째예요. 53일 남았어요.”
“1년을 그냥 둡니까.”
“그냥 두는 게 아니라 재우는 거예요.”
경옥이 통을 조금 돌려 눕힌 방향을 바로잡았다.
“이건 800미터에서 1300미터 사이에서 나온 거예요. 그 구간이 제일 까다로워요.”
“왜요.”
“거기서는 기포가 눌려 있어요. 얼음 안에서 눌린 채로 갇혀 있는데, 우리가 그걸 꺼내서 여기 가져오면 바깥 압력이 확 낮아지잖아요. 그럼 안에 있는 게 밀고 나오려고 해요.”
“터집니까.”
“바로는 안 터져요. 대신 안에 실금이 가요. 그 상태에서 톱을 대면 유리처럼 튀어요. 한 번 튄 건 못 붙여요.”
연구원이 통을 봤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1년 두면 그게 없어집니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아요. 안에 있는 게 얼음 쪽으로 조금씩 스며들어서 압력이 맞아요. 그래서 1년쯤 지나면 톱을 대도 안 튀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요.”
“온도를 안 흔들어요.”
경옥이 벽에 붙은 기록지를 봤다. 하루 한 번, 스물세 해 동안 같은 칸에 같은 걸 적어 온 종이였다.
“그게 여기서 하는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하는 거.”
3. 50도
오정한은 릴 하나를 손바닥에 얹고 무게를 가늠했다.
테이프에는 연필로 팔삼이라고 적혀 있었다. 1983년이라는 뜻이었다. 그 밑에 지워진 글씨가 있었는데 무슨 글씨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작업실은 20평이었고 그중 절반이 선반이었다. 정한은 예순셋이었고, 이 일을 35년 했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 건쯤 들어왔다.
가져온 사람은 40대 남자였다.
“아버지가 하시던 방송국에서 나온 거라고 들었습니다. 틀어 보려고 했는데 소리가 안 나서요.”
“틀어 보셨어요.”
“조금요. 30초쯤.”
“다시 트시면 안 됩니다.”
정한이 릴을 조명 아래로 옮겼다.
“이거는 지금 틀면 틀 때마다 없어져요.”
“고장 났습니까.”
“고장은 아니고요, 젖었습니다.”
정한이 테이프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아주 살짝 눌렀다가 뗐다. 손톱 끝에 잠깐 붙었다.
“보이시죠. 이게 붙습니다.”
“이게 왜 그럽니까.”
“테이프는 얇은 필름 위에 가루를 발라 놓은 겁니다. 그 가루를 붙여 놓는 풀이 있는데, 그 풀이 공기 중에 있는 물기를 몇십 년에 걸쳐 조금씩 먹습니다. 그러면 풀이 도로 물러져요.”
“그럼 지금 저 안에 있는 소리는요.”
“소리는 가루에 있습니다. 가루는 멀쩡해요. 풀만 물러진 겁니다.”
정한이 릴을 오븐 앞으로 가져갔다. 빵을 굽는 오븐이 아니라 온도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는 상자였다.
“50도로 8시간 둡니다. 그러면 풀이 먹은 물기가 빠져나가면서 잠깐 도로 단단해집니다.”
“고쳐지는 겁니까.”
“아니요. 잠깐입니다.”
정한이 온도를 맞췄다.
“길면 두 달, 짧으면 3주입니다. 그 안에 한 번 틀어서 옮겨 놔야 합니다. 그 뒤에는 다시 물러져요.”
“그럼 또 구우면 되지 않습니까.”
“몇 번은 됩니다. 몇 번뿐입니다.”
남자가 오븐을 봤다.
“그런데 구우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냄새가 납니다. 식초 냄새요. 그건 필름 자체가 삭는 건데, 그건 열을 주면 더 빨리 갑니다.”
“이건요.”
“이건 안 납니다. 그래서 굽는 겁니다.”
정한이 문을 닫았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구운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틀 때 같이 옮깁니다. 한 번 도는 동안에 소리를 받아서 파일로 만들어 둡니다. 그다음부터는 원본을 안 틀어도 됩니다.”
“그러면 이 릴은요.”
“이 릴은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나중에 더 좋은 방법이 나오면 다시 꺼내면 되니까요.”
남자가 잠깐 웃었다.
“버려도 되는 거 아닙니까. 파일이 있으면요.”
“저는 안 버리시라고 합니다.”
정한이 선반 쪽을 봤다. 남의 릴이 300개쯤 꽂혀 있었다. 찾으러 오지 않은 것도 그중에 있었다.
“30년 전에 옮겨 놓은 것들이 지금 들으면 얇습니다. 그때 기계가 그것밖에 못 받았어요. 그런데 가루에는 아직 더 들어 있습니다.”
“지금 기계는 다 받습니까.”
