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9화 - 물음

제9화 「물음」

1. 세 가지

인천에서 온 전문은 짧았다. 접수 확인 두 줄, 그리고 질문 세 개.

우재혁이 종이를 들고 두 번 읽었다.

“이 사람 여기 와 본 적 없죠?”

“없지.”

“근데 어떻게 이걸 물어요?”

한서진은 장갑을 벗지 않은 채로 종이를 넘겨다봤다.

“안 와 봤으니까 묻지.”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부스러기 무게는 젖은 무게입니까, 마른 무게입니까.

재혁이 잠깐 가만히 있었다.

“저희 젖은 거 재고 있는데요.”

“그렇지.”

“계산치 15킬로그램은 얼음만 친 거고요.”

“그렇지.”

“그럼 젖은 걸 재서 마른 거하고 비교했다는 거네요. 사흘 동안.”

“그렇지.”

서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재혁은 그게 더 불편했다.

“그럼 지금까지 적은 게 다 틀린 거예요?”

“틀린 방향까지 정확하게 틀렸어. 그게 그나마 다행이야.”

그날 첫 토막을 올리고, 두 사람은 부스러기를 체에 받쳤다. 30분을 그대로 뒀다. 시추액이 아래 쟁반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번 쟀다.

젖은 무게 13.9. 액을 뺀 무게 12.8. 흘러나온 액이 1.1.

“8퍼센트쯤이네요.”

“매번 8퍼센트는 아닐 거야. 깊어지면 액이 되직해져서 더 많이 붙어.”

“그럼 이것도 매번 재야 돼요?”

“응. 그리고 오늘부터 노트에 칸이 두 개야. 젖은 것 하나, 액 뺀 것 하나.”

재혁이 지난 사흘 치를 다시 계산했다. 토막마다 1킬로그램 남짓씩 부족분이 늘어났다. 누계 −6.2가 −10.4가 됐다.

그가 지우개를 찾았다. 서진이 손을 막았다.

“지우지 마.”

“틀린 숫자잖아요.”

“틀린 숫자를 지우면 우리가 언제부터 잘못 재고 있었는지도 같이 지워져. 밑에 줄 긋고 위에 새로 써. 옆에 오늘 날짜하고 왜 고쳤는지.”

재혁이 줄을 그었다. 손이 조금 아까웠다.

그러다 노트 뒤쪽을 펼치고 멈췄다.

“그런데 저희 어제 이거 맞다고 했잖아요.”

“뭘.”

“액 보충량으로 맞대 봤더니 6.5리터 모자랐고, 저울로도 6.2킬로그램 모자랐고요. 두 개가 딱 맞아서 이 계산 믿어도 되겠다고 하셨어요.”

서진이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안 맞아. 이제.”

“저울만 10.4로 올라갔으니까요.”

“그것도 그건데.”

서진이 주걱 끝으로 쟁반의 젖은 가루를 가리켰다.

“보충량도 젖은 부피로 셌어. 얼음이 나간 만큼 넣은 게 아니라, 얼음하고 거기 묻어 나온 액까지 나간 걸로 치고 넣은 거야.”

“그럼 두 숫자가…….”

“같은 실수를 같이 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어제 딱 맞은 건 확인이 아니야. 두 번 똑같이 틀린 거야.”

재혁이 펜을 놓았다.

“맞아떨어져서 제일 마음 놨는데요.”

“그게 제일 위험해. 틀린 게 둘이면 가끔 아주 정확하게 맞아 보여.”

“그럼 뭘로 맞대 봐요.”

“딴 데서 나온 숫자로. 같은 데서 나온 두 개는 아무리 맞아도 소용없어.”

“딴 데가 어딘데요.”

“구멍이지.”

서진이 종이를 다시 봤다. 두 번째 질문 위에서 시선이 오래 멈췄다.

2. 0.06도

노은재는 더미 통의 기록계를 셋째 줄 앞에서 읽었다.

제상은 그저께 새벽이었다. 방 공기는 5.5도 올랐고, 통 속은 0.4도 올랐고, 그 최고점은 2시간 10분 늦게 왔다. 그 뒤로 30시간이 지났다.

