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4화 - 비움

제4화 「비움」

1. 근무표

한서진이 아침에 근무표를 고쳐 적었다.

밤 근무 칸에 원래 두 사람 이름이 나란히 있었는데, 서진이 자기 이름 위에 줄을 하나 그었다.

우재혁이 그걸 뒤에서 보고 있다가 물었다.

“오늘 밤에 안 나오십니까.”

“안 나와.”

“저 혼자 합니까.”

“응.”

재혁이 근무표에서 눈을 뗐다.

“왜 갑자기요.”

“갑자기 아니야. 한 달 전부터 오늘로 정해 놨어.”

서진이 연필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내가 옆에 있으면 너는 계속 내 손을 봐. 나쁜 건 아닌데, 그렇게 보면 반년에 배울 걸 두 시즌에 배워.”

“그럼 제 손을 보라는 말씀입니까.”

“네 손도 보지 마.”

서진이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저걸 봐.”

재혁이 시계를 봤다가 서진을 봤다.

서진이 종이 한 장을 처리대 위에 놓았다.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외우지 말고 그냥 붙여 놔. 첫째, 장갑 벗고 하는 일은 90초. 넘으면 무조건 끼고 3분 쉬었다가 다시.”

“90초는 어디서 나온 숫자입니까.”

“내가 정한 거야. 근거는 있어.”

서진이 자기 손을 폈다 쥐었다.

“손끝이 제일 먼저 식어. 여기서 30초쯤 지나면 온도가 뚝 떨어지고, 1분 반이 넘어가면 감각이 무뎌져. 감각이 무뎌지면 힘 조절이 안 돼. 볼트를 쥐고 있는지 아닌지도 몰라. 아프면 그나마 다행이야. 안 아프기 시작하면 그게 넘어간 거야.”

재혁이 종이의 둘째 줄을 봤다.

“둘째, 이상하면 멈춘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손보다 머리가 더 문제라는 말이야.”

서진이 파카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몸이 조금만 식어도 사람이 느려져. 판단도 느려지고. 그런데 느려진 사람은 자기가 느려진 걸 몰라. 자기는 평소대로 하고 있는 것 같거든. 남이 봐야 알아.”

“오늘은 그 남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시계를 보라는 거야.”

서진이 처리대 끝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네가 어제 그 작업 3분에 했어. 오늘 8분 걸렸으면 그건 볼트가 뻑뻑해진 게 아니라 네가 식은 거야. 그걸 알려면 어제 걸린 시간을 적어 놨어야 해.”

재혁이 셋째 줄을 읽었다.

“셋째, 못 한 건 못 했다고 적는다.”

“오늘 열두 미터 못 채워도 돼. 여섯 미터만 하고 자도 돼.”

서진이 문 쪽으로 갔다.

“대신 여섯 미터 했다고 적어. 열두 미터 했다고 적으면 나중에 인천에서 남의 얼음을 우리 얼음으로 알아. 그게 제일 나빠.”

캠프 철수까지 59일이었다.

2. 315일

문경옥은 아침에 목록을 뽑았다.

저온시료동에 지금 들어 있는 통이 몇 개고, 어느 해에 어디에서 온 것이고, 그중에 분석이 끝난 것이 무엇인지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열여섯 장이었다.

노은재가 종이를 넘기면서 마지막 장의 아래를 봤다.

“천이백 통이 넘는데요.”

“천이백사십 통이에요.”

“그런데 3월에 백서른 통이 더 온다고요.”

“와요.”

“자리가 열두 칸밖에 없잖아요.”

“없죠.”

경옥이 커피를 반쯤 마시고 잔을 놓았다.

“어제 통로 폭을 다시 쟀어요. 스물아홉 번째 줄을 만들려면 통로가 지금보다 스무 센티 좁아져요. 안 돼요. 문까지 가는 길이라서요.”

“그럼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뺄 걸 골라야죠.”

은재가 목록을 다시 앞으로 넘겼다.

“이건 어떻습니까. 2006년 거요. 분석 다 끝났고 논문도 나온 걸로 돼 있는데요.”

“그게 제일 못 빼요.”

은재가 손을 멈췄다.

