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화 - 깨짐

제2화 「깨짐」
1. 424미터
새벽 인양은 3시 40분에 끝났다.
우재혁은 그때부터 서 있었다. 처리대 위에 얼음 기둥이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토막이 두 동강 나 있었다.
한서진이 6시에 들어왔을 때 재혁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소장님.”
“응.”
“깨뜨렸습니다.”
서진이 방한모를 벗지 않은 채로 처리대 앞에 섰다. 조명이 이미 켜져 있었다.
“몇 시에.”
“올라온 다음에요. 받침대에 눕히는데 손에서 미끄러졌습니다.”
“미끄러졌으면 어디로 떨어졌어.”
“안 떨어졌습니다. 받침대 위에서 그냥……”
재혁이 손으로 허공에 짧은 선을 그었다.
“이만큼 눕는데 소리가 났습니다.”
서진이 장갑을 고쳐 끼고 두 토막을 나란히 붙여 봤다. 붙인 자리에 틈이 거의 없었다.
“불 좀 내려 봐.”
재혁이 조명 각도를 낮췄다. 빛이 깨진 면을 옆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깨진 면은 반듯했다. 얼음이 부서질 때 흔히 생기는 부스러기나 하얗게 짓뭉개진 자국이 없었다. 유리를 칼로 그어 자른 것처럼 한 면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거 네가 깬 거 아니야.”
“제 손에서 났는데요.”
“소리는 네 손에서 났고, 자리는 네가 정한 게 아니야.”
서진이 깨진 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아주 얇은 줄이 지나가고 있었다. 회색이었고, 머리카락보다 얇았다. 얼음 안쪽에서 면 반대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먼지.”
“먼지가 이렇게 줄로 갑니까.”
“한 해에 한꺼번에 왔으면 줄로 가지.”
서진이 몸을 폈다.
“얼음은 어디서나 똑같이 단단하지 않아. 이렇게 뭐가 섞여 들어간 층이 있으면 거기가 제일 약해. 그러니까 힘이 들어가면 딴 데는 안 갈라지고 그 면부터 갈라져.”
“그럼 제가 안 미끄러졌으면요.”
“조금 있다가 딴 데서 갈라졌을 거야. 자를 때든, 나를 때든.”
재혁이 두 토막을 조심스럽게 다시 눕혔다.
“버립니까.”
“왜 버려.”
“깨졌는데요.”
“깨진 거지 없어진 게 아니야.”
서진이 기록판을 들었다.
“위아래만 안 바꾸면 돼. 이게 위였고 이게 아래였다는 것만 지금 적어 놔. 여기서 안 적으면 인천 가서는 아무도 몰라.”
“올라온 순서대로 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올라올 때는 순서가 맞아. 눕히고, 재고, 닦고, 통에 넣는 동안에 한 번만 돌아가면 그걸로 끝이야.”
서진이 처리대 위의 두 토막을 손등으로 가볍게 밀어 나란히 놓았다.
“얼음만 보고 위아래를 알아낼 방법이 없어. 층은 위나 아래나 똑같이 생겼거든. 사람이 적어 놓는 것 말고는 없어.”
재혁이 두 토막에 각각 번호를 매기고 화살표를 그렸다.
깊이는 424미터였다. 어제보다 12미터 아래였다.
캠프 철수까지 61일이었다.
2. 313일
인천은 아침부터 33도였다.
문경옥은 방한복을 입고 저온시료동으로 들어갔다. 안은 영하 30도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번 났다. 한 번은 문이 닫히는 소리였고, 한 번은 문틀에 낀 공기가 얼면서 나는 소리였다.
새로 온 연구원이 뒤따라 들어왔다.
“오늘이 313일째죠.”
“기억했네요.”
“52일 남았고요.”
경옥이 셋째 줄 앞에서 라벨을 훑었다. 통마다 깊이가 적혀 있었다. 800에서 1300 사이가 그 줄에 다 있었다.
“자르기 전까지 저 안에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열어 보면 알죠.”
“열면 안 된다면서요.”
“그러니까 안 열어요.”
경옥이 통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안 열고 재는 방법이 있어요. 통 옆에 대고 지나가면서 전기를 살짝 걸어요. 대는 게 아니라 옆에서요. 얼음이 전기를 얼마나 붙드는지가 층마다 달라요.”
“그걸로 뭘 압니까.”
“층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요. 그리고 어느 층이 유난히 신맛인지도요.”
연구원이 잠깐 멈췄다.
“신맛이요.”
“산성이요. 화산이 크게 터지면 재만 오는 게 아니라 황이 같이 와요. 그게 눈에 섞여서 그해 층에 앉아요. 그 층은 전기가 잘 통해요.”
