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17화 - 끊김

제17화 「끊김」

1. 520미터

엿새째 같은 시간이 나왔다.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 514미터에서 517미터, 517미터에서 520미터. 철수까지 마흔엿새, 안 파는 날까지 사흘.

오늘부터 체를 저울에서 안 내린다. 물받이를 체 밑에 넣어 같이 올려 두고, 5분마다 그냥 눈금만 읽는다. 어제까지는 5분마다 체를 들어내고 물받이를 비우고 다시 올렸다. 그 올렸다 내리는 데에 0.05가 들어 있었다.

첫 토막은 9시 10분에 걸었다. 30분 뒤 첫 값이 15.44.

15.31. 15.22. 15.16. 15.11. 15.08. 15.05. 15.03. 15.02. 15.01.

15.01에서 그쳤다. 걸어 놓고 내리기까지 78분.

두 번째 토막은 71분.

“어제는 66분이었는데요.”

“그랬지.”

“오늘 더 안 뺀 것도 아닌데 왜 길어져요.”

서진이 저울 눈금을 손톱으로 짚었다.

“헛수가 빠졌으니까.”

“헛수가 빠지면 짧아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헛수는 양쪽으로 다 가. 진짜 변화가 0.03인 날에 헛수가 0.02만큼 반대로 들어오면 눈금이 0.01로 읽혀. 그러면 그친 걸로 보고 내려.”

재혁이 노트를 봤다. 뒤로 갈수록 값들이 서로 붙어 있었다. 마지막 세 칸은 0.01씩이었다.

“끝으로 갈수록 변화가 작아지잖아. 작아질수록 헛수한테 먹혀. 그러니까 일찍 그치는 쪽이 훨씬 자주 나와.”

“그럼 어제까지는…….”

“안 그친 걸 그쳤다고 읽은 날이 많았을 거야.”

마른 무게는 15.01과 14.98이었다. 계산치는 토막당 15.6. 부족분은 0.59와 0.62, 오늘 합쳐서 1.21킬로그램.

재혁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말해.”

“또 커졌다고 하려다가…….”

“하려다가.”

“이어 읽으면 안 되죠.”

“왜.”

“자가 또 바뀌었으니까요.”

서진이 노트에 굵은 가로줄을 그었다. 재혁이 세어 보니 네 번째였다.

“열흘에 네 개예요.”

“그럼 표가 아니라 줄이지.”

“언제 표가 돼요.”

“안 바꾸는 날이 열흘쯤 이어지면.”

“그럼 그냥 안 바꾸면 되잖아요.”

“안 바꾸면 표는 생겨.”

서진이 연필을 놓았다.

“그 표가 틀린 자로 잰 표라서 그렇지.”

재혁이 가로줄 네 개를 다시 봤다.

“고치는 동안에는 안 쌓여. 안 고치면 쌓이기는 하는데 쌓인 게 틀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거야.”

“반장님은 뭘 고르셨는데요.”

“고치는 쪽. 대신 고친 날에 줄을 긋고 위아래를 안 이어. 그러면 표가 짧아. 짧은 표는 답을 못 줘.”

“그게 나아요?”

“틀린 답은 안 주잖아.”

노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8월 26일부터 체를 저울에서 내리지 않음. 이전 값과 잇지 말 것. 네 번째 구분선.」

2. 한 대

인천은 삼백스물여드레째였다. 절단까지 서른이레.

기록계 1호를 떼는 날이었다. 성에 낀 기둥에서 클립을 벌리자 쇠가 얼어 있다가 딱 소리를 내며 풀렸다.

병행은 이레로 정했는데 엿새에서 끝났다. 교정기관 접수가 화요일 오전이라 오늘 부치지 않으면 한 주가 밀린다.

은재가 「바꾼 것」 칸에 네 번째 줄을 적었다.

「병행 이레 → 엿새. 사유: 접수일. 우리 사정 아님.」

“우리 사정 아닌 것도 적어요?”

“적어요.”