“다 읽은 건데요.”

“그때 기계로 다 읽은 거예요.”

경옥이 목록에서 한 줄을 짚었다.

“작년에 그 2006년 통을 두 개 꺼냈어요. 스무 해 만에요.”

“왜요.”

“기계가 바뀌었으니까요.”

경옥이 손가락 두 개를 벌려 보였다.

“예전에는 얼음을 이만큼씩 잘라서 녹여요. 녹인 물을 재요. 그러면 이 한 토막에 값이 하나 나와요. 1미터에 하나.”

“지금은요.”

“지금은 안 잘라요. 얼음을 세워 놓고 밑에서부터 천천히 녹여요. 녹아서 나오는 물을 관으로 계속 빨아들이면서 재요. 멈추지 않고요.”

“그럼 값이 몇 개 나옵니까.”

“1미터에 백 개쯤이요.”

은재가 목록을 내려다봤다.

“그러면 예전 값 하나가 지금 값 백 개인 겁니까.”

“백 개를 평균 낸 거였던 거죠. 그때는 그게 한 덩어리였어요.”

경옥이 잔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작년에 그 통에서 여름과 겨울이 갈렸어요. 한 해 안에서요. 예전 값으로는 그냥 한 해였어요.”

“그때 사람들이 못 본 거네요.”

“게을러서 못 본 게 아니에요.”

경옥이 은재를 봤다.

“그때 기계로는 안 보였던 거예요. 지금 우리가 쓰는 것도 나중 사람이 보면 옛날 기계예요.”

은재가 목록을 두 손으로 모아 각을 맞췄다.

“그럼 아무것도 못 빼는 거네요.”

“네.”

“그럼 왜 뽑으셨어요, 이걸.”

“뺄 게 없다는 걸 종이로 확인하려고요.”

경옥이 방한복을 집었다.

“뺄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안 받아요.”

315일째였다. 절단까지 50일 남아 있었다.

3. 18일

오정한은 어제 옮긴 파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길이는 32분이었다. 앞의 21분은 남자가 뭔가를 읽는 소리였다. 어투가 딱딱했고, 중간중간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안내문이거나 원고였다.

21분 40초에 그 소리가 끊겼다. 그다음부터 끝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한은 그 아무것도 없는 10분 반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소리를 키웠다. 잡음이 먼저 커졌다. 테이프가 도는 소리, 기계에서 나는 소리가 부풀었다. 그 밑에 뭔가 있었다.

아주 작았다. 있다고 하기도 뭣하고 없다고 하기도 뭣한 크기였다.

정한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테이프를 다시 쓸 때는 지우는 머리를 먼저 지난다. 그 머리가 자기장을 흔들어서 앞에 적혀 있던 걸 흩어 놓는다. 그런데 완전히 안 지워진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작아진다. 원래 소리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가는데, 원래 소리가 컸으면 내려가고도 남는다.

시끄러운 데서는 안 들린다. 조용한 데서만 들린다. 그래서 앞의 21분에서는 아무도 눈치를 못 챘고, 뒤의 10분 반에서만 남았다.

1983년에 방송국에서는 테이프를 아껴 썼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지우고 다시 썼다. 정한은 그런 릴을 수십 개 봤다.

정한이 그 10분 반만 따로 떼어 냈다.

그리고 거꾸로 돌렸다.

다시 쓸 때 릴을 뒤집어 거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앞에 적혀 있던 것이 반대 방향으로 남는다. 똑바로 들으면 사람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뒤집으면 갑자기 사람 소리가 된다.

사람 소리가 됐다.

여자였다. 말을 하고 있었다. 정한이 볼륨을 조금 더 올렸다. 말이 잡히지 않았다. 단어 하나도 못 건졌다. 억양만 있었다. 묻는 억양이 두 번, 대답하는 억양이 한 번 있었다.

정한이 재생을 멈췄다.

정한은 그 소리를 키운 파일을 만들지 않았다.

키우면 잡음도 같이 커진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기계로 잘못 키워 놓으면 나중 사람이 원본 대신 그걸 듣는다. 사람은 알아듣기 쉬운 쪽을 듣는다.

