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39화 - 매듭

제139화 「매듭」

1. 닫지 않는 마지막

다음 달 104석. 뼈대는 다 못 박혔고 그 2마디만 여전히 빈칸이었다. 그런데 오늘 소율이 붙든 건 곡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맨 끝, 마지막 화음이었다.

지난달 공연에선 곡을 완전히 닫고 끝냈다. 마지막 화음이 제자리로 툭 내려앉아, 문이 닫히듯 소리가 마무리됐다. 그런데 오늘 그 끝을 다시 짚으니 무언가 어긋났다.

“닫으니까 오늘치가 아주 끝나 버려요.”

소율이 손을 건반에서 뗐다.

건반이 종지를 짚어 주었다.

“화음이 딸림에서 으뜸으로 내려앉으면 귀가 ‘이제 끝’이라고 들어요.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거죠. 근데 딸림에서 그냥 멈추면요.”

그가 마지막 화음을 으뜸 대신 딸림에서 멈춰 세웠다. 방이 끝났는데 안 끝난 것 같았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 아직 걸려 있었다.

“이러면 사람들이 박수를 언제 쳐야 할지 몰라요.”

건반이 웃었다.

“그게 좋아요.”

소율이 말했다.

“닫으면 그날로 끝이잖아요. 여기를 반만 잠가 두면, 다음 달에 와서 다시 풀 수 있어요.”

매듭 얘기였다. 두 갈래 실을 세게 당겨 완전히 조이면 단단하지만, 풀려면 잘라야 한다. 그런데 한 갈래를 고리로 남겨 두면, 리본처럼, 당길 때 스르르 풀린다. 묶여 있으면서 언제든 풀 수 있는 매듭.

소율은 곡을 매듭짓되 고를 남기기로 했다. 그 2마디 빈칸은 그대로 두고, 맨 끝 화음도 반만 잠갔다.

지난달엔 그 2마디 빈칸에서 관객이 숨을 멈췄다. 오늘 끝을 반만 잠그자, 그 빈칸과 열린 끝이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다 채우지 않은 자리, 다 닫지 않은 자리. 소율은 그 둘을 곡의 처음과 끝에 하나씩 두기로 했다.

“뼈대는 다 정했는데, 끝을 안 닫으니까 오히려 다음이 생겨요.”

건반이 마지막 딸림화음을 여리게 눌러 두었다. 방이 조용해졌는데, 그 조용함이 곡의 바깥으로 이어지는 복도 같았다. 끝난 자리가 아니라, 다음 달로 열려 있는 문이었다.

2. 봉인

발사까지 34일. 큰 화면에는 2층이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아래층은 어제까지 잠근 바닥, 위층은 발사체가 오른 뒤의 값. 오늘 명호가 할 일은 그 둘을 한 번에 묶는 것이었다.

“오늘부터 여기 아래는 못 바꿉니다.”

명호가 통제실 사람들에게 말했다.

“바꾸려면 이 방 전부가 모여서, 뭘 왜 바꾸는지 적고, 다 같이 손을 들어야 해요.”

젊은 관제사가 물었다.

“근데 발사가 아직 34일 남았는데요. 그동안 더 좋은 값을 찾으면요?”

“그래도 못 바꿉니다.”

명호가 화면에 서명 칸을 띄웠다.

“지금 여기 다 이름을 겁니다. 이름을 걸었는데 나중에 혼자 슬쩍 고치면, 그건 이름을 안 건 거예요.”

고증을 붙이자면 설계 동결이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값을 잠그고, 그 아래를 바꾸려면 정해진 문을 거치게 한다.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하나씩 고치면, 발사 전날엔 아무도 지금 뭐가 맞는 값인지 모르게 된다.

명호가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값을 하나하나 잠그고, 값 옆에 이유를 적고, 굳은 바닥 위에 위층을 얹었다. 이제 그 전부를 한 번에 봉인할 차례였다. 봉인하지 않으면, 애써 쌓아 올린 것도 누군가의 좋은 생각 하나에 슬그머니 흔들린다.

관제사가 조금 억울한 얼굴이었다.

“묶어 버리면 답답하잖아요.”

“매듭이 답답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명호가 말했다.

“풀리지 말라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가 서명 칸 옆에 한 줄을 더 만들었다. ‘변경을 원하면 여기에 적는다.’

“잘 지은 매듭은 푸는 자리를 남겨. 못 푸는 게 아니라, 아무나 못 푸는 거야. 정말 바꿔야 하면 이 줄에 적어. 그럼 이 방이 다 같이 풀어.”