경옥이 완충재를 접으며 말했다.

“나중에 보면 우리가 바꾼 걸로 보여요. 종이는 누가 바꿨는지를 안 적으면 다 우리가 한 걸로 읽혀요.”

엿새 치 차이는 0.4, 0.3, 0.3, 0.3, 0.3, 0.3이었다.

상자를 봉하기 전에 경옥이 1호를 한 번 더 읽었다. 영하 29.9. 벽에 남은 2호는 영하 30.2.

“성적서에는 이 상자 안에서 겪은 게 안 적혀요. 저쪽은 받아서 20도 방에 하루 두고, 안정되면 챔버에 넣어요. 챔버 값만 적히죠.”

“그럼 오는 동안 뭐가 생겨도 모르는 거네요.”

“그래서 떠나기 전 값을 우리가 재 놓는 거예요. 돌아오면 챔버 값 말고 우리 방 값부터 다시 재요.”

「반출 전 지시값 영하 29.9. 8월 26일 09시 40분. 같은 시각 2호 영하 30.2. 기입자 노은재.」

상자를 문밖으로 내놓고 들어오니 기둥이 허전했다. 클립이 하나 벌어진 채 남아 있었다.

“이제 한 대네요.”

“한 대예요.”

“오는 데 얼마 걸려요.”

“왕복하고 교정하고 서른사흘 잡았어요.”

은재가 노트를 폈다.

“그동안은 2호 값 적으면 되죠.”

“적어요.”

“근데요?”

“그 값이 맞는지를 못 물어요.”

은재가 연필 끝을 봤다.

“어차피 지금도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잖아요.”

“모르는 거하고 물을 데가 없는 거는 달라요.”

경옥이 빈 클립 쪽을 봤다.

“어제까지는 두 개가 서로한테 물었어요. 내일부터는 아무 데도 안 물어요.”

경옥이 노트를 앞장으로 넘기지 않고 오늘 자리에 그대로 적었다.

「8월 26일부터 복귀일까지. 복귀일 미정, 서른사흘 예정. 이 구간의 온도값은 벽 기록계 2호 단독 지시값임. 계기 간 대조 없음. 사유: 1호 교정 위탁 반출. 이 구간을 앞뒤 구간과 같은 조건으로 읽지 말 것. 기입자 문경옥.」

은재가 그걸 보고 물었다.

“이건 나중에 적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아직 아무 일도 안 생겼는데요.”

경옥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2003년은 나중에 적었어요.”

은재가 입을 다물었다.

“스물세 해 걸렸어요. 오늘은 오늘 적을게요.”

경옥이 노트를 덮었다.

“없어질 건 없어지기 전에 적는 게 나아요. 없어지고 나면 왜 없는지도 같이 없어져요.”

“그럼 서른사흘 동안 검산은 아예 못 하는 거예요?”

“영도는 해요. 얼음물 기준점은 주에 한 번 그대로 갑니다.”

“영도에서 맞다고 영하 삼십에서 맞는 건 아니라면서요.”

“아니죠.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아요. 그것도 적어요. 0점만 봤음, 30도 구간은 검산 없음.”

3. 끊긴 데

작업실에는 마감까지 닷새가 남아 있었다.

동규의 세 번째 편지가 아침에 왔다. 첫 장이 대조군 이야기였다.

「보내 주신 0.9는 그 종이의 값입니다. 저도 여기서 비슷한 시기 종이를 구해 재 봤는데 1.2가 나왔습니다. 종이가 다르면 결도 다릅니다. 제 1.2는 선생님 종이에 못 씁니다.」

정한이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잰 것은 보낼 수 있다. 잰 것이 남의 물건에 맞는지는 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쓸 수 있는 대조군은 하나뿐이었다. 그 케이스에서 아무것도 안 쓴 옆면. 한 군데를 잰 것으로 기준을 세워 놓고 있었던 셈이다.

정한은 케이스의 빈 면을 두 군데 더 찾아 같은 조명, 같은 배율로 쟀다. 0.9와 1.1과 0.8이 나왔다. 최댓값이 1.1로 올라갔다.