정한은 종이를 꺼내 어제 쓴 것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21분 40초부터 32분 10초까지 무음 구간. 이전 녹음의 잔류 있음. 반대 방향. 여성 음성으로 들림. 말은 판독 불가. 보정하지 않음.

적고 나서 정한은 케이스 옆면을 봤다.

연필로 지운 자리가 거기 있었다. 세 글자였고, 어제 두 글자에서 획을 몇 개 얻었다.

옆면에도 지운 자국이 있고 안에도 지운 자국이 있었다.

정한은 그게 같은 사람 손인지 아닌지 생각해 봤다. 알 수 없었다.

“지운 게 아니에요.”

정한이 릴을 보면서 말했다.

“작게 만든 거지.”

전화는 오지 않았다. 18일이었다.

4. 화요일

유하람은 화요일 저녁에 어머니 집에 들렀다. 어제도 갔고 오늘도 갔다.

문을 열었을 때 거실 바닥에 물건이 깔려 있었다.

장롱 아래 서랍 두 개가 통째로 빠져 나와 있었고, 안에 있던 것이 전부 바닥에 나와 있었다. 단추가 든 깡통, 실패 열몇 개, 지퍼, 접힌 천 조각, 누런 영수증 뭉치. 수선집 하던 시절 물건이 반쯤 섞여 있었다.

송미강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

“어, 왔니.”

“뭐 해.”

“정리하려고.”

하람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앉았다.

“많이 꺼냈네.”

“꺼내는 건 했어.”

미강이 그렇게 말하고 손을 무릎에 놓았다.

바닥에 나온 것은 한 시간쯤 전에 나온 것 같았다. 그 뒤로 아무것도 옮겨지지 않은 채였다.

하람은 그 자리에 앉아서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의사가 했던 말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꺼내는 일은 하나씩 하면 된다. 넣는 일은 다르다. 넣으려면 먼저 기준을 정해야 하고, 정한 기준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고, 지금 손에 든 것이 어느 쪽인지를 매번 대 봐야 한다. 그 붙들고 있는 일이 먼저 힘들어진다. 그래서 다 꺼내 놓고 앞에 앉아 있게 된다.

하람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빈 상자를 찾다가, 냉장고 아래쪽에서 흰 것을 봤다.

허리를 굽혀 손을 넣었다. 손톱만 한 사기 조각이 나왔다. 가장자리가 살짝 안으로 말려 있었다. 컵 바닥 쪽 조각이었다.

하람이 그것을 손바닥에 올린 채 거실로 나왔다.

“엄마, 이거.”

미강이 조각을 봤다.

“이거 어디 거니.”

“엄마 컵.”

“내가 깼어?”

“응. 일요일에.”

미강이 조각을 받아서 손바닥에 놓고 한참 봤다.

”…소리는 기억나.”

하람이 서랍장 위에 놓아 둔 봉투를 가져왔다. 일요일에 주운 조각 네 개가 들어 있었다. 다섯 번째를 넣었다.

“다 모였네.”

“붙일 거니.”

“아니.”

“그럼 왜 찾았어.”

하람이 봉투를 접었다.

“없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려고.”

미강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고 끄덕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람이 부엌에서 상자를 세 개 가져와 바닥에 놓았다.

“엄마, 여기 단추.”

“응.”

“여기 실.”

“응.”

“그리고 여기는 아닌 거.”

미강이 세 상자를 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단추 깡통을 열었다. 단추를 한 줌 집어 첫 번째 상자에 넣었다. 실패를 집어 두 번째에 넣었다. 영수증 뭉치를 집어 잠깐 들고 있다가 세 번째에 넣었다.

한 번 시작하니까 손이 계속 갔다.

하람은 옆에 앉아서 보고만 있었다.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주면 미강이 지금 붙들고 있는 세 개가 넷이 될 것 같았다.

십오 분쯤 지나서 바닥이 거의 비었다.

“엄마, 잘하네.”

“이건 하던 거야.”

미강이 서랍을 밀어 넣었다. 레일에 안 맞아서 한쪽이 걸렸다. 하람이 그것만 잡아 줬다.

