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23화 - 벌어짐

제23화 「벌어짐」
1. 550미터
케이블이 내려가는 데 23분, 올라오는 데 22분이었다. 열이틀째 같은 숫자였다.
544미터에서 547미터, 547미터에서 550미터. 두 토막이었다. 철수까지 마흔 날이 남아 있었다.
재혁이 첫 토막을 받침대에 눕히고 강철 줄자를 폈다. 어제 만든 칸이었다. 이 캠프에 온 뒤로 줄곧 토막 길이 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3미터라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2미터 97이요.”
“적어.”
둘째 토막은 2미터 94였다.
“어제가 2미터 96하고 2미터 98이었으니까, 넷 다 3미터가 아니네요.”
“3미터인 적이 없었겠지. 어제부터 재기 시작했을 뿐이야.”
부스러기를 체에 받쳐 액을 빼고 항량이 될 때까지 두었다가 쟀다. 마른 무게가 15.19킬로그램과 15.31킬로그램. 계산치는 토막당 15.6킬로그램이었다.
“부족분 0.70이요. 그저께 0.65, 어제 0.71.”
“세 점이야.”
“세 점이면 뭘 할 수 있어요.”
“세 점이면 두 점보다 하나 많아.”
재혁이 웃었다. 서진은 웃지 않고 노트를 넘겨 어제 새로 만든 칸을 폈다. 토크 기록 아래에 좁게 낸 칸이었다. 헛돌았는지 적는 칸.
“오늘 둘째 토막에서 두 번 걸렸어요. 소리가 달라져서 알았습니다.”
“몇 초쯤.”
“한 번은 삼사 초, 한 번은 그것보다 짧게요.”
“적어. 초까지 못 적으면 못 적었다고 적고.”
재혁이 적다가 손을 멈췄다. 헛돌았다고 적힌 토막이 2미터 94였다. 헛돌지 않은 토막은 2미터 97이었다.
“헛돌면 짧게 나오는 거 아니에요?”
“한 점이야.”
“그래도 방향이 맞잖아요.”
“칸을 만든 첫날에 답이 나오면, 그건 대개 눈이 만든 거야.”
“눈이요.”
“칸을 만들면서 네가 이미 생각을 했잖아. 헛돌면 덜 깎이겠구나 하고. 그 생각을 가지고 값을 보면 값이 그렇게 보여.”
서진이 연필로 칸 옆에 짧은 줄을 그었다.
“열흘. 열흘 치가 모이면 헛돈 날하고 안 돈 날을 갈라서 봐. 그때까지는 그냥 적기만 해.”
“열흘 뒤에도 이 방향이면요.”
“그때 얘기하자. 오늘 얘기하면 오늘 걸로 열흘을 물들여.”
시추동 벽 쪽 나무 상자에 커터 날 상자가 있었다. 새 날로 판 지 사흘째였고, 마모를 실측하기로 한 날까지는 나흘이 남아 있었다. 높이와 각인 자리는 이미 값이 있었고, 마모만 아직 아무 값이 없었다.
“셋 중에 둘이요.”
“둘로는 아직 아무 말도 못 해.”
2. 셋째 줄
인천 극지연구소 저온시료동은 334일째였다. 첫 절단까지 31일이 남아 있었다.
냉동기는 2호 한 대로만 엿새째 돌고 있었다. 벽의 온도계는 영하 30.0도를 가리켰다.
은재가 벽에 붙은 아래 종이에 셋째 줄을 적었다. 「기준 정한 뒤로 쌓는 날」이라고 맨 위에 적힌 종이였다.
“8월 31일. 13시간 41분. 바깥 최고기온 28.9도, 문 두 번, 반출입 없음.”
“조건 맞네요.”
“맞아요. 그런데요.”
은재가 종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13시간 26분, 33분, 41분이에요. 세 줄이 다 오르막이에요.”
경옥이 장부를 덮고 종이 앞으로 왔다.
“오르막으로 보이죠.”
“세 줄이면 방향은 말해도 되지 않아요? 크기는 몰라도요.”
“세 줄이면 사이가 두 개예요. 두 개가 다 오르막일 확률이 얼마인지 알아요?”
은재가 잠깐 셈했다.
”…넷에 하나요.”
“동전 두 번 던져서 다 앞면 나오는 거예요. 넷 중에 한 번은 그냥 그렇게 나와요. 그걸 보고 오르막이라고 하면, 저는 네 번에 한 번은 헛다리를 짚어요.”
“그럼 몇 줄이 필요해요.”