“지금 기계도 나중에 보면 그때 기계입니다.”
정한이 오븐 앞의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3주 안에 오세요. 그 안에 안 오시면 다시 처음부터입니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 정한은 연필로 팔삼이라고 적힌 자리를 다시 봤다. 그 밑에 지워진 글씨가 있었다. 눌린 자국은 남아 있는데 획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정한은 그 자국을 종이에 대고 연필을 눕혀 문질러 봤다. 세 글자였다. 세 글자라는 것까지만 나왔다.
4. 토요일
유하람은 토요일마다 갔다. 작년까지는 토요일만 갔는데 요즘은 그 사이에도 한 번씩 더 갔다.
어머니 송미강은 일흔셋이었다. 작년 가을에 진단을 받았고, 지금은 초기라고 했다.
“밥은 드셨어요.”
“먹었지.”
하람이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담아 놓고 간 반찬통이 그대로 있었다. 뚜껑에 덮은 랩도 그대로였다.
“엄마, 어제 나 왔었잖아.”
미강이 하람을 봤다.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네가 어제 왔니.”
“응.”
“그랬나 보네.”
미강은 그 말을 하고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하지도 않았고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럴 일도 없었다.
하람이 반찬통을 꺼내 상을 차렸다.
“엄마, 나 어릴 때 살던 데 있잖아. 그 시장.”
“제일시장.”
“거기 우리 집 앞에 뭐 있었지.”
“쌀집. 아니, 쌀집은 건너편이고 우리 앞은 참기름집이었어. 아저씨가 다리를 절었어. 왼쪽. 겨울에는 문 앞에 연탄을 2장씩 놨는데 그게 자꾸 없어져서 아줌마랑 싸웠지.”
미강이 웃었다.
“팔사년인가 팔오년인가 그럴 거야.”
하람은 젓가락을 놓고 잠깐 가만히 있었다.
병원에서 들은 말이 그때 생각났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새로 들어온 일은 뇌 안쪽에 있는 자리에서 한동안 붙들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깥쪽으로 옮겨 간다. 여러 번 꺼내 본 기억일수록 더 확실하게 옮겨 간다. 옮겨 간 기억은 안쪽 자리가 상해도 남는다. 반대로 아직 옮겨 가지 못한 기억은 안쪽 자리가 상하면 같이 없어진다.
그래서 이 병은 위에서부터 지워진다고 했다.
어제 일이 먼저 없어지고, 40년 전 참기름집 아저씨가 왼쪽 다리를 절었다는 것은 남는다.
“엄마.”
“응.”
“연탄이 몇 장씩 없어졌다고.”
“2장. 꼭 2장씩.”
하람이 수첩을 꺼내 적었다. 작년부터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오늘 또렷하게 말한 것만 적었다.
수첩은 절반쯤 차 있었고, 적힌 것 중에 최근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하람이 물었다.
“엄마, 내일 나 또 올까.”
“오든지.”
“오라고 해.”
“와라.”
미강이 그렇게 말하고 조금 있다가 덧붙였다.
“근데 너 요즘도 그 회사 다니니.”
하람은 그 회사를 11년 전에 그만뒀다.
“응, 다녀.”
그렇게 대답하는 법을 배우는 데 반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고쳐 줬다. 고쳐 주면 어머니가 한참 조용해졌고, 조용해진 다음에는 그날 있었던 다른 것들까지 말을 안 했다.
지금은 고치지 않는다. 대신 수첩에 적는다.
11년 전 회사 이름은 어머니 안에 남아 있고, 그만뒀다는 말은 여러 번 했는데도 안 남았다. 하람은 그 차이가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다가도 매번 다시 모르게 됐다.
5. 205년
남극은 저녁 8시였는데 밖이 낮처럼 환했다.
재혁이 시추동 벽에 붙은 그림을 보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 누가 매직으로 그려 놓은 단면도였다. 눈밭이 있고, 그 아래 회색 띠가 있고, 그 아래로 파란 기둥이 길게 내려가 있었다.
“소장님.”
“응.”
“이 회색 띠가 뭡니까.”
“피른.”
서진이 옆에 와서 섰다.
“눈이 아직 얼음이 안 된 구간이야. 눈보다는 단단하고 얼음보다는 성겨. 지금 우리 발밑에서 67미터까지가 그거야.”
“그럼 그 안은 비어 있습니까.”
“통해 있어. 알갱이 사이가 다 이어져 있어서 위에 있는 공기가 밑으로 들락날락해.”
재혁이 그림을 다시 봤다.
“67미터까지 오늘 공기가 들어가 있다는 겁니까.”
“오늘 거는 아니고, 몇 해 안 된 거.”