돌아오는 길에 하람이 수첩을 꺼냈다.

앞쪽에는 1984년이 있었다. 뒤쪽에 두 줄이 있었다. 하람이 세 번째 줄을 적었다.

화요일. 서랍. 상자가 셋이면 함. 조각 다섯 개 다 나옴.

적고 나서 하람은 세 줄을 봤다. 사흘째였다.

5. 448미터

밤 열 시에도 밖은 밝았다.

여기는 여름 동안 해가 지지 않는다. 다만 밤에는 해가 낮게 걸린다. 그래서 그림자가 길고, 낮보다 3도쯤 더 춥다. 시추동 안은 늘 같았다. 밖이 몇 도든 안은 영하 25도였다.

우재혁은 혼자였다.

첫 두 토막은 잘 올라왔다. 인양에 41분, 처리에 20분씩 걸렸다. 재혁은 걸린 시간을 노트에 적었다.

세 번째 토막에서 걸렸다.

배럴에서 코어를 빼내려면 아래쪽 걸쇠를 풀어야 한다. 걸쇠에 볼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만은 두꺼운 장갑으로 잡히지 않았다. 재혁이 장갑을 벗었다.

벗으면서 시계를 봤다. 열 시 오십사 분이었다.

볼트가 안 돌았다. 나사산에 얼음이 끼어 있었다. 낮에 처리하면서 튄 얼음 가루가 거기서 녹았다가 다시 언 것이었다.

재혁이 힘을 줬다. 조금 돌았다. 다시 힘을 줬다.

시계를 안 봤다.

볼트가 손에서 빠졌다. 바닥에 떨어져서 두 번 튀었다.

재혁이 몸을 굽혀 주우려고 했다.

손가락이 오므라들지 않았다. 볼트가 손끝에 닿는 것은 알겠는데 쥐어지지 않았다. 두 번 시도했다. 세 번째에 손등으로 밀어서 손바닥에 얹었다.

그때 재혁이 이상한 걸 느꼈다.

화가 나지 않았다.

볼트를 놓쳤고, 두 번을 못 주웠고, 오늘 처음 혼자 하는 날인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짜증도 안 났다. 그냥 천천히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혁이 시계를 봤다. 열 시 오십육 분 사십 초였다.

2분 40초였다.

재혁이 볼트를 처리대에 놓고 장갑을 꼈다. 그리고 벽에 붙여 놓은 종이를 봤다. 3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3분을 셌다.

2분쯤 지나서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담근 것처럼 아팠다. 안 아프기 시작하면 그게 넘어간 거라고 서진이 아침에 말했다. 재혁은 아픈 게 반가웠다.

3분이 지나고 재혁은 볼트부터 하지 않았다.

온풍기를 끌어와 걸쇠 쪽에 30초 댔다. 낀 얼음이 물이 됐다가 흘러내렸다. 그러고 나서 장갑을 벗었다.

볼트가 40초 만에 풀렸다.

세 번째 토막이 배럴에서 나왔다. 매끈했다. 그 뒤로 한 토막을 더 했다.

작업이 끝난 것은 새벽 두 시였다. 재혁은 그날 네 토막을 올렸다. 한 토막이 3미터니까 열두 미터였다.

깊이는 448미터였다.

재혁이 노트를 폈다. 토막마다 걸린 시간을 적었다. 세 번째 토막에 걸린 시간이 다른 것의 두 배가 넘었다.

그 아래에 한 줄 더 적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적었다.

장갑 벗고 2분 40초. 90초 초과. 볼트 떨어뜨림. 화가 안 났음.

마지막 다섯 글자는 안 적어도 됐다. 아무도 안 물어볼 것이었다. 재혁이 그것까지 적은 이유는, 오늘 자기가 넘어간 걸 알게 해 준 게 시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계는 나중에 봤다. 먼저 안 것은 화가 안 난다는 쪽이었다.

캠프 철수까지 59일이었다.

6. 절반

문경옥은 저녁에 절단 계획서를 다시 그렸다.

원래는 1,300미터 구간을 가로로 잘라 필요한 데로 나눠 보내는 계획이었다. 경옥은 그 위에 세로줄을 하나 그었다.