지금 값은 제상 전보다 0.06도 높았다.

“다 식었어요?”

문경옥이 문가에서 물었다. 두꺼운 옷 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게, 못 하겠어요.”

“뭘 못 해요.”

“대답을요.”

은재가 기록계를 들어 보였다.

“이 기록계 눈금이 0.05도예요. 지금 0.06이 남았는데, 이게 진짜 남은 열인지 눈금이 흔들린 건지 구별이 안 돼요.”

“그럼 못 재는 거예요?”

“못 재는 게 아니라, 이 온도계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어요.”

경옥이 잠깐 서 있다가 안으로 한 발 들어왔다. 그러다 멈췄다. 들어가면 자기 몸만큼 방이 데워진다는 걸 이 방에서 23년 배웠다.

“질문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보다 작은 걸 물었어요.”

은재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

“‘다 식었냐’는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어요. 식는 건 온도 차이만큼 빨라지는데, 차이가 줄면 속도도 같이 줄어요. 그래서 마지막 0.1도가 앞의 0.3도보다 오래 걸려요. 끝까지 가면 영영 안 끝나요. 가까워지기만 해요.”

“그럼 우리는 언제 다 식었다고 말해요?”

“우리가 정해야 돼요.”

경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는 그게 동의인지 다음을 기다리는 건지 몰랐다.

“그럼 정해요.”

“제가요?”

“둘이요.”

두 사람은 복도로 나와 종이 한 장에 두 줄을 적었다. 「더미 통 값이 사건 이전 값 대비 0.05도 이내로 들어오면 식은 것으로 본다.」 「0.05도는 기록계 분해능이며, 그보다 작은 차이는 판정하지 않는다.」

경옥이 날짜를 적고 그 밑에 한 줄을 더 썼다.

“이건 왜 적어요?”

“지금 정하면 기준이고, 그때 정하면 변명이에요.”

3. 열사흘

의뢰인이 처음으로 작업실에 왔다. 기차로 세 시간 반이라고 했다. 40대쯤 되는 남자였고, 오정한이 상상했던 것보다 키가 컸다.

남자는 앉자마자 세 가지를 물었다.

“그 여자 목소리는 누굽니까.”

“모릅니다.”

“찾을 수 있습니까.”

“안 찾겠습니다.”

남자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정한은 서랍을 가리켰다.

“저 안에 그 구간 표가 있고, 책상 위에는 아버님 릴 작업 기록이 있습니다. 둘을 한 책상에 올려 두면 제가 언젠가 둘을 잇습니다. 이어 놓으면 그럴듯해집니다. 그럴듯한 건 나중에 안 지워집니다.”

“두 번째는요, 그 지워진 글자.”

“압니다. 짐작도 있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안 하겠습니다.”

정한이 종이 한 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뒤집어 놓은 종이였다.

“제가 짐작을 말하면 그쪽 머릿속에 제 짐작이 먼저 들어갑니다. 나중에 진짜가 나와도, 그쪽은 진짜를 보는 게 아니라 제 짐작하고 맞춰 보게 됩니다. 그게 제일 못 고칩니다.”

남자가 릴 데크 쪽을 봤다. 정한이 오늘 아침에 헤드를 닦고 소자기를 대 놓은 참이었다.

“저건 뭡니까.”

“헤드에 자기가 붙는 걸 떼는 겁니다. 쇠에 오래 소리를 흘리면 쇠 자체가 조금씩 자석이 됩니다. 그 상태로 테이프를 걸면, 트는 동안 테이프의 높은 소리가 조금씩 지워집니다.”

“들으면 지워진다고요?”

“조금씩요. 그래서 원본은 두 번 안 듭니다. 한 번 옮기고, 그다음부터는 옮긴 걸 듣습니다.”

남자가 릴을 오래 봤다.

“그럼 아버지도 이걸 들으실 때마다……”

“조금씩요.”

정한은 헤드 앞의 은색 자국도 가리켰다. 테이프가 지나간 자리가 미세하게 파여 있었다.