서명이 하나씩 화면에 찍혔다. 열둘. 마지막 칸에 명호가 자기 이름을 넣었다. 잠긴 바닥 위로 봉인이 내려앉았다.

“여기서부턴 날이 빨리 갈 겁니다.”

명호가 화면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바닥을 묶어 놨으니까, 이제 위만 보면 돼요.”

3. 저희끼리 묶이는 것

아침에 동현은 이상한 걸 알아차렸다. 오늘은 어느 층에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지난 2주 동안 3층이 물으면 알려 주었고, 그걸 배운 3층이 4층에, 4층이 6층에, 6층이 7층에 건넸다. 순서 3줄이 층을 건너며 저희끼리 돌았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

후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다들 조용한데, 또 어디서 막힌 거 아니에요?”

동현은 사내 게시판을 열었다. 누군가 순서 3줄을 정리해 한 장으로 묶어 공용 문서로 올려 두었다. 그 밑에는 층마다 자기가 겪은 걸 한 줄씩 더해 놓았다. 3층 밑에 4줄, 6층 밑에 5줄.

“막힌 게 아니야.”

동현이 화면을 후배에게 돌려 보였다.

“저희끼리 묶인 거야.”

내가 층마다 뛰어다니며 하나씩 매어 주던 걸, 이제 저희가 서로 매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겪은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건네고, 건네받은 사람이 또 그 밑에 한 줄을 더했다.

“그럼 과장님은 이제 뭐 하세요?”

후배가 물었다.

“내 일.”

동현이 자기 부서 서류를 처음으로 펼쳤다. 2주 만에, 남의 층이 아니라 제 책상만 보는 하루였다.

박영자에게서 받은 손수건 위에는 명찰 6장이 나란했다. 더 비워 둘 자리가 없었다. 동현은 새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6장이 서로 실 한 오라기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흐름표에 오늘 한 줄을 적었다. “오늘 나는 아무 데도 안 갔고, 아무도 나한테 안 왔다. 그런데 6층이 서로 묶여 있다.”

2주 전만 해도 동현은 층마다 찾아가 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묻고 기다리고, 그쪽 손으로 하게 만들었다. 그 3줄이 이제는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저희끼리 돌고 있었다. 가르치는 일의 끝은, 가르친 사람이 없어도 되는 날이었다.

매듭은 내가 손에 쥐고 있을 때가 아니라, 손을 놓았는데도 안 풀릴 때 비로소 다 된 것이었다.

4. 5년을 매듭짓다

토요일이 이틀 앞이었다. 약국과 화원. 벽에는 아직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재회까지 날을 세던 자리. 그 숫자가 영이 된 지 며칠이 지났다.

진우가 그 종이를 떼려고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마침 김지수가 들렀다.

“떼시게요?”

“이제 셀 게 없으니까요.”

“떼는 거랑 매듭짓는 건 달라요.”

김지수가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5년 동안 아무것도 안 세시다가 처음 센 게 이거잖아요. 이제 그 숫자가 영이 됐고요. 근데 그냥 떼서 버리면, 그 5년이 없던 일이 돼요.”

“그럼 어떻게 해요.”

“매듭을 지으세요. 지나온 걸 풀리지 않게 한 번 묶어서, 다음으로 가져가는 거예요.”

진우는 종이를 떼되 버리지 않았다. 곱게 접어서, 토요일에 나갈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며칠 전에 넣어 둔 오래된 씨앗 봉지 옆이었다.

“버리는 게 아니라 가져가는 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진우는 접기 전에 그 종이를 한 번 더 보았다. 처음 날을 세기 시작하던 날, 숫자가 너무 커서 세는 일이 두려웠다. 이제 그 숫자가 영이 되어 손안에 접혀 있었다. 두려워서 세던 것이, 지나고 나니 건너온 다리였다.

토요일에는 셋이 앉는다. 진우와 현수와 김지수. 5년 전 장례식장에서는 진우 혼자 다 말했고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엔 셋이 나란히 약국까지 걷고, 오는 길에 화원에 들를 것이었다.

“매듭은 끝이 아니에요.”

김지수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풀리지 말라고 한 번 묶는 거예요. 토요일에 셋이 앉으면, 그게 매듭이에요.”

진우는 주머니 속 씨앗 봉지를 손끝으로 만졌다. 5년을 한 번 묶은 그 자리 옆에, 이번 봄에 심을 것이 함께 들어 있었다. 매듭 옆에 심는 씨앗. 그는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했다.

