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2화 - 이음

제22화 「이음」

1. 544미터

케이블이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이었다. 열하루째 같은 숫자였다.

538미터에서 541미터, 541미터에서 544미터. 두 토막이었다. 철수까지 마흔하루가 남아 있었다.

새 날로 판 이틀째였다. 재혁이 어제 적은 줄 바로 아래에 오늘 줄을 적었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굵은 가로줄도, 별지에 새로 올라간 항목도 없었다.

부스러기를 체에 받쳐 액을 빼고, 항량이 될 때까지 두었다가 쟀다. 마른 무게가 15.22킬로그램, 15.27킬로그램. 계산치는 여전히 토막당 15.6킬로그램이었다.

“부족분 0.71이요. 어제가 0.65였으니까 0.06 늘었네요.”

“늘었다고 적지 마.”

“안 늘었어요?”

“모르지. 두 점이야.”

재혁이 노트를 봤다. 8월 30일 아래에 8월 31일이 있었다. 두 줄뿐이었다.

“열흘 채우기 전에는 폭을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오늘 안 건 0.06이 아니야.”

“그럼 뭘 안 거예요.”

“이었다는 걸 알았지.”

서진이 장갑 낀 손가락으로 두 줄 사이를 짚었다.

“어제하고 오늘 사이에 우리가 아무것도 안 바꿨어. 체도 그대로, 받침 시간도 그대로, 날도 그대로. 그래서 이 두 줄이 붙어 있는 거야. 값을 안 게 아니라 날을 이은 거야.”

“이으려면 뭘 해야 되는 건데요.”

“아무것도 안 해야 돼. 잇는 건 부지런해서 되는 게 아니라 참아서 되는 거야.”

재혁이 그 말을 노트 여백에 적었다. 적고 나서 깊이 칸을 한참 봤다. 412, 424.6, 436, 448…… 544. 세 주 치 숫자가 한 줄로 서 있었다.

“이 깊이는 뭘로 재는 거예요?”

“윈치에 감긴 길이.”

“그럼 잰 거네요.”

“센 거지.”

서진이 케이블 릴 쪽으로 턱을 들었다.

“저 줄에 드릴이 매달려 있어. 드릴 무게에 케이블 제 무게까지 실려서 줄이 늘어나. 이 깊이면 반 미터쯤.”

“반 미터요?”

“천분의 일쯤 늘어난다고 보면 돼. 500미터가 넘으면 반 미터야. 그리고 아래는 위보다 이십 도 넘게 차가워. 쇠는 차가우면 줄어들고. 그건 반대로 십몇 센티쯤.”

“그럼 544가 아니잖아요.”

“544라고 적기로 한 거야. 나중에 맞추는 자가 따로 있어.”

“뭔데요.”

“코어 길이. 파낸 토막을 다 이어 붙이면 그게 진짜 깊이야.”

“그거 더 정확해요?”

“그것도 안 맞아. 부스러기가 된 데가 있고, 깨져서 없어진 데도 있으니까 이어 붙이면 늘 짧게 나와. 자가 둘인데 둘 다 조금씩 틀려.”

“둘 다 틀리는데 왜 둘 다 있어요.”

“틀리는 방향이 다르니까. 하나는 길게 나오고 하나는 짧게 나와. 나중 사람은 그 사이 어디라는 걸 알지.”

서진이 처리대 위의 토막을 자로 쟀다. 재혁이 옆에서 눈금을 읽었다.

“2.96미터요.”

두 번째 토막은 2.98미터였다. 노트에는 지금까지 3미터라고만 적혀 있었다.

“오늘부터 토막 길이 적어.”

“이거 굵은 줄 아니에요? 없던 걸 재기 시작하는 건데.”

“아니야.”

“왜요.”

“바꾼 게 아니라 는 거니까. 있던 칸을 고치면 줄이고, 칸을 하나 더 만드는 건 줄이 아니야. 무게는 어제하고 오늘이 똑같은 방법으로 잰 거잖아.”