그러면 그저께 안전하다고 적어 둔 1.3짜리 틈은 여유가 0.2밖에 남지 않는다. 1.5는 아직 산다.

「둘째 틈: 결일 가능성 커짐. 앞면 기준 덩어리 둘 또는 셋.」

어제 종이를 뒤집어 뒷면 볼록에서 찾아낸 1.6짜리 틈은 그 줄에 못 넣었다. 뒷면은 대조군을 따로 재야 하는데 오른쪽 뒷면이 아예 없다.

「앞면 밀리미터와 뒷면 밀리미터를 한 줄에 적지 않음. 합산 안 함. 사유: 대조군이 서로 다름.」

오른쪽 끝이 남았다. 라벨 접착 자국에 덮인 자리.

떼면 못 되돌린다. 그래서 뒤에서 빛을 넣기로 했다. 눌린 자리는 종이가 다져져 있어서 빛이 덜 통과한다. 통과광으로 보면 획이 어둡게 앉는다.

책상 밑에서 오래된 필름 관찰용 판을 꺼내 닦았다. 종이를 얹고 위에서 들여다봤다.

접착 구간이 통째로 하얗게 날아갔다. 접착제가 섬유 사이에 스며들어 그 자리를 다 밝혀 버린 것이다.

다만 접착 자국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1.5밀리미터쯤은 접착제가 얇아서 결이 살아 있었다. 거기까지는 보였다. 틈은 없었다.

정한이 자를 대고 못 본 구간의 폭을 쟀다. 3.2밀리미터.

「오른쪽: 접착 경계에서 안쪽으로 1.5밀리미터까지 확인. 그 구간에 틈 없음. 그 너머 못 봄. 왜: 접착제가 통과광을 다 먹음. 못 본 폭 3.2밀리미터.」

거기서 손이 멈췄다. 글자 사이 평균이 1.4였다. 3.2밀리미터 안에 덩어리가 둘 들어가려면 사이가 하나 있어야 하고, 덩어리 폭까지 치면 자리가 모자란다.

「못 본 폭 3.2밀리미터. 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덩어리: 최대 하나.」

못 본 데의 크기를 재면 못 본 데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는지는 안다. 정한이 서른다섯 해 동안 못 본 자리는 늘 빈칸이었고 빈칸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늘은 폭이 적혀 있으니 상한이 나왔다.

오후에 아는 사람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정전기로 눌린 자국을 뜨는 방법을 물었다. 필름을 씌우고 정전기를 걸어 고운 가루를 앉히면 눌린 자리에만 붙는다고 했다. 다만 먼저 종이에 습기를 먹여야 한다고 했다.

“습기요.”

정한이 인사를 하고 끊었다. 마흔세 해 된 종이였고, 옆에는 식초 냄새를 내기 시작한 릴이 통풍 선반에 따로 서 있었다.

「정전 압흔 검출: 안 함. 왜: 종이에 습기를 먹여야 함. 되돌릴 수 없음. 이 줄은 방법이 없어서 안 한 게 아니라 대가가 커서 안 한 것임. 둘을 같은 칸에 적지 말 것.」

의뢰인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제 말로 숫자를 꺼냈다가 상대 안에서 3초 만에 새 짐작이 자라는 걸 봤다.

대신 종이를 썼다. 「판독한 것」, 「짐작한 것」, 「틀린 짐작」 아래에 칸을 하나 더 그었다.

「못 본 것.」

4. 전구

월요일이었다. 열이레째.

어머니는 미싱 앞에 없었다. 마루에 앉아 실패에 실을 감고 있었다. 검정 굵은 실이었다.

“이거 다 감아 놔야 돼.”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하면 엉켜.”

하람이 옆에 앉아 봤다. 실이 실패에 고르게 앉았다. 손이 기억하는 일이었다.