“몰라요.”
경옥이 그렇게 말하고 종이 오른쪽 여백에 짧게 적었다.
「9월 1일. 세 줄이 오르막임. 아직 아무 말도 안 함.」
“이건 왜 적어요?”
“나중에 열 줄이 되면, 내가 세 줄일 때 이미 봤다는 게 남아 있어야 해요. 그때 처음 본 척하면 열 줄이 아니라 세 줄부터 본 걸 열 줄이라고 우기는 게 돼요.”
은재가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함, 이라는 대목에서 조금 오래 머물렀다.
“그거 요새 자꾸 나오네요. 안 함, 안 씀, 안 나눔.”
“이 방에서 제일 많이 하는 일이에요.”
“안 하는 게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하는 게 일이라고 했잖아요. 표도 똑같아요.”
위 종이는 건드리지 않았다. 「기준: 열한 날. 적산시간계 교체 이후. 여름 조건.」 아래에 「닫음. 8월 30일.」이 그대로 있었다.
3. 이튿날
오정한의 작업실에는 그날 아침 아무 일정도 없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이런 아침이 몇 번 있었는지 세어 본 적은 없었다. 마감이 끝난 다음 날이라는 것은 넘길 데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책상 왼쪽에 어제까지 있던 릴 케이스가 그대로 있었다. 버리는 자리가 아니라 손 닿는 자리였다.
정한은 그것을 건드리지 않고, 통풍 선반 아래 칸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아세테이트 릴 세 통이었다. 여섯 달 전에 받아서 여섯 달 동안 미뤄 둔 것이었다.
뚜껑을 열자 신 냄새가 났다. 냄새는 여섯 달 전에도 났었다. 달라진 것은 감긴 모양이었다. 릴 옆으로 보이는 테이프 층에 별 모양 자국이 있었다. 여섯 달 전에는 세 갈래였는데 지금은 다섯 갈래였다. 감긴 면 한쪽이 손가락 하나 두께쯤 볼록했다.
정한은 릴을 돌려 가며 오래 보고, 손은 대지 않고 종이에만 적었다.
「스포크 3 → 5. 측면 융기 있음. 재생 시도 안 함. 9월 1일.」
세 통에 1, 2, 3이 아니라 상한 순서를 적었다. 제일 볼록한 것이 첫 번째였다.
오후 두 시에 어제저녁 전화한 사람이 왔다. 오십 대 남자였고, 손에 든 가방에 릴 두 통과 시디 한 장이 있었다.
“이건 벌써 옮긴 겁니다. 십몇 년 전에 어디서 해 줬어요.”
“그럼 제가 할 일이 없을 텐데요.”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해서요.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깨끗해요.”
정한이 시디를 받아 들고 앞뒤를 봤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잡음을 지웠네요.”
“지운 게 나쁩니까?”
“나쁘진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지웠는지가 어디에도 안 적혀 있어요.”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이걸 들으면 사람들이 이게 원래 소리인 줄 압니다. 원본은 여기 있는데, 이 두 개가 얼마나 다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정한이 릴과 시디를 나란히 놓았다.
“그 사이가 벌어져 있는 거예요. 벌어진 폭을 아무도 안 적어 놨고요.”
“그럼 이제 와서 어떻게 합니까.”
“원본이 남아 있으니까 잴 수는 있습니다. 제가 다시 옮기면서 아무것도 안 지운 걸 하나 만들면, 그거하고 이거를 맞대 볼 수 있어요. 그러면 그때 사람이 뭘 지웠는지가 나옵니다.”
“지운 게 다시 돌아옵니까?”
“아니요. 지운 건 안 돌아옵니다. 뭘 지웠는지만 돌아옵니다.”
남자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챙기다가 선반 쪽을 봤다. 아세테이트 세 통이 놓여 있었다.
“저건 왜 저렇게 벌어져 있어요? 감긴 게 별처럼 됐네.”
“안쪽 받침이 줄어들어서 그렇습니다.”
“줄어들면 오히려 조여야 되는 거 아닌가요.”
“두 겹으로 된 겁니다. 아래 받침만 짧아지고, 소리가 묻은 위쪽은 안 줄어들어요. 남은 게 갈 데가 없으니까 감긴 채로 밀립니다. 그게 저 별 모양이에요.”
“다시 감으면 되겠네요.”
“만지면 더 상합니다. 저건 도로 붙이는 일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천천히 벌어지게 합니다.”
정한이 선반 위 온습도계를 가리켰다.