“이건 닳은 겁니다. 여기 틈이 넓어지면 높은 소리부터 안 나옵니다. 제 기계도 늙습니다. 그래서 제가 급한 겁니다. 저는 남은 날을 세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을 셉니다.”

남자가 마지막 질문을 했다.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아버지가 이걸 왜 갖고 계셨을까요.”

“그건 제가 못 옮깁니다.”

남자가 말을 찾지 못했다.

“제가 옮기는 건 소리지 이유가 아닙니다.”

남자는 그 대답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말했다. 장롱 위 칸에 상자가 두 개 더 있고, 그 안에도 릴이 여남은 개 있는 것 같다고.

“그럼 지금 여기 보내지 마십시오.”

“왜요?”

“마감이 열사흘입니다. 제가 다 못 합니다. 다 하겠다고 하면 그중에 하나가 상합니다.”

정한은 수첩에서 종이를 한 장 찢어 이름과 번호를 적었다. 대구에서 필름과 테이프를 같이 하는 후배였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 정한은 그 자리에 잠깐 앉아 있었다.

자기 이름 말고 남의 이름을 적어 준 것은 서른다섯 해 만이었다.

4. 아흐레째

일요일 오전 열 시였다.

유하람은 아래층 문을 두드리기 전에 수첩 뒷장을 폈다. 물어볼 말을 미리 적어 왔다. 세 줄이었다.

최영숙은 하람을 알아봤다. 76세, 이 건물에서 19년째라고 했다.

“어머니 일이면 편하게 물어봐요.”

“제가 없을 때 어머니 어떠신지, 혹시 보신 게 있으면…….”

“요새 저녁에 문을 두드려.”

하람이 되물었다.

“저희 집이요?”

“아니, 우리 집. 여섯 시쯤. 나가 보면 문 앞에 서 계셔. 뭐 하시냐고 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들어가.”

하람은 그 말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귀로 듣고, 한 번은 자기 머릿속에서 다시 들었다.

여섯 시. 하람이 오전으로 옮긴 뒤로는 한 번도 그 집에 없던 시각이었다.

“몇 번쯤이요?”

“이번 주에 세 번은 됐지.”

“저는 몰랐어요.”

“안 왔으니까 모르지. 나는 여기 있으니까 아는 거고.”

최영숙이 물을 따라 줬다.

“근데 아주 멀쩡하셔. 나한테는 인사도 하고 말도 잘하고.”

“짧게 보시면 그러실 거예요.”

“짧게 보면?”

“인사하고, 날씨 얘기하고, 잘 지내냐 묻고, 그런 건 오십 년을 해 오신 거라 제일 늦게까지 남아요. 그게 남아 있으면 밖에서 보기엔 다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럼 안 남은 건 뭔데.”

“어제가요.”

최영숙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본 건 소용없는 거네.”

“아니요.”

하람이 수첩을 폈다. 앞장에는 여섯 줄이 있었다.

“제가 적은 건 다 제가 본 거예요. 그런데 저는 요새 오전에만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적힌 건 어머니가 아니라, 제가 본 어머니예요.”

최영숙이 수첩을 힐끗 봤다.

“그래서요.”

“보신 걸 저한테 그냥 말씀해 주세요. 어떤지 판단하지 마시고요. 몇 시에 뭘 하셨다, 그것만요.”

“좋았다 나빴다는 안 써?”

“그건 나중에 제가 틀릴 수 있어서요.”

하람은 수첩 앞장 아래에 줄을 하나 긋고 칸을 만들었다. 「남이 본 것」이라고 적었다.

돌아서는데 최영숙이 하람을 불렀다.

“저번 주에 나한테 그러시더라. 우리 하람이가 요새 매일 온다고.”

하람이 멈췄다.

“어머니가요?”

“응. 자랑처럼 하시던데.”

하람은 계단 두 칸을 올라가다 손잡이를 잡았다.

어머니는 하람이 어제 왔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다. 아흐레 동안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남았는데, 그 일이 좋았다는 것만 어디 다른 데 남아 있었다.