재혁이 노트를 넘겨 별지에 한 줄을 더 적었다. 「8월 31일부터 토막 길이 잼. 이 앞은 3미터로만 적혀 있음. 그건 잰 게 아니라 정한 것임.」

“이 앞은 못 살리네요.”

“못 살려. 그건 오늘 시작한 값이야.”

2. 백분의 일

저온시료동은 영하 30.0도였다. 기록계 2호 단독 판독으로 닷새째였다.

은재가 벽의 아래 장에 둘째 줄을 적었다. 8월 30일, 13시간 33분, 바깥 최고 28.6도, 문 두 번, 반출입 없음. 조건은 다 맞았다.

“두 줄 됐어요.”

“위 장은 안 건드렸죠?”

“안 건드렸어요. 닫아 놨으니까요.”

은재가 선반 사이를 걸어 내려가다 절단 예정일이 적힌 종이 앞에서 멈췄다. 재운 지 삼백서른사흘째였고, 자르기까지 32일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 365일은 누가 정했어요?”

경옥이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아무도 안 정했어요. 다들 그렇게 해요.”

“근거가 있으니까 다들 하는 거 아니에요?”

“근거는 있어요. 근데 근거가 날짜를 안 줘요.”

경옥이 통 하나에 손을 얹었다.

“깊은 데서 올라온 얼음은 눌려 있다가 풀려요. 안에 갇혀 있던 기체가 다시 기포로 나오면서 조금씩 부풀어요. 통틀어 백분의 일쯤.”

“1퍼센트요.”

“길이로 치면 1미터에 1센티예요. 그런데 그게 하루에 똑같이 나뉘어서 부풀지 않아요. 처음 한 달에 절반쯤 하고, 남은 절반을 열한 달에 걸쳐서 해요. 그다음에는 더 느리게 하고요.”

“그럼 언제 끝나요?”

“안 끝나요. 점점 느려질 뿐이에요.”

은재가 통을 봤다. 겉으로는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끝나는 날이 없는 일에 날짜를 붙인 거네요.”

“사람이 붙인 거예요. 붙여야 자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365일은 얼음이 정한 게 아니라 우리가 정한 거예요. 그건 적어 둬야 해요.”

“확인은 못 해요? 진짜 다 부풀었는지.”

“하려면 할 수 있어요. 처음 길이를 알면요.”

경옥이 잠깐 말을 멈췄다.

“지난 시즌 것은 몰라요. 도착했을 때부터 쟀거든요.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배에서 넉 달을 부푼 다음이에요.”

“그럼 지금 잰 길이는……”

“부푼 걸 부풀기 전이라고 치고 재고 있는 거죠. 지금까지 스물세 해 동안 그렇게 했어요.”

은재가 아무 말도 안 했다. 경옥이 먼저 이어 말했다.

“이번 시즌 것부터는 달라요. 3월에 130통이 오는데, 그건 도착한 날 다 잴 거예요.”

“도착한 날도 이미 넉 달 뒤잖아요.”

“그렇죠.”

“그럼 판 날에 재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거기서요? 남극에서요?”

“거기서요.”

은재가 책상으로 돌아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요청서 서식이었다.

“뭐라고 써요.”

“토막 길이를 판 날에 재서 같이 보내 달라고 쓰세요. 그리고 왜 필요한지도 쓰세요. 이유를 안 쓰면 저쪽에서는 일이 하나 는 거예요.”

“이유를 쓰면요?”

“저쪽에서도 같은 걸 알고 싶어져요.”

은재가 열 줄을 썼다. 마지막 줄에는 「이 값은 올해에는 안 씁니다. 처음 값이 있어야 나중에 얼마나 부풀었는지를 알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라고 적었다.

“오늘 보내요?”

“오늘 보내요. 3월에 보내면 늦어요.”

3. 마감

이관 마감일이었다.

정한은 아침에 종이를 챙겼다. 파일 세 벌과 매체 두 종, 원거리 한 벌은 어제 다 넘어갔다. 오늘 넘길 것은 종이였다.