“차고 마른 데 두면 진행이 느려집니다. 10도만 낮춰도 몇 배는 오래 갑니다. 그리고 저게 제 몸에서 뱉은 산으로 저를 또 삭히니까, 흡착제를 같이 넣어서 그 산을 잡아 줘야 해요. 저건 굽는 게 아닙니다. 구우면 죽습니다.”
“세 개 다 하시는 거예요?”
“제일 상한 것부터 합니다.”
“성한 걸 먼저 하는 게 빠르지 않나요.”
“성한 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상한 건 못 기다려요. 순서를 거꾸로 잡으면 성한 것만 옮기고 나머지는 못 옮깁니다.”
남자가 가고 나서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정한이 책상 왼쪽의 릴 케이스를 조명 아래로 가져왔다. 손목시계를 옆에 놓고 시각을 봤다. 세 시 사십 분이었다.
삼십 분만 보기로 했다. 마감이 끝난 일에는 마감이 없었고, 마감이 없는 일은 하루치를 정해 두지 않으면 사람이 영영 안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케이스 안쪽에 연필로 눌린 자리를 낮은 각도 조명으로 다시 훑었다. 첫 글자에는 세로획 하나와 그 아래 동그란 것이 있었다. 둘째 글자에는 가로획 둘과 그 위 짧은 세로가 있었다. 셋째 자리에는—
조명을 세 방향으로 바꿔 가며 오래 봤다. 각도를 바꾸면 없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있던 것이 지워지기도 해서, 세 방향이 다 같은 말을 할 때까지 봤다.
셋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자였을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세 글자라고 불러 왔는데, 실은 두 글자에 빈자리 하나였을 수도 있었다.
정한이 종이에 적었다.
「셋째 자리에 눌린 자국 없음. 조명 세 방향. 글자가 없었다는 뜻은 아님. 연필을 약하게 쥐었을 수도 있음. 2026년 9월 1일.」
없다고 쓰지 않았다. 없다고 쓰면 다음 사람이 그 자리를 안 본다.
시계는 삼십일 분을 가리켰다. 조명을 껐다.
내일도 삼십 분이었다.
4. 보여 주면
일요일이었다. 정기 방문일은 어제였는데 하람은 오늘도 갔다. 스무사흘째였다.
어머니는 낮은 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 본박음을 한 천 두 겹이 그대로 있었다. 시침실은 어제 다 뽑아서 없었다.
미강이 이은 자리를 손끝으로 훑다가 끝 쪽에서 멈췄다. 한 뼘쯤 되는 데가 벌어져 있었다. 어제 박은 실이 거기까지 안 갔거나, 갔는데 성글었거나였다.
“여기가 벌어졌네.”
“어제 다 하신 줄 알았어요.”
“시침 뽑으면 이래. 뽑으면 잡아 주던 게 없어지잖아.”
미강이 그 한 뼘만 다시 박았다. 실은 검정이었다.
하람이 물었다.
“어제는 무슨 실로 하셨어요?”
“몰라.”
미강은 바늘을 놓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로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람이 반짇고리에서 실패 두 개를 꺼내 상 위에 놓았다. 흰 것과 검정 것을 나란히. 어디에 놓을지 몰라서 그냥 놓은 것이었다.
미강이 그중 검정을 집었다.
“이걸로 했지.”
하람이 손을 무릎에 놓았다.
“어떻게 아세요?”
“보면 알지.”
하람은 다시 묻지 않았다. 흰 실을 하나 더 섞어서 세 개로 놓아 보고 싶었고, 어제 것과 그제 것을 섞어서 물어보고 싶었다. 이십 초쯤 그러고 있다가 수첩을 꺼냈다.
「9월 1일. 물으면 모른다고 하심. 두 개를 내밀면 바로 고르심. 검정. 맞음. 한 번 봤음. 다시 안 해 봄. 왜: 다시 하면 시험이 됨.」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물어서 아는 것과 보여 줘서 아는 것 사이가 있음. 그 사이를 앞으로 적음.」
실패는 열한 개였다. 자리도 그대로였다. 부엌 0, 미싱 5, 반짇고리 6. 흰 실은 어제 늘었다가 오늘 다시 줄었고, 검정도 줄어 있었다.
「흰 실. 그제 줄고 어제 늘고 오늘 줌. 검정. 오늘 줌.」
미강이 실을 끊고 이로 매듭을 물었다.
“이거 뭐 만드세요?”
“이건 안쪽이야.”
“안쪽이요?”
“겉에 대는 거 말고. 안에 들어가는 거.”
