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6화 - 끼임

제6화 「끼임」

1. 1,400킬로그램

아침 여덟 시에 그날 첫 토막을 내려고 드릴을 내렸다. 깊이는 어제 그대로 460미터였다.

바닥에 닿는 감각이 왔고, 깎는 소리가 났고, 시간이 됐다. 우재혁이 인양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케이블이 감기기 시작했다. 장력계 바늘이 올라갔다.

평소에는 800킬로그램대에서 멎었다. 바늘은 1,100을 지나고 1,300을 지났다.

“어…”

한서진이 재혁의 손목을 잡았다. 스위치가 내려갔다. 윈치가 섰다.

바늘은 1,400에서 떨렸다.

“안 올라오는데요.”

“응.”

서진이 장력계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감긴 케이블을 조금 풀었다. 바늘이 400까지 내려갔다.

“왜 푸십니까.”

“당기면 올라오니까.”

재혁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서진을 봤다.

“한 번은 올라와.”

서진이 손을 놓았다.

“두 번째는 안 올라와. 끊어져.”

시추동 안은 늘 그렇듯이 영하 25도였다. 재혁은 자기 숨이 헬멧등 불빛 속에서 흩어지는 것을 봤다.

“부스러기야.”

서진이 말했다.

“드릴이 얼음을 깎으면 부스러기가 나오지. 그게 다 드릴 안 통에 담겨서 같이 올라오게 돼 있어. 그런데 통이 다 차면, 넘친 게 드릴 옆으로 새.”

“새면요.”

“드릴하고 구멍 벽 사이에 쌓여. 위에서부터. 그러면 드릴 머리 위가 덮이는 거야.”

“왜 새는데요. 통이 그렇게 금방 찹니까.”

“차기도 하는데, 그것보다 액이 무거워졌어.”

서진이 순환관을 손등으로 짚었다.

“부스러기는 액이 띄워서 통 쪽으로 데려오는 거야. 그런데 깊이 내려갈수록 액이 더 차가워져. 차가워지면 되직해지고, 되직하면 천천히 흘러. 위에서 우리가 보는 유량은 똑같은데 밑에서는 데려오는 힘이 줄어 있어.”

”…그럼 계속 심해지는 거네요. 깊어질수록.”

“응.”

서진이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그래서 800미터에서 끊는 거야. 배가 정하는 것도 있지만,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야.”

“덮인 거면… 파면 되잖습니까. 위로.”

“위로 깎는 날은 안 달려 있어.”

서진이 케이블을 손등으로 짚었다. 강철 줄이 팽팽하지 않고 조금 늘어져 있었다.

“지금 저 밑에 있는 건 드릴만이 아니야. 460미터짜리 케이블도 같이 매달려 있어. 그 무게가 이미 실려 있는 데다가, 우리가 당기는 힘이 더 실려.”

“끊어지면요.”

“드릴은 저 밑에 두고 나오는 거고.”

서진이 잠깐 말을 멈췄다.

“구멍이 없어져.”

”…구멍이요?”

“이 구멍 못 써. 안에 쇳덩이가 박혀 있는데 그 밑을 어떻게 파.”

“옆에 다시 뚫으면 안 됩니까.”

“뚫지. 0미터부터.”

재혁이 계산을 해 봤다. 하루 12미터.

“위쪽 460미터는 우리가 이미 가진 얼음이야. 그걸 두 번 파는 데 한 달 반이 들어. 이번 시즌은 끝나는 거고.”

서진이 시추액 순환 밸브를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끼는 건 오늘이 아니야. 구멍이야.”

2. 317일째

저온시료동은 이호기가 선 채로 이틀째였다. 부품은 다음 주에 온다고 했다.

노은재가 사다리 위에 있었다. 이틀 전에 결정한 대로 선반 맨 위에 한 칸씩 얹는 작업이었고, 스물여덟 줄 중에 아홉 줄까지 올렸다. 문경옥은 밑에서 볼트를 올려 주고 있었다. 경옥은 사다리에 안 올라갔다.