처리 내역 여섯 장. 언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어느 곡선으로 보정했고 무보정 원본은 어느 파일인지, 어느 구간을 못 읽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접수하는 사람이 종이를 세어 보고 물었다.

“이건 왜 같이 넣으세요? 파일은 이미 받았는데요.”

“종이가 없으면 그 파일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파일입니다.”

“파일 이름에 다 적혀 있던데요.”

“이름은 누가 바꿔도 아무 표가 안 납니다.”

정한이 봉투를 밀어 놓고 나왔다.

작업실로 돌아와 원본 릴을 통풍 선반에서 내렸다. 8월 9일에 구웠으니 스무이틀이 지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테이프 끝을 잡아 조금 당겨 보니 어제까지 없던 뻑뻑함이 손끝에 걸렸다.

굽고 나서 얻는 시간은 길어야 두 달, 짧으면 삼 주였다. 그 안에 옮기라고 마감을 잡은 것이었고, 오늘이 그 끝이었다.

다시 구우면 또 며칠은 돌릴 수 있었다. 다만 구울 때마다 조금씩 깎였다. 열을 받은 바인더는 습기를 뱉고 나서 원래 자리로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정한은 케이스 안쪽에 붙어 있는 오래된 종이를 봤다. 남의 글씨로 「89.06」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 자기 글씨로 한 줄을 더 적었다.

「2026.08.09 베이킹. 50도 8시간. 두 번째로 확인됨.」

두 번째라고 쓰고 잠깐 손을 멈췄다가, 그 옆에 작게 덧붙였다.

「단, 기록에 남은 것만 셈. 안 적힌 회수가 있을 수 있음.」

전화가 왔다. 의뢰인이었다.

“연필로 쓰신 걸 찾아봤는데요.”

“네.”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가 볼펜만 쓰셨어요. 약봉투에 적으신 그거 하나가 이상한 겁니다.”

“1983년 무렵 것은요.”

“아무것도 못 찾았습니다.”

정한이 종이를 당겨 한 줄을 적었다. 「대조군 확보 실패. 사유: 표본 부재. 1994년 열두 자 외 없음.」

“그럼 끝입니까.”

“제 쪽에서는 오늘로 끝입니다. 다만 안 끝난 채로 끝났다고 적어 두겠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끝났다고만 적으면 나중에 누가 봐도 다 한 줄 압니다. 안 끝났다고 적어 두면, 언젠가 다른 종이가 나왔을 때 여기부터 하면 됩니다.”

전화 끝에 의뢰인이 잠깐 말이 없다가 물었다.

“선생님은 이제 이거 안 보십니까.”

“봅니다. 마감이 있는 쪽이 끝난 겁니다. 판독에는 마감이 없습니다.”

“그럼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못 정합니다.”

오후에 동규에게서 우편이 왔다. 민감도표 공동 서명본을 협회 자료집에 싣기로 했다는 통지였고, 아래에 손글씨가 한 줄 있었다.

「제 문턱은 1.2로 두겠습니다. 선생님 것을 1.2로 고쳐 주시면 표가 예뻐지겠지만, 그러면 두 이름을 나란히 쓸 이유가 없어집니다.」

정한이 그 종이를 벽에 붙였다. 붙이면서 마감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넘기는 날은 정할 수 있었다. 끝나는 날은 아무도 정해 주지 않았고, 기한이 없는 일은 아무도 안 하면 정말로 아무도 안 했다.

저녁에 새 의뢰 전화가 한 통 왔다. 정한은 받으면서 릴 케이스를 책상 왼쪽으로 밀어 놓았다. 버리는 자리가 아니라 손이 닿는 자리였다.

4. 되박음

토요일이었다. 스무이틀째였고, 원래부터 오던 날이었다.

미강은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 성글게 시침해 둔 두 겹 천이 노루발 아래에 있었다.

“박고 계셨네요.”

“응. 이제 박아야지.”