“그럼 그 층이 화산이 터진 해네요.”
“그렇죠. 그리고 그 층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에요.”
경옥이 벽 쪽 도면을 가리켰다. 남극과 그린란드의 시추 지점이 점으로 찍혀 있었다.
“같은 화산이 터졌으면 여기도 그 층이 있고 저기도 그 층이 있어요. 두 코어에서 그 층을 찾아서 서로 맞대면 두 얼음의 시계가 같아져요.”
“눈금 같은 겁니까.”
“눈금이에요. 연층만 세면 밑으로 갈수록 조금씩 어긋나는데, 그 눈금이 나오면 거기서 다시 맞춰요.”
경옥이 라벨에 얇게 앉은 성에를 손등으로 밀었다.
“그러니까 저는 안 자르고, 안 흔들고, 그동안 겉에서만 봐요. 안 건드리고 알 수 있는 건 다 그렇게 알아 놓고, 진짜 잘라야 하는 건 그때 한 번만 잘라요.”
“365일 지나고요.”
“52일 남았어요.”
3. 20일
오정한은 오전 10시에 오븐 문을 열었다.
어제 넣은 릴이었다. 8시간 굽고 밤새 식혔다. 손등으로 몸통을 만져 보니 실내 온도와 같았다.
정한이 릴을 데크에 걸고 테이프 끝을 손톱으로 살짝 눌렀다. 어제처럼 붙지 않았다.
“됐네.”
혼잣말이었다. 작업실에는 정한뿐이었다.
정한이 녹음 장비를 켜고 재생을 걸었다. 릴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 20초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다음에 사람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 목소리였고, 무슨 안내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나오기 조금 전에, 아주 작게 같은 목소리가 먼저 났다.
정한이 손을 멈추고 다시 들었다.
같았다. 본소리가 나기 한 박자 앞에서, 아주 멀리서 나는 것처럼 같은 문장이 먼저 지나갔다.
정한은 그것을 30년 전에 처음 들었을 때 기계가 고장 난 줄 알았다.
테이프는 릴에 감겨 있다. 감겨 있으면 이쪽 면과 저쪽 면이 맞닿아 있다. 한쪽에 세게 새겨진 소리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맞닿은 옆 면에 조금씩 배어든다. 그래서 감긴 순서대로, 큰 소리가 나기 직전이나 직후에 그 소리의 그림자가 먼저 나거나 나중에 남는다.
배어든 소리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려고 하면 본소리까지 같이 간다.
정한은 그걸 지우지 않는다. 대신 그대로 받아 놓는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다 틀고 나서 되감지 않고 끝까지 풀린 그대로 넣어 두면, 감긴 방향이 뒤집혀서 배어든 소리가 본소리 앞이 아니라 뒤로 간다. 앞에서 나면 귀에 걸리고 뒤에서 나면 본소리에 묻힌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정한은 남의 테이프를 돌려줄 때 늘 그렇게 풀린 채로 넣어서 보냈다. 처음 몇 해는 사람들이 안 감아 줬다고 성을 냈다. 요즘은 종이에 적어서 같이 넣는다.
“이건 이 테이프가 몇십 년 동안 어떻게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거니까.”
정한이 그 말을 소리 내어 했다. 앞에 사람이 없어도 30년쯤 하면 그렇게 된다.
한 번 도는 데 32분이 걸렸다. 정한은 그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테이프가 끊어지면 끊어지는 그 순간에 손이 가 있어야 했다.
다 돌고 나서 정한이 달력을 봤다.
구운 날부터 3주면 20일 남았다. 그 안에 주인이 오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였다.
정한이 릴을 케이스에 넣다가 옆면을 다시 봤다.
연필로 팔삼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지워진 자리가 있었다. 어제 종이를 대고 문질러서 세 글자라는 것까지는 나왔다.
정한이 스탠드 조명을 아주 낮게 눕혀 옆에서 비췄다. 빛이 스치자 눌린 자국의 골이 그림자로 조금 더 살아났다.
첫 글자에 세로획이 하나 있었다. 그 아래에 동그란 것이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안 지워졌네.”
정한이 케이스를 닫았다.
“안 읽히는 거지.”
4. 낮잠
유하람은 일요일 낮에 갔다. 어제도 갔는데 또 갔다.
어제 헤어지면서 내일 또 올까 하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와라, 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었으니 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한 것을 오늘 모를 것이고, 그래도 그 말은 어제 있었던 말이었다.
문을 열자 어머니가 부엌에 서 있었다. 바닥에 컵이 깨져 있었다.