오후 4시에 하람이 계단 참 위 전등을 올려다봤다. 오래된 전구여서 빛이 노랗고 흐렸다. 참에서 아래 세 칸까지는 그림자에 잠겼다.

그저께 받은 종이에 손잡이를 안 잡으셨다고 적혀 있었다.

하람이 의자를 놓고 올라가 전구를 뺐다. 새것을 끼우려다 손이 멎었다.

지금 관찰 조건을 바꾸고 있었다.

내일부터 어머니가 손잡이를 잡으신다면, 그건 어머니가 달라진 게 아니라 계단이 밝아진 것일 수 있다. 열이레 치 종이가 오늘을 경계로 갈라진다.

그래도 하람은 새 전구를 끼웠다.

내려와서 수첩 뒷장을 폈다. 열째 줄이었다.

「8월 26일 오후 4시. 계단 참 전등을 밝은 것으로 바꿨다. 내가 바꿨다. 이 날짜 앞뒤를 한 줄로 이어 읽지 말 것. 앞으로 손잡이를 잡으시면 그건 밝아져서일 수도 있다.」

아래층 문을 두드려 최영숙에게 말했다.

“전구를 갈았어요. 그것도 종이에 적어 주세요.”

“그런 것도 적어요?”

“그게 제일 먼저예요.”

저녁에 하람이 열이레 치 수첩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날짜가 있고, 시각이 있고, 문 두드린 횟수가 있고, 단 3센티가 있고, 계단 참이 있고, 아래에서 일곱 번째 칸이 있었다.

무엇을 알아내려고 이걸 적기 시작했는지는 어디에도 안 적혀 있었다.

하람이 뒷장을 새로 폈다. 적어 보니 세 개였다.

하나. 저녁에 두드리는 그 문이 그 집 아래층 문인가.

둘. 어머니가 그 시절에 가 계신가.

셋. 내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나.

하나는 잴 수 있다. 계단이 있고 구조가 있고 이웃이 있고 서류가 있다.

둘은 못 잰다. 잴 사람이 본인뿐인데, 여쭈면 그 순간 답이 생긴다.

「둘째 줄: 잴 수 없음. 사유: 물으면 답이 생김. 영구.」

셋은 오늘 했다. 전구를 갈았다.

하람이 그 세 줄을 보고 오래 앉아 있었다.

열이레 동안 세 개를 한 칸에 넣어 놓고 답이 하나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둘째 줄을 「잴 수 없음」으로 옮겨 적고 나니 첫째 줄이 갑자기 작아졌다. 그 집 아래층 문이 맞는다고 해도, 어머니가 거기 가 계신지는 여전히 모른다.

「첫째가 맞아도 둘째는 모른다. 나는 첫째를 둘째의 증거로 쓰려고 했다. 그건 내가 세운 것이지 어머니가 세운 게 아니다.」

8시 반쯤에 최영숙이 올라와 여덟 번째 종이를 건넸다.

「월요일. 6시 없음. 8시 10분 문 한 번. 계단 참 아님, 문 앞이었음. / 올라가던 중인지 내려가던 중인지: 모름. / 어느 쪽 보고 서셨는지: 나를 봤음. / 손잡이: 모름. 손에 뭘 들고 계셨음. 실패 같은 거.」

맨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오늘 낮에 계단 전등을 갈았다고 함. 저녁에 계단이 밝았음.」

하람이 그 줄을 먼저 읽고 나서 위로 올라갔다.

실패.

낮에 본 것과 저녁에 본 것이 이어진 건 열이레 만에 처음이었다.

수첩을 폈다가 한 박자 늦게 적었다.

「이어진 것 같음. 다만 실패는 이 집에 여러 개 있음. 같은 것인지는 안 봤음. 내일 세어 놓을 것.」

5. 세 번째

남극은 오후에 융해 분리를 했다.

규정대로였다. 설정 2 고정, 완전히 녹인 뒤 30분 정치, 걷고 나서 30분 더 두고 다시 한 번.

1차 0.63퍼센트, 2차 0.22퍼센트. 합쳐서 0.85.