“선생님.”

은재가 위에서 말했다.

“소리가 좀 이상한데요.”

“어디요.”

“천장 쪽이요. 팬이 도는데… 바람이 안 나오는 느낌이에요.”

경옥이 잠깐 가만히 있었다.

“내려와요.”

경옥이 은재의 자리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대신 손전등을 위로 비췄다. 천장 가까이 붙은 증발기 날개 사이가 하얗게 메워져 있었다. 성에였다. 손가락 두 마디쯤 두께로 날개와 날개 사이를 막고 있었다.

“일호기가 어제부터 몇 번 섰어요?”

은재가 기록지를 넘겼다.

”…한 번도 안 섰습니다.”

“그럴 거예요.”

경옥이 손전등을 껐다.

“두 대가 번갈아 돌면 서는 시간이 생겨요. 서 있는 동안에 붙은 성에가 저절로 조금 녹아 떨어져요. 지금은 일호기 혼자 계속 도니까 녹을 틈이 없어요.”

“성에가 끼면 뭐가 문제죠? 어차피 차가운 건데요.”

“그게 담요라서 그래요.”

경옥이 위를 한 번 더 올려다봤다.

“방의 열을 저 날개가 받아 가야 하는데, 성에가 날개를 덮고 있으면 못 받아 가요. 기계는 계속 도는데 방은 안 추워져요. 그럼 기계가 더 도는 거고, 더 돌면 성에가 더 껴요.”

은재가 볼트를 상자에 내려놓았다.

“녹이면 되잖아요.”

“녹이려면 데워야죠.”

”…데운다고요? 여기를요?”

“뜨거운 가스를 저 날개로 되돌려 보내요. 사십 분쯤. 그동안 방은 안 추워져요. 올라가요.”

“얼마나요.”

“해 봐야 알아요. 서너 도.”

“그럼 이호기가 있을 때는 어떻게 했어요? 이런 걸 안 했잖아요.”

“했어요. 은재 씨가 몰랐을 뿐이에요.”

경옥이 기록지를 넘겨 작년 겨울 자리를 짚었다.

“두 대가 있으면 한 대 제상 돌리는 동안 다른 한 대가 방을 잡아 줘요. 그럼 온도가 0.4도쯤밖에 안 올라가요. 그래서 여기 적혀 있는데도 아무도 기억을 안 해요.”

“그럼 두 번째 기계는 예비가 아니네요.”

“예비 아니에요. 둘이 나눠서 도는 거예요. 한 대로도 되긴 되는데, 되는 거하고 여유가 있는 거는 달라요.”

경옥이 기록지를 덮었다.

“지금은 여유가 없는 거예요.”

경옥이 온도계를 봤다. 영하 29.4도였다.

“막고 있는 게 성에인데, 성에를 녹이려면 방을 데워야 해요.”

경옥은 그 말을 하고 나서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오늘은 재우기 317일째였고, 첫 절단까지 48일 남아 있었다.

3. 눌린 자리

오정한의 작업실에 택배가 왔다. 의뢰인이 보낸 것이었다. 상자를 열었더니 릴이 두 개 더 들어 있었다. 아버지 방 장롱 위 칸에서 나왔다고 쪽지가 붙어 있었다.

정한은 마감을 세어 봤다. 열여섯 날 남았다.

새 릴 하나를 꺼내 감긴 면을 손톱으로 살짝 눌러 봤다. 자국이 남았다. 정한은 그걸 보고도 데크에 걸었다. 아직 안 구운 것이 어느 정도인지 귀로 확인하려고 했다.

3초쯤 돌다가 테이프가 헤드에 붙었다. 릴이 안 돌고 모터만 도는 소리가 났다.