“엄마.”
“괜찮아. 안 다쳤어.”
송미강이 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로 멀쩡했다.
하람이 빗자루를 가져다 조각을 쓸었다. 큰 조각이 네 개, 잔 것이 한 움큼이었다.
버리기 전에 하람은 잠깐 그것들을 신문지 위에 늘어놨다. 큰 조각 네 개는 어디가 어디였는지 금방 맞춰졌다. 손잡이가 붙어 있던 자리도 보였다.
그런데 한 조각이 없었다.
컵 아래쪽,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하람이 싱크대 밑과 냉장고 옆까지 봤는데 나오지 않았다.
없는 조각이 하나여도 컵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디가 비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가 어떤 모양이었는지까지 나머지 조각들이 알려 줬다.
하람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없는 것을 없다고 아는 데에도 남아 있는 것이 필요했다.
“엄마, 이거 언제 깼어.”
“뭘.”
“컵.”
미강이 바닥을 봤다. 이미 다 쓸어 놓은 뒤였다.
“컵을 깼니.”
하람이 신문지를 접었다.
점심을 차려 놓고 하람이 부르는데 미강이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다. 하람은 깨우지 않고 그냥 앉아서 기다렸다.
담당 의사가 했던 말 중에 잠에 대한 것이 있었다.
낮에 들어온 일은 아직 안쪽 자리에 임시로 얹혀 있는 상태다. 잠을 자는 동안 뇌가 그날 있었던 것들을 몇 번씩 다시 틀어 본다. 그렇게 여러 번 틀어 본 것이 바깥쪽으로 옮겨 간다. 잠이 얕아지면 그 옮기는 일이 잘 안 된다.
미강은 요즘 밤에 두세 시간마다 깼다.
40분쯤 지나서 미강이 눈을 떴다.
“왔니.”
“응. 아까 왔어.”
“밥 먹었어?”
“엄마 먹으라고 차려 놨어.”
미강이 상 앞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다가 하람을 봤다.
“내가 아까 뭘 깼는데.”
하람이 젓가락을 놓았다.
“응. 컵.”
“컵이었어?”
“응.”
“뭐가 깨지는 소리는 났는데 뭔지를 모르겠더라.”
미강이 국을 떠먹었다.
“소리는 기억이 나.”
하람이 수첩을 꺼냈다.
작년부터 적어 온 수첩이었다. 앞쪽은 제일시장이었고, 참기름집이었고, 연탄 2장이었고, 1984년이었다.
하람은 뒤로 넘겨 빈 자리에 적었다.
일요일.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것.
최근 일이 적힌 것은 처음이었다.
하람은 그 줄을 한참 봤다. 무엇이 깨졌는지는 안 남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것만 남았다.
그것도 남은 것이었다.
5. 1650년
남극은 저녁 8시였고 밖은 여전히 환했다.
서진이 아침에 깨진 토막을 다시 처리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재혁이 들어왔을 때 서진은 깨진 면 위에 자를 대고 있었다.
“아직 보십니까.”
“응.”
“버릴 거 아니면 통에 넣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 전에 이거 하나만.”
서진이 회색 줄을 자로 짚었다.
“이 줄이 몇 미터 몇 센티에 있는지를 적어야 돼. 토막 안에서 어디쯤인지까지.”
“그렇게 정확하게요.”
“이 줄이 시계 눈금이거든.”
서진이 자를 내려놓았다.
“연층은 위에서부터 한 줄씩 세면 나와. 그런데 밑으로 갈수록 줄이 얇아지니까 세다 보면 조금씩 틀려. 100줄에 하나씩만 놓쳐도 3000미터 가면 큰 차이가 나.”
“그럼 어떻게 맞춥니까.”
“이런 걸로 맞춰.”
서진이 회색 줄을 다시 짚었다.
“이건 어느 해에 화산이 크게 터져서 재가 여기까지 날아온 자리야. 같은 화산의 재가 그린란드에도 앉아 있고 다른 남극 코어에도 앉아 있어. 그중에 몇 년도인지 이미 밝혀진 게 있으면, 우리 코어에서도 이 줄을 찾는 순간 그 깊이가 곧 그해가 되는 거야.”
“이건 몇 년도입니까.”
“몰라.”
서진이 기록판에 424.6이라고 적었다.
“여기 층 세면 대략 1650년 전쯤인데, 그건 우리가 센 거고. 이 재가 어느 산에서 온 건지는 알갱이를 긁어서 성분을 재 봐야 알아. 그건 인천 가서 하는 일이고.”
“그럼 지금은 뭘 압니까.”