“어제가 0.90이었어요.”

“그렇지.”

“그제는 1.05였고요.”

“그제 건 빼.”

“왜요.”

“규정 전이잖아. 다른 자로 잰 거야.”

재혁이 노트를 봤다.

“그럼 점이 두 개예요.”

“두 개지.”

“점 두 개는 뭘 그려도 직선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것도 안 그려.”

재혁이 0.90과 0.85를 나란히 적어 놓고 뺐다. 0.05였다.

“어제 잰 저울 재현성이 0.05였는데요.”

“그러니까 다르다고 못 적어.”

「0.90과 0.85. 차이 0.05. 저울 재현성 0.05. 다르다고 못 적음.」

재혁이 저녁에 규정 밖으로 한 번 더 해 봤다. 두 번 걷고 남은 물을 30분 더 두었다가 세 번째로 걷었다.

0.05퍼센트가 더 나왔다.

서진에게 그 종이를 내밀었다.

“세 번으로 바꾸자고?”

”……네 번째도 나올 것 같아요.”

“나와.”

서진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항량이랑 같은 거야. 안 떨어지는 게 남아 있어. 걷을 때마다 조금씩 나와. 끝이 없어.”

“그럼 어디서 그쳐요.”

“우리가 그쳐. 물건은 안 그쳐.”

재혁이 규정을 고쳐 쓰려다 말았다.

“고치지 마. 두 번으로 둬. 대신 붙여.”

「2회 값임. 3회째에 0.05퍼센트 더 나옴. 8월 26일 실측, 규정 밖. 따라서 이 값은 하한임.」

“규정 밖에서 한 건데 적어요?”

“규정 밖에서 한 거니까 적지.”

서진이 노트를 넘겼다.

“규정 안에서 한 건 규정만 보면 알아. 규정 밖에서 한 건 적어 두지 않으면 아무 데도 안 남아.”

사흘 뒤가 안 파는 날이었다. 커터를 갈아 끼우는 날이다.

서진이 드릴 머리 쪽으로 가서 날 세 매에 각인기로 번호를 새겼다. 1, 2, 3.

“왜 지금 새겨요? 떼고 나서 새겨도 되잖아요.”

“떼고 나서 새기면 어느 게 어느 자리에 붙어 있던 건지 몰라.”

“세 개 다 재는 건 같은데요.”

“마모는 자리를 타. 어느 자리 날이 제일 먼저 닳는지를 알아야 다음 벌을 어떻게 볼지 정해. 그건 붙어 있을 때 새겨야 같이 와.”

서진이 각인기를 내려놓고 장갑을 다시 꼈다.

“위아래가 똑같이 생긴 건 사람이 적는 수밖에 없어. 얼음도 그렇고 이것도 그래.”

6. 같은 자

저녁에 강릉에서 답이 왔다.

이쪽에서 보낸 편지에 저쪽 벽 기록계와 우리 것이 0.6도 다르다고 적어 보냈고, 우리 방 안에서도 두 계기가 0.3 다르다고 덧붙였었다.

강릉은 그 줄을 읽고 자기네 계기 두 대를 서로 비교해 봤다고 했다.

0.2 차이가 났다고 했다.

은재가 종이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럼 0.6이 뭐예요.”

“두 방 차이가 아니에요.”

“그럼요.”

“계기 넷의 차이예요.”

경옥이 종이를 받아 책상에 폈다.

“저쪽에 둘, 여기 둘. 지시값이 넷이에요. 방 사이 차이는 그 넷의 폭 안에 숨어 있어요. 폭이 얼마인지를 모르면 방 차이는 말 못 해요.”

“그럼 두 방이 같은 온도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고요.”

“아니면요.”

“1.1 차이일 수도 있고요.”

은재가 서류를 뒤졌다. 며칠 전 문서에 「두 방 차이 0.6도」라고 적어 놓은 줄이 있었다.

“지울까요.”

“안 지워요.”

경옥이 그 옆에 새 줄을 붙였다.