정한은 손으로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다음에 한 일은, 릴을 되감지 않은 것이었다. 되감으려면 테이프를 당겨야 하고, 물러진 테이프는 당기는 대로 늘어난다. 늘어난 테이프는 다시 줄어들지 않는다. 길이가 변하면 그 자리에 적힌 소리의 높이가 변한다. 사람 목소리가 반음 낮게 늘어져 나오고, 그건 소리가 상한 것이 아니라 잣대가 상한 것이라서 나중에 어떤 기계로도 못 고친다.

정한은 헤드에 붙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받쳐서 떼어 냈다. 3센티미터쯤이었다. 떼어 낸 자리에 갈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당기면 늘어납니다.”

혼잣말이었다.

“늘어난 건 못 되돌려요.”

두 릴을 오븐 옆에 나란히 놓았다. 50도, 8시간. 오늘 밤에 하나, 내일 밤에 하나.

그러고 나서 정한은 첫 번째 릴의 케이스를 다시 꺼냈다. 지워진 글자 자리였다.

이번에는 적외선 카메라를 빌려 왔다. 필름이나 그림에서 못 보는 걸 본다고 하는 물건이었다. 렌즈를 대고 30분을 만졌는데 화면에는 아무것도 안 떴다.

“안 나오는 게 맞습니다.”

정한이 카메라를 돌려주려고 상자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흑연이 남아 있으면 이게 잡아요. 그런데 여긴 흑연이 안 남아 있어요. 지우개가 다 가져갔으니까. 남아 있는 건 눌린 자국뿐이라.”

그래서 현미경을 꺼냈다. 40배였다.

종이 표면의 섬유가 눌려서 누운 방향이 보였다. 골이 있고, 골 옆에 밀려 올라간 둔덕이 있었다. 정한은 그 둔덕을 따라갔다.

한 군데에서 두 골이 만났다.

두 골이 십자로 겹치는 자리에서, 한쪽 둔덕이 다른 쪽 골을 가로질러 눌려 뭉개져 있었다. 먼저 그어진 획이 만든 둔덕을, 나중에 그어진 획이 넘어가면서 밟은 것이었다. 밟힌 쪽이 먼저다.

정한은 그 자리를 20분 동안 봤다. 조명을 네 방향으로 바꿔 가며 봤고, 방향을 바꿔도 밟힌 쪽은 바뀌지 않았다. 어제처럼 조명이 만든 그림자에 속은 것이 아니었다.

종이에 적었다.

「교차점 1개소. 세로획 두 개 중 오른쪽이 나중. 글자 판독 불가.」

펜을 놓고 나서 정한은 좀 웃었다.

“순서는 알았는데 글자는 모릅니다.”

4. 목요일

유하람은 어머니 집 부엌 달력 앞에 서 있었다. 토요일 칸부터 오늘까지 여섯 칸이 이어져 있었다. 하람이 자기 손으로 그은 표시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온 날들이었다.

엿새 연속이었다. 하람은 그걸 오늘 처음 알았다.

방에서 미싱 소리가 났다. 드르륵, 드르륵, 하고 짧게 두 번.

“정숙아.”

하람이 문틀에 손을 댔다.

“정숙아, 이거 실이 걸렸다.”

정숙은 어머니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하람이 초등학교 다닐 때 시장에서 같이 일했고, 1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어.”

그렇게만 대답했다.

고쳐 주지 않기로 한 것에는 시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 자기가 서른몇 살인 자리에 서 있고, 그 자리에서 보면 마흔 넘은 여자는 딸일 수가 없고 동생일 수밖에 없었다. 이름표는 먼저 떨어져 나가는 쪽이었다. 얼굴은 남았다. 이 사람이 내 편이라는 것도 남았다. 떨어져 나간 건 그 얼굴에 붙어 있던 글자 세 개뿐이었다.

미강이 미싱 앞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바늘이 천 중간에 박힌 채였고 밑에서 실이 뭉쳐 있었다.

하람이 손을 뻗었다.