“여기 줄이 하나 있다는 걸 알지.”
서진이 두 토막을 다시 나란히 눕혔다.
“이게 큰일이야. 나중에 누가 이 코어를 읽을 때 이 줄이 어디 있는지가 첫 문장이 돼.”
재혁이 깨진 면을 봤다. 아침에는 자기가 낸 사고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깨진 게 나은 겁니까.”
서진이 잠깐 웃었다.
“그건 아니고.”
“왜요.”
“깨진 면은 한 번만 볼 수 있어. 붙여 놓으면 안 보이고, 갈아서 보려면 그 자리를 깎아 내야 돼. 오늘 안 적으면 오늘 본 건 오늘로 끝이야.”
서진이 장갑을 벗었다.
“알아도 안 깨지는 게 나아. 깨지면 알게 되는 게 아니라, 깨진 김에 겨우 보는 거야.”
밖에서 바람이 다시 시작됐다. 창유리가 낮게 울렸다.
6. 29번째 줄
경옥은 퇴근 전에 다시 저온시료동에 들어갔다.
어제 세어 놓은 12칸 앞에 서서 이번에는 반대쪽 벽을 봤다. 선반 28줄 끝과 벽 사이에 통로가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폭이었다.
경옥이 줄자를 꺼내 벽까지의 거리를 쟀다.
“뭐 하십니까.”
연구원이 또 따라 들어와 있었다.
“29번째 줄을 어디다 놓을지 보는 거예요.”
“거기는 길인데요.”
“길을 좁히면 줄이 하나 생겨요. 대신 사람이 옆으로 서서 다녀야 해요.”
“그것도 됩니까.”
“안 되면 다른 걸 빼야죠. 뺄 게 없으면 사람이 옆으로 서는 거고요.”
경옥이 줄자를 감았다.
“올해 남극에서 130통쯤 와요. 그중에 깨져서 오는 것도 있어요.”
“깨진 것도 받습니까.”
“받죠.”
“깨진 건 어차피 못 쓰는 거 아닙니까.”
경옥이 고개를 저었다.
“못 쓰는 건 순서를 모르는 거예요.”
경옥이 선반에서 통 하나를 조금 당겨 라벨을 보여 줬다. 깊이 밑에 조각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건 작년에 깨져서 온 거예요. 세 토막이었는데 위에서부터 1, 2, 3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러면 씁니다.”
“붙입니까.”
“안 붙여요. 붙일 수도 없고요.”
경옥이 통을 도로 밀어 넣었다.
“우리가 하는 건 붙이는 게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거예요. 어느 게 위였는지만 알면 그 안에 있는 층은 그대로거든요.”
연구원이 통을 봤다.
“순서를 모르면요.”
“그러면 그건 그냥 얼음이에요.”
경옥이 벽에 붙은 기록지에 오늘 온도를 적었다. 영하 30.1도였다. 어제와 같았다.
“내일도 안 자릅니다.”
연구원이 그렇게 말했다. 물어본 게 아니었다.
“네. 51일 남았어요.”
문을 열자 밖의 여름 공기가 들어왔다. 문틀 안쪽에서 그 공기가 하얗게 얼어붙었다가 사라졌다.
경옥이 문을 닫았다.
깨진 것과 부서진 것은 다르다. 부서진 것은 조각의 수를 셀 수 없고, 깨진 것은 셀 수 있다. 셀 수 있으면 번호를 붙일 수 있고, 번호를 붙이면 순서가 남는다. 순서가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아직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제일 약한 자리부터 갈라진다. 그래서 갈라진 자리는 사고가 아니라 표시에 가깝다. 어디가 약했는지, 그해에 무엇이 섞여 들어왔는지가 거기서 드러난다. 다만 그 자리는 한 번만 보인다. 붙여 놓으면 안 보이고, 다시 보려고 깎으면 그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본 날에 적어야 한다.
옆에 오래 붙어 있던 것은 서로 배어든다. 감긴 채로 30년을 있으면 이쪽 소리가 저쪽 면에 옮겨 앉고, 그것은 지우려 하면 본래의 것까지 데리고 간다. 배어든 것을 흠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그동안 어떻게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부르는지가 그 물건을 다루는 방식을 정한다.
남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컵이 무엇이었는지는 안 남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것만 남는다. 그래도 남은 것이다. 남은 조각의 크기를 가지고 그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정하면 안 된다.
424미터에서 올라온 얼음에는 1650년쯤 전에 어딘가에서 크게 터진 산의 재가 한 줄 들어 있었다.
그 줄은 얼음이 깨져서 겨우 보였고, 오늘 안에 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