“안쪽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사람이 있는데, 안쪽이 먼저 뜯어져.”
하람이 그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고쳐 주지 않았고 되묻지도 않았다.
현관 신발장 위에 최영숙 씨가 넣어 둔 종이가 있었다. 열네 번째였다.
「일요일. 6시 없음. 7시 05분 문 한 번. 계단 참. 손잡이 잡으셨음. / 날씨: 맑음 / 전등: 새것 / 신발: 슬리퍼 / 들고 계셨던 것: 없음.」
손잡이는 엿새 연속이었다. 시각은 6시 40분, 7시 05분, 7시 20분, 7시 40분, 7시 15분, 7시 05분이었다. 늦어지다가 이틀째 앞으로 오고 있었다.
하람은 이유를 대 보고 싶었다. 뒷장을 펴서 자기가 쓴 줄을 다시 읽었다. 열여섯 줄째였다.
「닷새 연속. 시각은 오르내림. 아직 아무 말도 안 함. 겨울까지 적음.」
열일곱 줄째를 적었다.
「엿새 연속. 시각 이틀째 앞으로.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함.」
장기요양 결과는 오지 않았다. 방문 조사는 8월 25일이었다.
「여드레째. 없음.」
5. 15센티
오후에 서진이 야장을 폈다.
어제와 오늘, 판 것은 12미터였다. 케이블에 감긴 길이로 12미터였다.
토막 길이는 2.96, 2.98, 2.97, 2.94였다. 다 더하면 11.85미터였다.
“15센티 모자라요.”
“모자란 게 아니라 다르지.”
“어느 쪽이 맞아요?”
“둘 다 안 맞아.”
서진이 연필을 세로로 세워 두 줄을 그렸다.
“케이블 쪽은 늘어난 만큼 크게 나와. 드릴 무게하고 케이블 제 무게로 늘어나니까 실제보다 깊게 적히지. 코어 쪽은 부스러기 된 데하고 깨져서 없어진 데가 빠지니까 실제보다 짧게 나오고.”
“방향이 반대네요.”
“반대야. 그래서 참값은 이 사이 어디야.”
재혁이 두 줄 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럼 이 사이를 어떻게 좁혀요?”
“안 좁혀.”
”…예?”
“둘을 맞춰 놓으면 자가 하나가 돼. 하나짜리 자는 틀려도 아무도 몰라.”
서진이 야장에 오늘 치를 적었다.
「8월 31일~9월 1일. 케이블 12.00. 코어 누계 11.85. 차 0.15.」
“이 차이는 앞으로 커질 거야. 깊어지면 케이블이 더 늘어나고, 깊어지면 부스러기도 더 나오니까. 커지는 게 정상이야.”
“그럼 뭘 봐요?”
“하루에 얼마씩 벌어지는지를 봐. 그게 갑자기 세 배가 되면 그날 뭔가 있었던 거야. 벌어지는 게 값이야. 벌어졌다는 게 값이 아니고.”
재혁이 그 문장을 노트 여백에 옮겨 적었다.
입도는 두 벌씩 재는 셋째 날이었다. 사분법으로 나누고, 1밀리와 0.25밀리 체 두 개에 3분씩. 8월 21일에 하던 방법 그대로였다.
첫 벌 23, 둘째 벌 22였다.
“폭이 1이에요. 어제하고 그저께는 2였고요.”
“폭도 세 점이 됐네.”
“폭이 줄었다고 해도 돼요?”
“폭에도 폭이 있어. 그것도 세 점이야.”
옛날 값과 견줄 때는 첫 벌만 쓰기로 재기 전에 정해 두었다. 8월 21일 값이 21이었고 오늘 첫 벌은 23이었다. 차이는 2였다. 손 폭이 1에서 2 사이였으니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오늘도 못 가르네요.”
“못 가르는 걸 세 번 적으면, 그것도 값이야. 이 방법으로는 2를 못 가른다는 값.”
밤에 인천으로 보낼 봉투를 쌌다. 토막 길이 실측 이틀 치와, 케이블과의 차 0.15미터와, 왜 그 둘을 따로 적는지가 들어갔다.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이 값은 올해에는 안 씁니다. 저희도 안 씁니다.」
6. 빈칸 둘
저녁에 은재가 지난 시즌 코어의 새 서식을 채우고 있었다.
새로 만든 칸이 하나 있었다. 「처음 길이」였다. 이완을 보려면 처음 길이가 있어야 했고, 지난 시즌 것에는 그것이 없었다. 도착일부터 쟀기 때문이었다.