박는 소리가 짧게 끊겼다가 이어졌다. 다 박고 나서 미강은 실을 끊고 천을 돌려 잡더니, 이은 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눌러 보고 같은 자리를 도로 박았다.

“왜 두 번 하세요?”

“여기가 제일 약해.”

“어디가요.”

“이은 데. 이은 데는 다 그래. 한 장일 때는 아무 데나 힘이 가는데, 이어 붙이면 힘이 다 여기로 와.”

하람이 손을 멈췄다. 어머니가 늘 자기 바지 단을 3센티로 접고 되박음질을 두 번 하던 것이 스물 몇 해였다. 왜냐고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단도 그래서 두 번 하신 거예요?”

“단도 이은 데지.”

미강이 천을 뒤집어 놓고, 시침해 둔 흰 실을 잡아 뽑기 시작했다. 하람은 어제 자기가 뽑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뽑힌 흰 실을 미강은 버리지 않고 손가락에 감았다. 짧게 끊긴 것은 무릎에 놓고, 긴 것만 골라 실패에 감았다.

하람이 반짇고리를 열었다. 실패는 열한 개 그대로였다. 자리도 어제와 같았다. 부엌 서랍 없음, 미싱 서랍 다섯, 반짇고리 여섯.

흰 실패를 들어 봤다. 어제 저녁에 봤을 때보다 분명히 줄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조금 늘어 있었다. 다만 그제보다는 적었다.

하람이 수첩을 꺼내 적었다.

「8월 31일. 흰 실패. 어제 줄었고 오늘 늘었음. 단 처음보다는 적음.」

적고 나서 한 줄을 더 적었다.

「양은 한 방향으로만 안 감. 개수는 한 방향으로만 갔었음. 둘이 다름.」

개수는 세면 되는 것이었고, 양은 재야 하는 것이었다. 그 차이를 하람은 오늘 처음 손으로 알았다.

저녁에 아래층 최영숙이 종이를 접어 건네줬다. 열세 번째였고, 새 양식으로 두 번째였다.

「토요일. 6시 없음. 7시 15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날씨: 맑음 / 전등: 새것 / 신발: 슬리퍼 / 들고 계셨던 것: 없음.」

닷새 연속이었다. 화요일 6시 40분, 수요일 7시 5분, 목요일 7시 20분, 금요일 7시 40분, 토요일 7시 15분.

하람은 시각을 나란히 적어 놓고 한참 봤다. 늦어지다가 오늘 앞으로 왔다. 이유를 하나 대 보고 싶어졌고, 대 보려다가 어제 자기가 적어 둔 줄을 다시 읽었다.

수첩 뒷장 열여섯 줄째를 적었다.

「닷새 연속. 시각은 오르내림. 아직 아무 말도 안 함. 겨울까지 적음.」

장기요양 결과는 오지 않았다. 방문 조사를 받은 지 이레째였다. 그것도 한 줄로 적었다. 「이레째. 없음.」

돌아 나오기 전에 하람이 물었다.

“이거 언제 다 하실 거예요?”

미강이 천을 접어 상 위에 놓았다.

“몰라. 이은 데까지는 했어.”

5. 첫 벌

오후에 재혁이 부스러기를 사분법으로 나눴다. 두 벌이었다.

체는 두 종이었다. 1밀리와 0.25밀리. 3분. 8월 21일과 똑같은 방법이었고, 어제와도 똑같았다.

첫 벌 24퍼센트, 둘째 벌 22퍼센트. 어제 첫 벌이 23, 둘째 벌이 21이었다.

“오늘도 두 벌 차이가 2예요.”

“어제도 2였지.”

“그럼 제 손 폭이 2 맞네요.”

“두 번 봤어. 그 정도는 말해도 돼. 대신 2라고 못 박지는 마.”

재혁이 값을 옮겨 적다가 손을 멈췄다.

“근데 8월 21일 값이 21이잖아요.”

“그렇지.”

“오늘 둘째 벌이 22예요. 첫 벌은 24고요. 둘째 벌 쓰면 8월 21일하고 1 차이인데, 첫 벌 쓰면 3 차이예요.”