「이 값은 두 방 차이가 아니라 두 지시값의 차이임. 8월 26일 확인. 기입자 문경옥.」

강릉 편지 맨 끝에 한 줄이 더 있었다.

「그럼 저희도 교정을 보내야 합니까.」

은재가 답장 초안을 썼다.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썼는데요.”

경옥이 읽고 고쳤다.

“보내시면 저희하고 같은 자로 재게 됩니다.”

“같은 뜻 아니에요?”

“아니에요.”

경옥이 연필로 두 줄을 나란히 짚었다.

“앞엣건 저쪽 방 사정이에요. 저쪽 계기가 맞나 틀리나. 뒤엣건 두 방 사이 일이에요.”

은재가 두 줄을 번갈아 봤다.

“셋째는 남의 자가 아니에요. 여럿이 같이 쓰는 자예요. 두 방이 같은 자로 재면, 그때부터 두 방이 잰 값이 서로 말이 돼요. 지금은 서로 딴말이에요.”

“그럼 지난주에 보낸 3통 값은요.”

“그건 딴말로 잰 거예요. 남겨 둬요. 나중에 같은 자가 생기면 그때 다시 봐요.”

경옥이 한 줄을 덧붙이라고 했다.

“성적서는 한 해짜리예요. 내년에 또 보내야 해요. 그것도 적어 보내요.”

“왜요.”

“같은 자도 나이를 먹어요.”

문을 나서기 전에 은재가 기둥 앞에 섰다. 기록계가 하나뿐이었고 옆의 클립은 벌어진 채 비어 있었다.

“허전하네요.”

“허전한 게 나아요.”

“왜요.”

“빈 게 보이잖아요.”

경옥이 헤드램프를 껐다.

“안 보이면 원래 하나였던 줄 알아요.”

은재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빈 클립 밑에 붙였다. 손가락이 곱아서 두 번 만에 붙었다.

「1호. 반출 중. 8월 26일. 복귀 미정.」

경옥이 그걸 오래 봤다.

“은재 씨.”

“네.”

“그것도 칸이에요.”


고치는 동안에는 쌓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 고치면 쌓이기는 하는데, 쌓인 것이 틀린다. 어느 쪽을 골라도 잃는 것이 있고, 고르지 않는 방법은 없다. 고치는 쪽을 고른 사람의 표는 짧고 자주 끊긴다. 짧은 표는 답을 못 주지만 틀린 답도 안 준다.

빌리는 데에는 값이 있고, 그 값은 대개 공백이다. 자를 재러 보내면 보내는 동안에는 그 자로 못 잰다. 모르는 것과 물을 데가 없는 것은 다르다.

공백은 생기고 나서 적는 것보다 생기기 전에 적는 것이 낫다. 없어지고 나면 왜 없는지도 같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공백은 스물세 해가 지나서야 이유가 적힌다.

못 본 데의 크기를 재면, 못 본 데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는지는 안다. 끊긴 자리를 끊겼다고 적으면 끊긴 자리도 자리가 된다. 방법이 없어서 안 한 것과 대가가 커서 안 한 것은 같은 칸에 적지 않는다.

남의 대조군은 내 대조군이 아니다. 잰 것은 보낼 수 있어도, 그것이 내 물건에 맞는지는 보낸다고 되지 않는다.

질문을 여러 개 한 칸에 넣어 놓으면 답이 하나도 안 나온다. 나누어 적고 나서야 잴 수 있는 것과 잴 수 없는 것이 갈리고, 갈리고 나면 잴 수 있는 쪽이 갑자기 작아진다. 그것이 작아진 게 아니라, 원래 그만한 것이었다.

안전이 관찰보다 먼저다. 다만 바꾼 것은 적는다.

빈자리는 비워 두는 게 아니라 비었다고 적어 두는 것이다.

그것도 칸이다.

댓글

처음 쓰는 닉네임이면 자동 등록됩니다. 같은 닉네임 재사용/삭제엔 같은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