집에 올라가서 하람은 수첩에 일곱 줄째를 적었다.

「일요일 오전 열 시. 아래층. 저녁 여섯 시에 문을 두드린다고 함. 내가 본 것 아님.」

그리고 뒷장을 폈다. 세 줄째였다.

「물어봤다. 없는 줄 알았던 게 있었다.」

5. 13센티

밤 열 시였다. 백야라 아직 밝았고, 시추동 안은 늘 그렇듯 영하 25도였다.

서진이 두 번째 질문을 읽었다. 계산치 15킬로그램의 근거인 구멍 지름 13센티미터는 실측입니까, 설계값입니까.

“설계값이에요.”

재혁이 먼저 답했다.

“응. 드릴 바깥지름이 13이니까 구멍도 13일 거라고 친 거야.”

“실제로는 달라요?”

“달라. 시추액이 얼음보다 조금 따뜻하니까 벽이 아주 조금씩 녹아. 드릴이 흔들리면서 긁기도 하고. 그러면 지름이 커져.”

“그럼 부스러기가 계산보다 많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많아야지. 그런데 우리는 적게 받고 있어.”

재혁이 노트에 그걸 적었다. 계산치를 늘리면 부족분은 더 커진다.

“반대도 있어.”

서진이 손가락으로 위에서 아래로 선을 그었다.

“판 지 오래된 구멍은 얼음이 흘러서 도로 좁아져. 깊을수록 눌리는 힘이 세니까 더 빨리 좁아지고. 그러니까 어제 판 자리하고 오늘 지나가는 자리는 지름이 서로 달라.”

“그럼 하나가 아니네요. 깊이마다 다르고 날짜마다 다르고요.”

“그래서 원래는 재. 구멍에 넣고 내리면서 벽까지 거리를 계속 재는 장비가 있어. 그걸로 깊이별 지름을 통째로 뽑아.”

“저희 있어요?”

“없어.”

서진이 답신 종이에 두 번째 답을 썼다. 설계값입니다. 실측 장비 없음. 실측 계획 없음. 그래서 현재 계산치의 오차를 우리는 모릅니다.

재혁이 그 문장을 봤다.

“이렇게 써도 돼요?”

“모르는 걸 안다고 쓰면 인천에서 그 숫자를 믿어. 믿고 다른 계산에 넣어. 그러면 우리 모르는 게 저쪽 아는 걸로 바뀌어.”

재혁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나는 잴 수 있어요.”

“뭘.”

“코어 지름이요. 올라온 건 여기 있으니까 매번 재면 되잖아요. 고리에서 안쪽 반지름은 확실해지는 거고요.”

“바깥은 여전히 모르는데.”

“반쪽은 아는 거잖아요.”

서진이 종이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세 번째 문장을 재혁에게 쓰게 했다.

세 번째 질문은 이거였다. 열흘에 하루 바닥을 훑는다고 하셨는데, 열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재혁이 펜을 들고 한참 있었다.

“없어요.”

“응. 없어.”

“그냥 그쯤이면 되겠다고 하신 거잖아요.”

“내가 그랬지.”

“이것도 없다고 써요?”

“‘근거 없음. 임의로 정함. 침전 속도 미측정.’ 이렇게 써.”

재혁이 그대로 썼다. 서진이 마지막에 한 줄을 더 붙였다.

세 개 중에 하나는 고칠 수 있고, 하나는 모르고, 하나는 근거가 없습니다. 세 개 다 우리가 먼저 묻지 않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부끄럽지. 근데 이거 안 보내면 저쪽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줄 알아.”

서진이 봉투에 넣으면서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것만 봐. 저 사람은 여기를 못 봐서 우리 대신 물어 준 거야.”

그날 두 토막. 478미터.

6. 모름

인천 본원에서 저온실로 온 회신에도 질문이 있었다.

강릉 이송 3통은 승인. 그리고 한 줄, 부족 4통을 왜 8월에 알렸습니까.

은재가 그 줄을 읽고 얼굴이 굳었다.