“그래서.”

“둘째 벌이 더 잘 맞는데요.”

서진이 노트를 재혁 쪽으로 돌려놓았다. 어제 적은 줄이 있었다. 「입도. 단, 오늘부터 두 벌. 옛날과 견줄 때는 첫 벌만 씀. 재기 전에 정함.」

재혁이 그 줄을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저 어제 그거 쓰시는 거 옆에서 봤어요.”

“어제 정한 건 오늘 잘 맞으라고 정한 게 아니야. 오늘 안 맞을 때 어쩔지를 정한 거야.”

“안 맞으니까 바꾸고 싶어지는 거잖아요.”

“그럴 때 바꾸면 그게 고르는 거고.”

재혁이 24를 적었다. 22는 옆 칸에 적고 괄호를 쳤다.

“3 차이면 뭔가 있는 거 아니에요? 폭이 2인데 3이면.”

“있을 수도 있지. 근데 원인 후보가 몇 개인지 세어 봐.”

“날이 새 거니까…… 새 날이 조각을 크게 깎는 거요.”

“또.”

재혁이 잠깐 생각했다.

“깊이요? 아래로 갈수록 액이 되직해져서.”

“또 있어.”

서진이 드릴 쪽으로 갔다. 몸통 아래쪽에 벽을 밀고 버티는 날개가 붙어 있었다.

“드릴 머리가 돌면 몸통은 반대로 돌려고 해. 그걸 이게 벽을 눌러서 막는 거야. 이게 안 버티면 몸통이 같이 돌아.”

“같이 돌면요?”

“파는 게 아니라 헛도는 거지. 조금씩 미끄러지면 한 바퀴에 깎는 두께가 달라져. 두께가 달라지면 나오는 부스러기 크기도 달라지고.”

재혁이 노트를 폈다.

“그럼 오늘 3 차이는 날 때문일 수도 있고, 깊이 때문일 수도 있고, 헛돎 때문일 수도 있는 거네요.”

“세 개야. 값은 하나고.”

“그럼 아무 말도 못 하네요.”

“오늘은 못 해. 대신 오늘부터 헛돌았는지를 적으면 다음부터는 셋 중에 하나는 지울 수 있어.”

토크 기록에 칸이 하나 늘었다. 재혁이 별지가 아니라 본표에 칸을 그렸다. 아침에 배운 대로였다. 칸을 더 만드는 것은 줄이 아니었다.

무전이 들어온 것은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인천이었다. 재혁이 받아 적어 와서 읽었다.

“토막 길이를 판 날에 재서 같이 보내 달래요. 부푼 걸 나중에 알려면 처음 길이가 있어야 한다고요. 올해는 안 쓴대요.”

서진이 처리대 위의 자를 봤다. 아침에 꺼내 놓은 그대로였다.

“오늘 아침에 시작했다고 답신 보내.”

“그냥 하고 있다고 하면 되잖아요.”

“오늘 아침이라고 정확히 적어. 어제부터라고 쓰지 말고.”

“그게 왜 중요해요.”

“저쪽이 요청한 날하고 우리가 시작한 날이 같은 날이야. 그게 남으면 나중에 누가 봐도 서로 따로 생각한 거라는 게 보여. 하루라도 앞당겨 적으면 그건 요청 전에 한 게 되고, 그러면 우리가 잘한 얘기가 되지 자료가 안 돼.”

같은 봉투에 회람이 하나 더 들어 있었다. 계량 규칙 개정안이 확정됐다는 것이었고, 첫머리에 재혁이 쓴 문장이 그대로 있었다.

재혁은 이번에는 한 번만 읽고 노트를 덮었다.

6. 세는 표

저녁에 은재가 벽에 종이를 한 장 더 붙였다.

빈 종이였다. 맨 위에만 글씨가 있었다.

「1월 표. 아직 없음. 만들 때 쓸 조건: 바깥 최고기온 0도 안팎 / 문 두 번 이하 / 반출입 없음. 이 셋은 8월 31일에 정함.」

“값도 없는데 조건부터 적어요?”