은재의 손이 멈춰 있었다.
“여기 뭘 써요?”
“비워 두려고 했죠.”
”…네.”
“비워 두면 나중 사람이 세 가지로 읽어요.”
경옥이 손가락을 셋 폈다.
“하나, 그런 게 없었다. 둘, 있었는데 우리가 안 쟀다. 셋, 재 놓고 옮겨 적는 걸 잊었다.”
“셋이 제일 무섭네요.”
“셋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요. 그래서 빈칸을 안 남기는 거예요.”
경옥이 서식 아래에 표기 두 개를 만들었다.
「안 잼」과 「해당 없음」이었다.
“지난 시즌 것은 전부 ‘안 잼’이에요. 그리고 옆 칸에 ‘도착일부터 잼’을 같이 써요. 그걸 안 쓰면 우리가 아무것도 안 잰 줄 알아요.”
“둘 다 빈칸인데 왜 나눠요?”
“없는 것하고 안 한 것은 나중에 할 수 있는 게 달라요. 없는 건 영영 없고, 안 한 건 다음 시즌부터 하면 돼요.”
은재가 백서른 통 분량의 칸을 같은 손놀림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안 잼, 안 잼, 안 잼.
그러다 물었다.
“이거 스물세 해 동안 아무도 안 봤을까요.”
“봤겠죠. 보고 그냥 뒀겠죠. 저도 그랬고요.”
책상 위에 오후에 도착한 봉투가 있었다. 남극에서 온 것이었다.
두 줄이었다.
「토막 길이 실측, 8월 31일 아침부터 시작함. 요청서는 같은 날 오후에 도착함.」
은재가 그것을 읽고 웃었다.
“저희가 보내기도 전에 하고 있었네요.”
“그러네요.”
경옥이 요청서 사본을 벽에 붙이고, 그 위에 남극 회신을 겹쳐 붙였다. 모서리를 맞추지 않고 2센티쯤 어긋나게.
“또 어긋나게 붙이시네요.”
“맞춰 붙이면 한 장으로 보여요. 한 장으로 보이면 우리가 부탁해서 저쪽이 한 게 돼요.”
“실제로는요?”
“따로 생각한 거예요. 그게 자료예요. 부탁해서 한 건 자료가 아니고요.”
벽에 종이가 다섯 장이 됐다. 닫은 기준, 쌓는 날, 사선 그은 기록지, 1월 빈 표, 그리고 어긋나게 겹친 두 장.
옆 연구동 넉 통은 오늘도 보류였다. 사유는 같았고, 오늘 것으로 다시 적었다. 3월에 자리가 모자라는 통도 그대로 넉 통이었다.
절단까지 31일이었다.
은재가 문 쪽으로 가다가 돌아봤다.
“아까 세 줄 오르막이요. 그거 저는 계속 볼 건데요.”
“보세요. 보는 건 괜찮아요.”
“말만 안 하면요?”
“말은 열 줄 되면 해요. 그때는 제가 먼저 물을게요.”
자가 하나면 벌어질 데가 없다. 자가 둘이면 반드시 벌어진다. 벌어지는 것은 사고가 아니라 자가 둘이라는 증거다.
벌어진 자리를 메우면 편해지지만, 메운 순간 자는 하나가 된다. 하나짜리 자는 틀려도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벌어진 채로 둘 다 적고, 벌어지는 폭이 얼마씩 느는지를 대신 본다. 값은 벌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벌어지는 속도에 있다.
빈칸은 한 가지가 아니다. 없는 것과 안 한 것과 잊은 것이 똑같이 비어 있다. 나중 사람에게는 그 셋이 같은 흰 자리로 보이므로, 지금 사람이 나눠서 적어야 한다. 없는 것은 영영 없지만 안 한 것은 다음부터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떤 벌어짐은 도로 못 붙인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더 천천히 벌어지게 하는 것과, 상한 것부터 먼저 옮기는 것뿐이다. 성한 것은 기다릴 수 있고 상한 것은 못 기다린다.
물어서 아는 것과 보여 줘서 아는 것 사이에도 폭이 있다. 그 폭은 좁아지지 않는다. 좁아지지 않는 폭을 매일 적는 사람은, 좁히려는 사람보다 오래 적는다.
기한이 없는 일에는 사람이 하루치를 붙인다. 삼십 분이라고 정해 놓지 않으면 삼십 년이 지나도 안 하기 때문이다.
그날 네 자리에서 사람들은 벌어진 자리를 메우지 않았다.
폭만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