“이거 혼내는 거예요?”

“아니에요.”

경옥이 종이를 받아 다시 봤다.

“3월에 알면 사고고 8월에 알면 숫자라고 우리가 그랬죠. 저쪽은 그럼 왜 7월엔 몰랐냐고 묻는 거예요. 맞는 질문이에요.”

“그럼 뭐라고 써요?”

“7월엔 안 셌다고 써요. 셀 서식이 없었다고. 그래서 이번에 인지일 칸을 만들었다고.”

은재가 그 답을 쓰다가 손을 멈췄다.

“그럼 앞으로도 안 센 게 있으면 어떡해요.”

“있죠.”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빈칸을 없애야 돼요.”

경옥이 서식을 한 장 꺼냈다. 값을 못 적은 자리가 서너 군데 비어 있었다.

“이렇게 비워 두면요, 이거 나중에 누가 채워요. 자기 좋을 대로. 아니면 처음부터 그 항목이 없었던 게 돼요.”

은재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서식 아래쪽에 칸을 하나 더 그렸다.

「모름」이라고 썼다. 그 옆에 작은 칸을 하나 더 붙이고 「왜 모르는지」라고 썼다.

경옥이 그걸 오래 봤다.

“값을 못 쓰면 여기다 모른다고 쓰고, 왜 모르는지를 쓰는 거예요. 장비가 없어서인지, 그날 안 재서인지, 재는 방법을 몰라서인지요.”

“셋이 다 다르죠.”

“다 달라요. 장비가 없으면 사면 되고, 안 재면 다음부터 재면 되고, 방법을 모르면 물어봐야 되고요.”

경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호기 얘기를 꺼냈다.

“내일 새벽 세 시 예정인데요.”

“네.”

“미룰까 해요. 화요일로.”

은재가 놀랐다. 지난주에 경옥은 부품을 기다리지 말고 제상을 하자고 했었다.

“그때는 안전한 거 말고 아는 걸 고른다고 하셨잖아요.”

“그때는 기다리는 게 남한테 맡기는 거였어요. 오늘은 미루는 게 우리가 정하는 거고요.”

“온도가 아직 안 내려와서요?”

“그것도 있고요. 그저께 제상하고 내일 압축기 교체를 붙여 놓으면, 나중에 값이 이상할 때 어느 쪽 때문인지 못 물어요.”

경옥이 종이에 한 줄을 적었다.

「이호기 복구 연기함. 사유: 앞 사건과의 간격 확보. 온도 이상 없음. 인지일 8월 18일.」

은재가 그 종이를 문에 붙이려다가 돌아봤다.

“근데 하루 미룬다고 간격이 충분한지는 어떻게 알아요?”

경옥이 잠깐 대답을 안 했다.

“몰라요.”

은재가 종이를 도로 내렸다. 그러고는 방금 자기가 그린 칸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럼 여기다 넣어요. 왜 모르는지는, 얼음이 다 식는 때를 우리가 아직 못 정했다고 쓰고요.”

경옥이 웃었다. 이 방에서 웃음소리가 난 건 오래간만이었다.

문을 잠그기 전에 경옥이 은재를 불렀다.

“은재 씨.”

“네.”

“내일 새벽 말고 화요일 새벽에, 위 칸 더미 통은 어디다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은재가 대답을 못 하고 서 있었다.

“왜요.”

“저한테 물어보신 거 처음이에요.”

“물어봤어야 했는데 늦었어요.”

경옥이 열쇠를 돌렸다.

“늦은 것도 적어요.”


묻지 않으면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 자리가 빈칸인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것만 본다. 그래서 와 보지 않은 사람의 물음이 여기 있는 사람을 대신해 여기를 본다.

두 개가 맞아떨어졌다고 맞은 것은 아니다. 틀린 것이 둘이면, 가끔 아주 정확하게 맞아 보인다.

기준은 지금 정하면 기준이고 나중에 정하면 변명이다.

그리고 다 하겠다고 하면 그중 하나가 상한다.

없는 줄 알았던 것이 있었다.

묻지 않아서 없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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