“값 보고 조건을 정하면 조건이 아니에요.”

경옥이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러 붙였다.

“겨울에 스무 날쯤 모일 거예요. 그때 가서 문 세 번까지 넣을까 말까를 정하기 시작하면, 넣었을 때 표가 예뻐지는 쪽으로 정하게 돼요. 사람이 그래요.”

“지금 정하면요?”

“지금은 값이 없으니까 예뻐지고 말고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정하는 거예요.”

은재가 벽을 봤다. 종이가 넉 장이 됐다. 닫은 기준 한 장, 쌓는 날 한 장, 사선 그은 칸이 있는 기록지 한 장, 그리고 오늘 붙인 빈 종이 한 장.

“선생님. 스물세 해 동안 한 번도 안 끊긴 표가 있어요?”

경옥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방을 한 바퀴 돌아봤다.

“있어요. 하나.”

“뭔데요.”

“문 여닫이 횟수요.”

“그거요?”

“그거요. 계기가 바뀌어도 안 끊기고, 사람이 바뀌어도 안 끊겼어요. 스물세 해가 한 줄로 이어져 있어요.”

은재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물었다.

“온도는 계기를 바꾸면 끊기는데 문은 왜 안 끊겨요?”

“세는 거라서요.”

경옥이 문 쪽을 봤다.

“재는 건 자가 있어야 해요. 자를 바꾸면 그 앞하고 뒤가 다른 자예요. 세는 건 자가 없어도 돼요. 하나, 둘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세는 표는 잘 안 끊겨요.”

“그럼 다 세는 걸로 하면 되잖아요.”

“셀 수 있는 건 몇 개 안 돼요. 문은 열렸거나 안 열렸거나 둘 중 하나라서 셀 수 있는 거예요. 온도는 그렇게 안 생겼어요.”

은재가 벽에서 눈을 뗐다.

“그래도 안 끊긴 게 하나 있는 건 좋네요.”

“좋기는 한데요.”

경옥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열다섯 분마다 하는 일이었다.

“제일 중요한 표는 아니에요. 얼음한테 제일 중요한 건 온도예요. 온도 표는 자꾸 끊기고요.”

“안 끊긴 건 덜 중요하고, 중요한 건 자꾸 끊기고요.”

“네.”

“그럼 어떡해요.”

“끊긴 자리를 적어요. 그거밖에 없어요.”

은재가 사선 그은 칸이 있는 기록지 쪽으로 갔다. 옆 연구동 넉 통은 오늘도 보류였고, 사유는 같았다. 그 한 줄을 오늘 것으로 다시 적었다.

같은 사유를 날마다 적는 이유를 이제는 묻지 않았다.


잇는다는 것은 새로 무엇을 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안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이어진 표는 부지런해서 생기지 않고 참아서 생긴다.

이어 붙인 자리는 늘 제일 약하다. 한 장일 때는 아무 데나 가던 힘이 이은 데로 다 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만 두 번 박고, 두 번 박은 자리는 표시로도 남는다.

칸을 고치면 표가 끊기고, 칸을 하나 더 만들면 표는 안 끊긴다. 무엇을 늘리는 일과 무엇을 바꾸는 일은 같은 손으로 하지만 결과가 다르다.

끝나는 날이 없는 일에 날짜를 붙이는 것은 사람이다. 붙여야 자를 수 있어서 붙이고, 붙였다는 사실을 적어 두어야 나중 사람이 그 날짜를 얼음이 정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마감은 끝나는 날이 아니라 넘기는 날이다. 넘기고 나서 남는 일에는 기한이 없고, 기한이 없는 일은 아무도 안 하면 정말로 아무도 안 한다.

세는 일은 자가 없어도 되고 재는 일은 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는 표는 잘 안 끊기고,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대개 재야 하는 것이다.

그날 네 자리에서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 사이를 이었다.

이은 자리마다 한 번씩 더 박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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