“당기지 마.”

미강이 하람의 손목을 쳤다. 아프지 않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당기면 바늘 부러져.”

미강이 노루발을 올렸다. 손잡이를 뒤로 돌려 바늘을 뺐다. 천을 조금 들어 올리고, 밑판을 열고, 북에 감긴 실뭉치를 손가락으로 조금씩 풀어냈다. 자르지 않았다. 실은 한 가닥으로 다 나왔다.

미강이 그 실을 하람에게 보여 줬다.

“봐. 안 끊겼지.”

”…응.”

“끊으면 이 밑이 다 다시야.”

미강은 그러고 나서 노루발을 내리고, 바늘을 원래 자리로 돌리고, 발판을 밟았다. 드르륵. 잘 나갔다.

하람은 부엌으로 나와서 수첩을 꺼냈다. 다섯 줄째를 적었다.

「목요일. 정숙이라고 불렀음. 실이 걸렸는데 당기지 않았음.」

그리고 잠깐 펜을 들고 있다가,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엿새째.」

그건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다.

5. 스물두 시간

남극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스물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서진은 케이블 장력을 300킬로그램에 맞춰 놓고 그 상태로 뒀다. 드릴을 아주 조금씩 돌렸다. 시추액을 계속 순환시켰다. 그게 전부였다.

재혁은 네 시간마다 장력계를 읽고 노트에 적었다. 같은 숫자를 여섯 번 적었다.

밤 열한 시쯤에 재혁이 물었다.

“얼마나 기다립니까.”

“몰라.”

“내일까지도요?”

“내일까지도.”

서진은 접이의자에 앉아 장력계를 보고 있었다. 백야라 창밖은 아직 밝았다.

“2019년에.”

서진이 갑자기 말했다.

“다른 캠프에 있었어. 1,100미터쯤에서 걸렸는데, 그때 나는 책임자가 아니라 지금 너쯤 되는 자리였어. 사흘째였고, 배 들어올 날이 정해져 있었고.”

”…당기셨습니까.”

“내가 당기자고 했어.”

서진이 장갑 낀 손을 무릎에 올렸다.

“올라왔어. 2미터쯤. 그리고 끊어졌어.”

”…”

“그 구멍은 그걸로 끝났어. 그 시즌에 판 게 다 그 구멍이었으니까 그해는 없는 해가 됐지.”

재혁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날 잃은 게 드릴이라고 생각했었어. 한참 뒤에 알았는데 아니야.”

“뭡니까.”

“1,100미터까지 판 걸 잃은 거야. 그건 판 사람들 걸 잃은 거고.”

재혁이 조금 있다가 물었다.

“그때… 안 당겼으면 풀렸을까요.”

“몰라.”

서진이 장력계를 봤다.

“그건 영영 몰라. 당겨 버렸으니까.”

”…”

“그래서 나는 기다린 날은 다 적어. 풀린 날도 적고 안 풀린 날도 적어. 그걸 스무 번쯤 적으면 다음 사람은 알게 되겠지. 나는 모르고.”

스물두 시간째인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장력계 바늘이 혼자 떨어졌다. 400에서 320으로.

서진이 일어섰다.

“풀렸다.”

인양은 40분 걸렸다. 드릴이 올라왔을 때 부스러기 통은 뚜껑까지 차 있었고, 통 바깥 몸통에도 얼음 가루가 두껍게 눌어붙어 있었다. 원인은 그거였다.

그날 낸 코어는 없었다. 깊이는 아침에도 460미터였고 다음 날 아침에도 460미터였다.

재혁이 노트를 폈다. 뭘 적어야 할지 몰라서 서진을 봤다.

“적어.”

”…뭘 적습니까. 한 게 없는데요.”

“스물두 시간 동안 장력 300 유지, 시추액 순환, 인양 시도 없음. 아침 여섯 시 해방. 부스러기 통 만재.”

서진이 말했다.