서진이 회색 띠 맨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
“여기 오면 알갱이가 다 눌어붙어서 길이 막혀. 그때 그 자리에 있던 공기가 갇히는 거지. 그걸 우리가 나중에 꺼내는 거고.”
“그러면……”
재혁이 말을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는 얼음은 67미터짜리 얼음이잖습니까. 그 얼음은 언제 내린 눈입니까.”
“여기는 205년쯤 전.”
“그런데 갇힌 공기는요.”
“갇힌 그날 거지. 그러니까 오늘에 가까워.”
재혁이 그림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얼음이랑 공기 나이가 다른 겁니까.”
“응. 여기는 205년쯤 차이 나.”
“그럼 아까 뽑은 412미터짜리는요.”
“얼음은 1600년 전인데 그 안에 있는 공기는 1400년 전쯤이야.”
“같은 토막 안에 있는데요.”
“같은 토막 안에 있어. 얼음이 어는 데 걸린 시간만큼 공기가 젊어.”
서진이 벽에서 손을 뗐다.
“이걸 모르고 읽으면 다 어긋나. 그해 여름이 얼마나 더웠는지는 얼음이 알려 주고, 그해 공기에 뭐가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는 기포가 알려 주는데, 둘이 같은 해가 아니거든.”
“그럼 맞춰야겠네요.”
“맞추는 게 이 일의 절반이야.”
재혁이 기록판을 들었다.
“그러면 우리가 꺼내는 건 얼음입니까, 공기입니까.”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얼음은 그릇이야.”
“저희가 보려는 건 안에 든 거고요.”
“응. 그런데 그릇을 깨면 안에 든 것도 없어져.”
밖에서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창에 눈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하루에 12미터야.”
6. 12칸
경옥은 퇴근 전에 저온시료동에 한 번 더 들어갔다.
28번째 줄 끝이 비어 있었다. 원래 거기에는 재작년 시료가 있었는데 봄에 다 처리해서 내보냈다.
경옥이 빈 선반의 칸을 세었다.
12칸이었다.
“뭐 찾으세요.”
연구원이 따라 들어와 있었다. 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있었다.
“자리 세는 거예요.”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세죠.”
경옥이 수첩에 열둘이라고 적었다.
“지금 400을 막 지났고 올해 800까지 간다고 했어요. 3미터씩 끊어서 오면 130통쯤 돼요. 그럼 여기 12칸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지금 세는 거예요. 배가 3월에 들어와요. 3월에 세면 늦어요.”
경옥이 28번째 줄 앞에서 잠깐 서 있었다.
“저는 여기 처음 왔을 때 이 방을 창고라고 생각했어요. 다 쓴 걸 넣어 두는 데.”
“아닙니까.”
“거꾸로예요. 여기 있는 건 아직 아무도 안 읽은 거예요. 읽는 사람은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갔을 수 있어요.”
연구원이 선반을 봤다. 은색 통이 28줄이었다.
“그래서 안 자르는 거예요. 자르면 그 토막은 그걸로 끝나요. 한 번 자른 자리는 다시 안 붙어요.”
경옥이 문 쪽으로 갔다.
“53일 남았어요.”
“뭐가요.”
“312일짜리요. 그때 처음 자를 거예요.”
문을 열자 밖의 여름 공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문틀 안쪽에서 그 공기가 하얗게 얼어붙었다가 곧 사라졌다.
경옥이 문을 닫았다.
내려간다는 것은 아래로 가는 일이 아니다. 뒤로 가는 일이다. 얼음은 위에서부터 쌓이므로 밑에 있는 것이 먼저 온 것이고, 밑으로 갈수록 얇아진 한 해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눌린 것이다. 눌린 것은 다시 펴서 읽을 수 있고, 없어진 것은 그럴 수 없다. 그 둘을 구별하는 일에 사람이 필요하다.
그릇과 그 안에 든 것은 나이가 다르다.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고 같은 때의 것은 아니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세어 두지 않으면, 애써 꺼낸 것을 엉뚱한 해에 걸어 놓게 된다.
오래된 것은 꺼내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 몇백 년 동안 아무 일 없던 것이 꺼낸 지 며칠 만에 갈라지고, 35년 동안 감겨 있던 것이 한 번 틀었다고 없어진다. 그래서 어떤 것은 1년을 재워야 하고 어떤 것은 3주 안에 옮겨야 한다. 무엇을 서둘러야 하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물건마다 다르고, 그것을 아는 데 걸린 시간이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나이다.
지워지는 것에도 순서가 있다. 대개 맨 위부터 지워진다. 어제가 먼저 없어지고 40년 전이 남는다. 남은 것이 더 소중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꺼내 봐서 자리를 옮겨 놓았기 때문에 남은 것이다.
412미터에서 오늘 꺼낸 기둥 안에는 1400년 전의 공기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열어 보지 않은 공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