5. 뿌리의 매듭

분갈이가 주말로 잡혀 있었다. 오늘은 그 전 마지막 물주기, 김지수 차례였다. 그가 화분 밑을 살피자 밑구멍으로 나온 흰 뿌리가 어제보다 여러 가닥이었다.

김지수가 화분을 조심스레 기울여 흙 가장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뿌리가 화분 벽을 따라 안을 한 바퀴 돌아, 저희끼리 감겨 있었다.

“이제 얘가 화분 안에서 저를 한 바퀴 감았어요.”

뿌리가 바닥까지 내려간 다음 벽을 따라 옆으로 돌다가, 더 갈 데가 없어 저희끼리 매듭처럼 엉킨 것이었다. 화분 안이 뿌리로 꽉 찬 상태였다.

“그럼 답답한 거 아니에요?”

진우가 물었다.

“네. 그래서 주말에 옮기는 거예요.”

그런데 옮길 때 그냥 통째로 새 화분에 넣으면 안 된다고 했다. 감겨 있던 매듭을 손끝으로 살살 풀어, 몇 가닥을 바깥쪽으로 펴 줘야 새 흙에서 사방으로 벋는다는 것이었다.

“안 풀고 그대로 옮기면요?”

“새 흙으로 옮겨도 제 안에서만 계속 돌아요. 넓은 데로 갔는데도 원래 감긴 대로만 자라는 거죠.”

김지수가 손끝으로 흙 표면을 살살 짚었다.

“묶인 걸 새 데로 옮길 땐, 매듭을 한 번 풀어서 방향을 밖으로 돌려 줘야 해요. 안 그러면 자리를 옮긴 게 아니라 화분만 바꾼 게 돼요.”

진우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주머니 속 접힌 종이가 떠올랐다. 5년을 한 번 묶어서 다음으로 가져가는 것, 그리고 옮길 때는 그 매듭을 한 번 풀어 방향을 밖으로 돌리는 것.

원줄기 밑동의 곁가지가 어느새 한 마디 더 벋어 있었다. 김지수는 물을 천천히, 뿌리 바닥까지 닿게 부었다. 주말이면 이 매듭을 풀어 더 넓은 흙으로 옮길 것이었다.

6. 고리를 닫다

지금까지 ATLAS의 격자는 한쪽 끝에서 시작해 쭉 벋어 나가는 선이었다. 어제의 벋음으로 규칙이 새 구역까지 번졌고, 오늘 아침 그 벋어 나간 끝이 처음 시작한 자리 가까이 돌아와 있었다.

관제사가 화면을 짚었다.

“여기 끝이랑 저기 처음이 손 닿을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그냥 둘까요?”

“이어.”

팀장이 말했다.

“끝을 처음한테 묶어.”

단 그냥 이으면 안 됐다. 두 자리의 위상과 전압을 먼저 맞춰야 했다. 안 맞은 채로 이으면 잇는 순간 큰 충격이 지나간다. 두 눈금이 겹칠 때를 기다렸다가, 딱 포개지는 순간 개폐기를 닫는 것이었다.

관제사가 두 파형이 서서히 다가와 하나로 겹치는 걸 지켜보았다. 눈금이 포개지는 찰나에 개폐기가 닫혔다. 계기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이제 격자는 선이 아니라 고리였다.

마흔여드레 동안 격자는 한 방향으로만 자라 왔다. 처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자라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멀어지던 끝이 돌아와 처음과 손을 맞잡았다. 자란다는 것이 늘 멀리 나가는 일만은 아니었다.

“선은 한 군데 끊기면 그 뒤가 다 어두워지지만.”

팀장이 말했다.

“고리는 한 군데 끊겨도, 전기가 반대로 돌아와.”

벋어 나간 끝이 처음 자리에 묶이자, 어느 한 곳이 끊어져도 반대 방향으로 빛이 돌아 들어왔다. 열려 있던 고리가 한 매듭으로 닫혔다. 19번째 거울 옆에 새 거울 한 장이 더 걸려 고리는 일흔넷이 되었고, 송전은 1152시간, 48일째 끊기지 않았다.

기록란에 팀장이 한 줄을 남겼다.

“매듭이란 이어 온 것을 끊는 일이 아니다. 벋어 나간 끝을 처음 자리에 묶어, 어느 한 곳이 끊어져도 전체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선은 멀리 갈수록 시작에서 멀어지지만, 고리는 멀리 갈수록 시작으로 돌아온다. 잘 지은 매듭은 조이면서도 푸는 자리를 남기고, 그래서 끝처럼 보이지만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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