노은재가 옆에서 봤다.

“세로로 가르시려고요.”

“반만 써요.”

“반은요.”

“안 써요. 아무도요.”

은재가 계획서를 봤다.

“그럼 자리가 더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반쪽 통이 따로 생기잖아요.”

“안 늘어요. 그래도 해요.”

경옥이 연필로 반쪽을 칠했다.

“지금 기계로 하는 건 반쪽이면 다 돼요. 산소도 재고, 먼지도 재고, 화산재도 봐요. 반쪽으로 충분해요. 옛날에는 통째로 써야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럼 나머지 반은요.”

“손 안 대요. 그대로 둬요.”

경옥이 연필을 놓았다.

“통째로 남기면 자리가 두 배 들어요. 그러면 못 남겨요. 반만 남기면 지금 것도 하고 나중 것도 해요.”

은재가 잠깐 있다가 물었다.

“나중에 뭘 하는데요.”

“몰라요.”

“모르는데 남깁니까.”

“2006년 사람들도 몰랐어요.”

경옥이 계획서를 넘겼다.

“이건 자르는 게 아니에요. 남기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경옥이 줄자를 들었다.

두 사람이 저온시료동에 들어갔다. 경옥이 선반 맨 위 칸과 천장 사이를 쟀다. 은재가 반대쪽을 잡았다.

“한 칸 더 올라가요.”

“올려도 됩니까.”

“돼요. 대신 위 칸에는 아무거나 못 올려요.”

“왜요.”

“찬 공기가 가라앉아서요.”

경옥이 천장 쪽을 봤다.

“바닥 쪽하고 천장 쪽하고 1도 반쯤 차이가 나요. 위가 더 따뜻해요. 그러니까 위에는 덜 예민한 걸 올려요. 이미 반쪽 낸 거, 얼음 말고 다른 시료, 그런 거요.”

“몇 칸 나옵니까.”

경옥이 손가락으로 셌다.

“한 줄에 네 통씩. 스물여덟 줄이니까 백열두 통.”

“기존 빈 칸이 열두 개니까.”

“백스물네 통이요.”

은재가 계산을 마쳤다.

“백서른 통 오는데요.”

“여섯 통은 자리가 없죠.”

경옥이 줄자를 감았다.

“3월까지 생각해요.”

“못 찾으면요.”

“찾아요.”

경옥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은재 씨.”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이 방에서 이름으로 불린 것은 처음이었다.

“네.”

“위 칸은 은재 씨가 재요.”

“왜요.”

“나는 사다리가 무서워요.”

경옥이 문을 열었다. 안의 찬 공기가 문틈으로 낮게 흘러 나갔다.

절단까지 50일이었다.


자리를 만드는 일은 채우는 일보다 먼저다. 그런데 자리를 만드는 방법이 늘 버리는 것은 아니다. 반만 쓰기로 정하면 지금 할 것도 하고 나중에 할 것도 남는다. 그렇게 하려면 나중에 누가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읽은 것은 못 버린다. 읽었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 있던 기계로 읽은 것이고, 기계는 바뀐다. 지금 쓰는 것도 언젠가는 옛날 기계가 된다. 그래서 다 읽은 것이 오히려 제일 못 버리는 것이 된다.

지운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작아진 것이다. 시끄러운 데서는 안 들리고 조용한 데서만 들린다. 지운 사람은 지운 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옆면에 연필로 지운 자국이 남는 것과 같은 일이고, 남은 것을 지금 못 읽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못 읽는다는 뜻은 아니다.

꺼내는 것은 하나씩 하면 되고 넣는 것은 그렇지 않다. 넣으려면 기준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붙들 수 있는 개수가 줄어든 사람 앞에는 상자를 셋만 놓아 주면 된다. 넷을 놓으면 다시 앉아 있게 된다.

식은 사람은 자기가 식은 것을 모른다. 손이 아프면 아직 괜찮은 것이고, 안 아프면 넘어간 것이다. 화가 나야 할 자리에서 화가 안 나는 것도 같은 신호다.

그날 밤 재혁은 화가 안 났다고 적었다.

적어 놓았으니, 나중에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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