“그게 오늘 한 일이야.”

재혁이 적었다. 그리고 맨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진척 0미터.」

일보를 인천으로 보낼 때 재혁이 한 번 더 물었다.

“0이라고 보냅니까.”

“0이야.”

”…”

“0을 안 보내면, 나중에 이 구멍 자료를 보는 사람이 이 날짜에 왜 아무것도 없는지 몰라. 안 보낸 날하고 아무 일 없던 날을 못 가르거든.”

그날 인천에서 온 전문에는 저온시료동 냉동기 이호기 부품이 다음 주에 도착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서진이 그걸 읽고 접었다.

“저기도 한 대로 버티고 있네.”

6. 한 통

인천에서 캠프 일보를 받는 건 다음 날 아침 아홉 시였다.

노은재가 종이를 뽑아 왔다.

「진척 0미터. 사유: 드릴 끼임 22시간. 인양 재개. 손상 없음.」

문경옥이 그걸 받아서 읽었다. 두 번 읽었다.

“0을 보냈네요.”

”…이거 혼나는 거 아니에요?”

“혼날 게 왜 있어요.”

경옥이 종이를 게시판에 꽂았다.

“0을 안 보내는 사람이 무서운 거예요.”

그날 낮에 경옥은 두 가지를 정했다.

첫째, 제상을 돌린다. 새벽 세 시에. 사람이 없고 문을 열 일이 없는 시간이었다. 40분 예정, 예상 최고 온도 영하 26도, 줄마다 온도계 스물여덟 개를 다 읽어서 기록한다.

“일부러 나빠지게 하는 걸 정하는 것도 일이에요.”

경옥이 계획서를 쓰면서 말했다.

“안 하면 더 나빠지니까 하는 건데, 그래도 오늘 밤에 이 방이 3도 올라가는 건 우리가 시킨 거예요. 그건 그렇게 적어야 해요.”

둘째는 3월에 들어올 여섯 통 중 한 통 자리였다.

은재가 물었다.

“여섯 통은 자리가 없다고 회신할까요? 그럼 저쪽에서 다른 데로 보낼 텐데요.”

“받아요.”

“자리가 없는데요.”

“자리가 없어서 안 받으면, 없어지는 건 자리가 아니라 얼음이에요.”

경옥이 장부를 넘겼다. 1998년에 들어온 통 하나에 손가락을 짚었다.

“이건 세로로 자르죠.”

”…빼는 건 처음부터 안 받는다고 하셨잖아요.”

“빼는 게 아니에요. 반으로 만드는 거예요.”

경옥이 짚은 자리에 연필로 표시를 했다.

“반은 이번 겨울에 재고, 반은 그대로 둬요. 그러면 통 하나가 비어요.”

”…한 통이요.”

“한 통이요. 다섯 통은 아직 몰라요.”

은재가 계획서 밑에 온도 기록 서식을 스물여덟 장 만들었다. 만들고 나서, 첫 장 맨 밑에 자기 손으로 한 줄을 더 적었다.

「이 상승은 사고가 아님. 계획하여 올린 것임.」

경옥이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대신 서식 뭉치를 받아서 클립으로 묶었다.

그날 새벽 세 시에 방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끼인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붙잡힌 것이다.

붙잡힌 것을 당기면 대개 한 번은 온다. 두 번째에 끊어진다. 끊어지면 잃는 것은 잡고 있던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온 길 전체다. 1,100미터를 판 사람들, 밑실 한 가닥 밑에 이어져 있는 바느질 전부, 물러진 테이프 위에 적힌 목소리의 높이. 그래서 어떤 날의 일은 당기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되고, 어떤 날의 일은 일부러 방을 데우는 것이 되고, 어떤 날의 일은 이름을 고쳐 주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런 날에 한 일을 적을 자리가 없으면 안 된다.

그날 남극에서 적은 숫자는 0이었다.

0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게 하려고 스물두 시간을 썼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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